영화 <인 디 에어>의 한 장면
여섯 번째 문제. 낭떠러지에서
<문제>
제이슨 라이트맨의 영화 <인 디 에어>에는 직업 전환 카운슬러라는 직업이 나온다. 멋진 직업 같지만 하는 일은 그렇지 않다. 회사에게 위임을 받아 해고 사실을 통보하고 “당신에겐 퇴직금이 얼마가 나오며, 보험이 몇 달 동안 지속되고, 재취업을 위해 1년간 교육을 받을 수 있으며…”와 같은 뒷수습을 하는 일이다. 해고당해 고통스러워하는 사람들 앞에서 거침없이 대화를 진행해야 한다. 다음은 직업 전환 카운슬러 라이언 빙햄(조지 클루니)이 밥 (J. K. 시몬스)에게 해고를 통보한 후의 대화다.
라이언 : 애들이 왜 운동선수를 좋아하는지 아세요?
밥 : 속옷 모델 뺨치니까.
라이언 : 아뇨, 그건 우리 같은 어른들이 좋아하는 이유고요. 애들이 운동선수들을 좋아하는 이유는, 그들이 꿈을 추구하기 때문이죠.
밥 : 난 덩크슛도 못해.
라이언 : 요리는 할 수 있잖아요. 예전에 프랑스 요리 공부를 하셨더군요. 이 회사에서 꿈을 포기하는 대가로 얼마나 받으셨습니까?
밥 : 1년에 큰 걸로 27장.
라이언 : 그럼 언제쯤 이 일을 그만두고 좋아하는 일로 복귀해서 행복을 찾으실 겁니까?
밥 : ( )
<문제 해설>
버닝하우스(theburninghouse.com)라는 사이트에는 사람들의 물건이 찍힌 사진이 수없이 올라와 있다. 상황은 간단하다. 만약 당신의 집에 불이 난다면 어떤 물건을 챙기겠는가? 질문은 단순하지만 대답은 각양각색이다. 어떤 사람은 노트를 챙기고, 어떤 사람은 노트북을 챙긴다. 어떤 사람은 사진을 챙기고, 어떤 사람은 카메라를 챙긴다. 사이트에 들어가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사람들의 사진을 보게 된다. 실제로 불이 난다면 상황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을 것이다. 불이 난다는 가정하에서 진행하는 생각과 실제로 불이 났을 때의 행동은 무척 다를 것이다. 나라면 어떨까. 노트북을 들고 뛸까? 사진이나 문서는 클라우드에 다 저장돼 있는데 뭐 하러? 아끼는 코트를 들고 뛸까? 설마 내가 그렇게 멍청하지는 않겠지? 불이 나면 뭔가 챙길 겨를이 없을 것 같다. 일단 내 몸부터 살고 봐야지.
영화 <인 디 에어>의 한 장면
영화 <인 디 에어>에서도 비슷한 내용이 나온다. 직업 전환 카운슬러 라이언 빙햄은 특강을 할 때마다 백팩 하나를 들고 가서 이렇게 말한다.
“당신 삶의 무게는 어느 정도입니까? 당신이 백팩을 메고 간다고 상상해보세요. 우선 스트랩의 무게가 느껴지겠죠? 이제 당신 삶을 구성하는 모든 물건들을 백팩에 넣어보세요. 우선 자질구레한 것들부터 시작합시다. 텔레비전, 옷…, 이제 큰 걸 넣어봅시다. 소파, 침대, 식탁… 전부 배낭에 넣으세요. 자동차도 넣으세요. 집도 넣으시고요. 자, 이제 걸어봅시다. 힘들죠? 이게 우리가 매일 같이 하고 있는 일입니다. 움직일 수 없을 때까지 우리는 계속 채워 넣고 있어요. 착각을 버리세요. 인생은 여행입니다. 자, 이제 백팩을 불태워보죠. 그 전에 꺼내고 싶은 게 있습니까? 사진요? 아니, 그냥 다 태워버립시다. 내일 아침이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나와 만나는 겁니다. 상쾌하지 않습니까?”
성공과 경영을 교육하는 자리에서 ‘채우지 말고 매일 비우는 삶을 살라’고 말하는 건 새롭다. 스님이 한 말이라면 하나도 새롭지 않겠지만, 멀끔하게 생긴 조지 클루니가 저런 말을 하는데 어찌 귀가 솔깃하지 않을 수 있겠나.
얼마 전 나는 라이언 빙햄이 했던 말의 의미를 몸으로 깨달았다. 작업실의 책을 다른 곳으로 옮겨야 할 일이 생겼는데, 이삿짐 센터를 부르긴 좀 어중간한 분량이었다. ‘그래, 얼마 되지도 않는데 돈도 아낄 겸 조금씩 져나르지, 뭐.’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한 일이 지옥문을 여는 결정이 될 줄은 몰랐다. 우선 택배 기사님들이 주로 쓰는 카트를 하나 샀다. 5만원쯤 하더라. 이삿짐 센터에서 쓰는 플라스틱 박스도 샀다. 책을 많이 담으려고 조금 큰 걸로 샀다. 박스에 책을 담다가 예전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책을 포장하고 옮기는 작업이 얼마나 고되고 귀찮고 번거롭고 짜증나는 일인지 잊고 있었다. 게다가 너무 큰 박스를 골랐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바퀴 달린 카트가 있으면 뭘 하나. 싣기조차 힘들 만큼 무거운데. 힘들 때마다 버릴 책이 없나 살폈다. 이 책은 이래서 안되고, 저건 저래서 또 못 버리겠고…. 책은 내가 짊어지고 있는 삶의 무게였고, 고민의 무게였다. 라이언 빙햄의 말처럼 다 태워버릴 수 있으면 좋겠지만 해결책이 간단하지는 않다.
