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을 소개, 아니 ‘분석’하는 하나의 방법은 “올해 노벨문학상 수상작”이라는 사실일 것이다. 노벨상 특수가 예전만 못하다고는 하지만 내용도 흥미진진하고 구성도 독특한데, 생각만큼 주목받거나 많이 팔리지는 않은 듯하다. 만일 하루키나 한국인 작가가 탔다면 어땠을까. 혹은 이창래처럼 영어가 모어인 ‘한국인’이 수상했다면? 지금 분위기와는 다르지 않았을까.
나는 이러한 상황이 우리사회의 단면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생각한다. 분단의 업(業)으로 언제나 전쟁 발발 위협과 긴장이 주요 통치 수단인 사회에 살면서도 막상 전쟁 연구는 그리 많지 않고,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라는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 지역의 문화적 배경을 가진 여성 작가도 생소하다. 조금 과장해서 말한다면, 한국은 자신에게도 남에게도 무관심한 사회다. 다른 말로 하면, 주류 지향. 우리에게 외국은 중ㆍ미ㆍ일ㆍ러 뿐이다.
이 작품은 전쟁과 평화, 남과 여, 생과 사, 고통과 생존 등 문학의 전통적인 주제를 다루고 있지만 접근 방식은 전혀 다르다. 관점도, 형식도, 주장도 다르다. 소설, 르포, 증언의 경계를 허물면서 ‘쓰는 방식’이 곧 ‘메시지’임을 보여준다. 전쟁은 예술의 영원한 소재다. 그러나 여성에 대한 재현은 주로 폐허 위의 재건자, 폭력의 피해자, 헤어진 연인 등 ‘콜래트럴 데미지(부수적 피해)’에 그치는 경우가 많았다. 작가의 상상력에서 여성은 전쟁의 당사자가 아니라 남성 캐릭터를 보조하거나 남성 간 갈등의 부산물(볼모)을 벗어나지 못했다. 참전한 경우에도 후방에서 간호 업무나 의료 지원 등 전투 외 업무에 종사하는 것으로 그려진다. 잠깐! 이렇게 쓰니, 그럴 듯한 것 같지만 내가 위에 쓴 이야기는 부분적 사실에 불과하다.
알렉시예비치는 숨겨진 역사를 드러냈다. 2차 대전에 참전했던 1백만 명이 넘는 소련 여군 중 200명을 집중 인터뷰, 한림원의 평가대로 “다양한 목소리(多聲性)를 통해 이 시대의 고통과 용기를 담은 기념비적인 작품”을 탄생시켰다. 로고스보다 관계, 말씀이 아닌 목소리, 다른 목소리, 다양한 목소리는 여성주의 인식론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단어이기도 하다.
전쟁과 성별에 대한 일반적 통념 중 하나는 남성은 전쟁을 일으키고 여성은 평화로운 존재라는 것이다. 이러한 성별 논리에 기반 한 기존 국제정치학에서 남성은 국가나 사회적 집단을 이루면서 다른 남성과 싸우는(combat) 반면, 여성은 전장 밖에서 ‘자기 남자’의 보호를 받는다고 가정한다. 성폭력과 가정폭력 등 다양한 여성에 대한 폭력(VAW, Violence Against Women)을 생각하면, 일상에서도 남성은 여성을 보호하지 않지만 ‘보호자 남성’의 신화는 막강하다.
그러나 이 작품을 읽고 나면 누가 누구를 보호하는지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근대국가 성립 시기 선거권과 국민개병(皆兵) 제도는 동시에 등장했다. 그러나 이는 남성에게만 한정된 권리이자 의무였다. 여성이 시민권을 가지려면 가족 제도를 통한 남성의 승인이 필요했다. 자유주의자들은 여성이 ‘2등’ 시민의 지위에 벗어나려면 병역을 수행하면 해결될 수 있다고 보았다. 불평등의 이유가 징집에서 면제(실제는 배제)된 여성의 ‘특권’ 때문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여성의 경험을 통해 이러한 ‘이론과 현실’에 정면으로 도전한다. 어느 군대도 인종, 성별, 성 정체성, 국적 등에 따라 절대로 평등하게 구성되지 않는다. 2차 대전시 일본군으로 참전했던 조선인이나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알제리 병사는 식량 배급부터 차별 받았다. 알제리 병사에게는 우유와 과일이 지급되지 않았고, 이 때문에 폭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이 작품에서도 “여성의 입대와 참전 = 불평등 해소”가 아님을 보여준다. 전쟁의 고통과 더불어, 식민지 출신 남성처럼 또 다른 차별이 기다리고 있다. 생리를 하는 군인, 남성보다 얇은 옷을 지급받는 병사, 여자 화장실이 없어 바다에 뛰어든 분대장, 여성을 가미카제로 사용한 군대.
