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도쿄여행을 다녀왔을 때 일본 작가들이 편애한다는 한 호텔에 묵었다. 국제적 체인브랜드의 특급호텔들이 즐비한 가운데 독자적으로 자신의 고유 색깔을 지키고 있는 도쿄 간다 스루가다이 언덕 위에 자리 잡은 ‘야마노우에 호텔(영문명은 Hilltop Hotel)’이다. 인근에 메이지 대학과 진보초 중고서점 거리가 위치해 있어 차분하고 학구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그간 일본 작가들의 저서를 통해 얼마나 이 호텔에 대해 자주 접했는지 모른다. 이 호텔은 1954년에 개업한 이래, 일본 작가들이 집중해서 글을 쓰기 위해 장기 투숙하던 곳으로 유명했다. “야마노우에 호텔에 얼마간 갇혀 지내야겠어.”라는 말은 속세를 끊고 당분간 글만 쓰겠어, 와 동일어같은 것이었다. 저명한 문학상을 탄 작가들은 이곳에 묵으면서 수상 후 첫 소설을 쓰는 풍습도 있었다고 한다. 호기심이 생기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큰마음 먹고 이곳에 이박 삼일 간 머물기로 했다. 이 곳에선 정말로 글의 영감이 샘솟고 절로 집중해서 원고지를 술술 채우게 될 것인가?
야마노우에 호텔은 정문에 들어서면서부터 예전 그대로의 노스탤직한 인테리어로 과거 60-70년대로 돌아간 듯한 묘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이렇게 과거의 향수를 느낄 수 있는 차분한 호텔을 도쿄에서 찾기 쉽지 않다. 앤티크 가구로 꾸며진 복고풍의 로비 라운지 한 켠에는 수많은 책으로 뒤덮인 ‘작가의 책상’이 오브제처럼 장식되어 있기도 했다. 로비에서부터 ‘글 쓰는 사람들을 위한 호텔’임을 어필하고 있었다. 이윽고 끼익 소리를 내는 낡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가장 중요한 객실로 올라갔다. 대체 이곳의 방은 어떻길래 글이 잘 써진다는 말인가.
나는 일부러 과거 이곳의 단골이었던 작가 미시마 유키오, 가와바타 야스나리 등이 즐겨 묵었다는 ‘일본식’ 객실을 선택했다. 바닥이 다다미로 되어 있어 푹신했고 유리창에는 창호지로 스크린이 되어 있어 그를 통해 햇빛이 은은하게 비추고 있었다. 나무 소재로 된 천정은 드높았고 침대 머리맡에는 푹신한 솜 베개와 딱딱한 메밀 베개 두 가지가 함께 세심하게 구비되어 있었다. 어찌 보면 호텔이라기보다 오래된 내 집의 내 방 같아서 정겨웠다.
그리고 나는 객실 안의 그 책상을 보았다. 대개 웬만한 호텔 객실에는 책상이 구비되어 있다. 하지만 그것들은 책상이라기보다는 있으나 마나 한 ‘테이블’의 느낌에 가깝다. 반면 이곳의 큼직한 앤티크 책상은 엄연한 ‘글쓰기용 책상’이었고 무엇보다도 이 객실의 ‘주인공’이었다. 책상 위에 놓인 램프조차도 글쓰기에 최적화된 채도의 램프였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그 앞의 의자를 당겨 앉아 잠시 노트에 이것저것 상념을 끄적여 보았다.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감정이 저 밑에서 차분히 잘 길어 올려지고 있었다. 본격적으로 쓸 원고 거리가 그 당시에 없었다는 것이 아쉬울 뿐이었다.
“최근 도쿄에는 외국계 자본의 호화로운 호텔이 계속 생기고 있지만 진정으로 도쿄다운 호텔은 이런 곳일 것이라 생각한다. 야마노우에 호텔에 숙박해 본 적은 없다. 그러나 차를 마시거나 식사하려고 잠깐 들를 때마다 지나치지 않으면서도 손님을 안심시키는 서비스를 느낀다.
이 소박한 호텔이 풍기는 독특한 분위기는 카리스마적인 매력을 지녔던 고 요시다 도시오 사장 덕분이다. ‘가만히 내버려둔다. 하지만 항상 마음을 쓰고 있다’는 공기가 감도는 것은 '호텔과 료칸의 장점을 두루 갖춘 숙소'라는 것이 그의 바람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이제 곧 벚꽃이 만개하는 사월, 만약 도쿄에 여행 가신다면 이곳 야마노우에 호텔(www.yamanoue-hotel.co.jp)에 한 번 묵어보시기를 개인적으로 추천하는 바이다. 그리고 그 마법의 책상에 앉아 글을 한 번 써보시길. 영감이 벚꽃 잎들처럼 활짝 피어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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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너무 많아사카이 준코 저/김수희 역 | 마음산책
“행복이란 것, 산다는 것은 읽는다는 행위에 속한 것이구나” 하고 말하는 사카이 준코. 세상에 떠도는 기묘한 공기를 신선한 언어로 포착해 독자들의 절대적인 공감을 얻은 그녀의 ‘극강極强의 독서 산문집’을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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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경선 (소설가)
『태도에 관하여』,『나의 남자』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