삶은 여행이지만, 우리는 여행자임을 자주 잊어버린다. 조금이라도 안전한 장소를 발견하면 눌러앉고 싶은 것이 인간의 본능인 모양이다. 우린 쉽게 타협하고, 별것 아닌 걸로 편안해하고, 이 정도면 괜찮다고 스스로를 위로한다. 하루하루가 새로운 모험이라면 24시간 내내 짜릿하겠지만 또 얼마나 피곤할 것인가. 매일이 낭떠러지 곁을 지나는 것 같다면 얼마나 삶이 아슬아슬할 것인가.
영화 <인 디 에어>는 인상적인 장면으로 시작한다. 해고 통보를 받은 사람들이 각자의 방식대로 항의하고 분노하는 장면을 이어 붙였다. 어떤 사람은 욕을 하고, 어떤 사람은 울고, 어떤 사람은 번복해달라고 매달린다. 해고 통보를 받는 그 순간은 아마도 생애 최악의 순간일 것이다. 생애 처음 좌절감을 맛보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그럴 때 라이언 빙햄은 이렇게 얘기한다.
“변화는 두렵지만 이걸 생각해보세요. 큰 성공을 거둔 사람들 누구나 귀하처럼 해고당한 경험이 있습니다. 그들이 성공할 수 있었던 건 해고라는 시련을 이겼기 때문이고요.”
이건 직업과 취업에 대한 문화가 달라서이기도 하다. 경제학자 팀 하포드는 역사적으로 구조적 실업이 비교적 낮은 독일과 미국의 취업 시스템을 비교한 적이 있다. 독일은 청년의 실업을 위해 정교한 견습생 제도와 훈련 체계를 갖추고 있으며, 자영업자에게 보조금을 지급해 기술을 향상시키도록 독려한다. 미국식 접근 방법은 극단적으로 유연하다. 사람들은 아주 간단하게 해고될 수 있고, 또한 아주 간단하게 고용될 수 있다. 팀 하포드는 이어서 스페인, 이탈리아, 그리스 세 나라의 시스템을 비판하고 있는데, 한국의 시스템을 알았다면 어떤 분석을 남겼을지 궁금하다. 두 마리 토끼를 다 쫓지 않고 집안에 있는 토끼마저 내쫓아버리는 자학적 시스템이라고 하지 않았을까. 견습은 많되 돈은 주지 않고, 기술을 독려하되 몇몇 직종에만 편파적이고, 해고는 쉽되 정직원으로 채용하는 일은 드문, 기묘한 나라의 시스템이다.
독일과 미국 중 어떤 시스템이 더 나은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한 건 ‘평생 직장’이라는 단어가 점점 낡아가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한 가지 꿈으로 평생을 버틸 수 없다. 여러 가지 꿈을 동시에 꿔야 하거나, 세밀한 꿈 대신 광범위한 꿈을 꿔야 한다. 그래야 낭떠러지에서 떨어지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으며, 최악의 순간을 버텨낼 수 있다. 라이언 빙햄의 충고처럼 언젠가는 현재 하고 있는 일을 그만두고 좋아하는 일로 복귀해야 할 때가 올 것이다. 혹은 좋아하는 일을 그만두고 돈을 벌기 위한 일로 향해야 할 때가 올 것이다.
직업과 행복의 문제는 삶을 배분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한 가지 일에 삶의 모든 것을 쏟아 붓는 순간 우리는 쉽게 좌절할 수밖에 없다. 깊이 빠지지 않고, 여행하듯 살아내야 한다. 그렇지만 인간은 또한 한 가지 일에 푹 빠져 지낼 때 매력적이기도 하다. 사랑에 빠졌을 때, 인생의 모든 것을 걸고 무모한 일에 도전할 때 인간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인 디 에어>에서 라이언 빙햄은 결혼을 거부하고, 매사에 깊이 빠지는 일을 자제한다. 자신만의 룰이 깨지는 법 없이 누구와도 닿지 않고 삶을 살아간다. 그런 라이언 빙햄도 마지막에는 흔들린다. 사랑에 빠지고, 어딘가에 안착하고 싶어진다. 어떤 삶이 옳은 삶인지, 어떤 삶이 더 나은 삶인지 정답은 없다.
주관식으로 출제된 문제의 정답은, ‘좋은 질문이네.’다. J. K. 시몬스는 한숨을 쉬면서 이렇게 말한다. “Good Question.” 빈칸에 들어갈 말은 누구에게나 다르겠지만, 라이언 빙햄이 했던 말이 좋은 질문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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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중혁(소설가)
소설 쓰고 산문도 쓰고 칼럼도 쓴다. 『스마일』, 『좀비들』, 『미스터 모노레일』,『뭐라도 되겠지』, 『메이드 인 공장』 등을 썼다.
tsy81
2015.11.26
안녕나야
2015.11.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