내가 생각하는 이 작품의 가장 큰 성과는 전쟁에 대한 상상력과 이미지를 변화시켜다는 데 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참전 경험은 남성 사이에도 많은 차이가 있다. 민간학살의 경험에서부터 현지인을 돕는 병사도 있고 산 속에 몇 십 년을 혼자 사는 이들도 있고, 탈영은 그보다 훨씬 많다. 남성과 여성의 차이는 더 말할 나위 없다. ‘살인’이라는 행위부터 다른 자아를 요구한다. 다른 목소리를 내는 남성들도 있다. 2차 대전 당시, 한국인 군 위안부를 ‘보급’ 받은 일본군 남성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섹스를 할 기운도 생각도 전혀 없었다. 그저 도망가고 싶었다. 전쟁 내내, 가장 그리웠던 것은 집에서 마시던 커피였다”.
전쟁에서의 시간 경험은 대개 지루한 대기의 연속이다. 전쟁터에 나간 남자들은 극도의 스트레스와 공포감을 경험하거나 아니면 용기백배로 싸우거나 둘 중 하나이기만 할까? 이런 남성의 상태를 ‘위무’하기 위해 전시 성노예는 불가피한 것일까. 전시(戰時) 강간은 개인적 일탈로 여겨지지만 성폭력(mass rape)은 고대서부터 지금 이 순간에도 지구상 어디선가에서 행해지고 있는 전쟁의 기본 전략이다. 상대 남성의 사기를 꺾고 ‘전리품(여성)’을 획득하기 위해서다.
2차 대전과 이라크 전쟁은 다르다. 현대전은 고도의 기술전으로 전쟁을 수행, 공격하는데 있어서 전통적인 남성다움의 의미를 변화시키면서 여성의 전쟁 참전 비율을 높이고 있다. 미국의 경우 전체 미국 군인 중 15%가 여성이지만, 육체적 강인함보다 기술력이 요구되는 공군의 여성 비율은 20%에 이른다. 미국에서 전체 장교와 사병의 15%가 여성이며, 여성 사병 중 50%는 흑인 여성이다. 이러한 변화는 또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 낼 것이다. 전쟁 문학은 문명과 역사를 반영, ‘지시’하는 영원한 가늠대이다.
사족 - 한국사회의 노벨상, 특히 문학상에 대한 강박증과 욕망은 종종 민망한 장면을 연출한다. 독자로서 내 개인적인 생각은 다음과 같다. 이공계 분야는 문학상이나 평화상보다 상대적으로 개인적인 성취로 가능하다. 반면, 문학은 그 사회의 총체적인 지성과 인문학적 기반, 역사적 경험에 대한 성찰, 사회적 자아 수준을 반영한다. 만일, 만일, 만일 한국이 노벨상을 ‘다시’ 탄다면(우리가 종종 잊은 사실, 평화상은 탔다), 이공계 분야에서 수상 확률이 높다. 우리사회의 인문학 수준 - 대학, 문단, 출판, 언론 분야 등 - 에 대한 총제적인 자화상을 직면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자신에게로의 귀성(歸省)과 변화, 이것이 모든 앎의 시작이 아닐까.
그리고 그토록 노벨문학상을 열망한다면, 기존 수상작인 ‘기출 문제’를 읽는 게 순서다. 우선 이 책부터 말이다.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는 ‘전쟁의 얼굴을 넘어’ 여성과 사회적 약자, 사회, 국가에 대한 작가만의 다른 시각을 보여준다. 그로 인해 나는 배웠다. 한국사회의 문화적 식민성을. 탈식민으로 가는 먼 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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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저/박은정 역 | 문학동네
이 책은 전쟁에 참전했던 200여 명의 여성들의 이야기를 모은 책이다. 여성들은 참전하여 저격수가 되거나 탱크를 몰기도 했고, 병원에서 일을 했지만 그들의 이야기는 전쟁의 일부가 되지 못한다. 전쟁을 겪은 여성들에겐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책에서 입을 연 여성들은 거의 대부분 생애 처음으로 자신의 전쟁 가담 경험을 털어놓는다. 여성이 털어놓는 전쟁 회고담은 전쟁 베테랑 군인이나 남성이 털어놓는 전쟁 회고담에서는 철저히 배제되어온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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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진(여성학자, 『페미니즘의 도전』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