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 기고] 가둘 수 없는 이야기 - 『통조림 학원』을 읽고
우리가 참치 캔을 딸 때, 이것이 그 깊은 바다를 헤엄치던 참치의 어느 뱃살을 잘라내 삶은 것인지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 것처럼 부모들은 통조림 학원의 구체적인 인과에 관심이 없다. 그들이 열광하는 것은 오로지 결과다.
글ㆍ사진 김지은(아동문학평론가)
2016.03.22
작게
크게

크기변환_통조림학원_본문4.jpg

 

 

익숙하다는 이유로 우리가 외면하고 있는 아이들의 게토

 

예술가 앤디 워홀의 어머니는 아들에게 늘 통조림에 든 캠벨 수프를 먹였다고 한다. 아들은 자라서 캠벨 수프 깡통 연작을 잇달아 발표한다. 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통조림일 것이다. 그 후로도 통조림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먹을 것을 포함한 모든 신선한 것을 깡통 안에 넣을 수 있지 않을까 싶을 정도다. 통조림 모양의 알루미늄 캔에 든 손목시계 디자인을 개발한 이탈리아의 한 디자이너는 제품을 불티나게 팔아 치웠다. 그가 만든 시계는 모두 똑같은 모양에 진공으로 포장되어 있어 먼지 한 점 묻지 않은 채로 보관할 수 있다. 고전적으로 손목시계는 끊임없이 사람의 손을 타면서 해묵은 감정까지 같이 품고 가는 물건이다. 언제든 캔을 따서 새 것으로 갈아치울 수 있는 통조림 시계는 흐르는 자연의 시간마저 밀봉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반영한 것일지 모른다. 

 

송미경의 장편동화 『통조림 학원』은 무슨 말을 할 것인지 미리 알 것 같다는 점 때문에 아주 좋은 제목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송미경은 그 의심을 뛰어넘는 길로 독자를 데려가는 작가라는 걸 전작의 경험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주저함 없이 책을 펴 들었다. 통조림과 학원이라는 조합은 익숙하지만 익숙하다는 이유로 우리가 애써 외면하고 있는 아이들의 게토이기도 하다. 살아가려면 어쩔 수 없다는 핑계조차 잘 들리지 않을 만큼 너도나도 아이들을 틀에 가두는 일에 여념이 없다. 학교가 끝나는 시간은 가방을 멘 아이들이 노란 통조림 깡통이나 다름없는 셔틀 버스에 오르는 시간이다. 합법적인 학원 마감 시간인 밤 10시가 되면 알만한 건물들에서는 어린 인파가 완전히 시든 채 쏟아져 나온다.

 

송미경 작가는 이미 관성이 되어버린 이 쓸쓸한 장면에 주목한다. 대형 할인매장에 한 줄로 빽빽하게 진열된 통조림처럼 학원 간판 아래로 줄지어 걸어 나오는 아이들의 모습은 위협적으로도 보인다. 수많은 꽁치와 골뱅이는 그물에 잡힐 때만 해도 자신들이 이렇게 오래도록 좁은 통조림 안에 갇혀있어야 할 것이라고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들이 언젠가 튀어나올 것처럼 무섭게 웅크리고 있듯이 이 아이들의 마음도 그렇게 저항의 탄성을 가진 채 밀봉되어 있는 것일지 모른다. 작가가 주목하는 것은 가두어진 채 흐르지도 썩지도 못하는 어린 마음들의 폭발적 에너지다.

 

크기변환_통조림학원_본문6.jpg

 

 

나도 소중한 사람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주인공 승환이네 동네에는 삐에로 박사라는 정체불명의 인물이 새로 문을 연 학원이 있다. 이 학원은 신입생을 받으면 작은 생활 습관부터 모조리 교정하여 학습과 경쟁에 최적화된 아이로 만들어준다. 특수한 액체에 목욕을 시키고 아이들마다 감정을 조절하는 개별 처방을 담은 통조림을 먹이는 것이 이 학원의 마술적 비법인데 아이들은 모호한 부작용에 시달리지만 자신이 그렇게 되었다는 것조차 깨닫지 못한다. 일종의 기억 조작 과정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참치 캔을 딸 때, 이것이 그 깊은 바다를 헤엄치던 참치의 어느 뱃살을 잘라내 삶은 것인지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 것처럼 부모들은 통조림 학원의 구체적인 인과에 관심이 없다. 그들이 열광하는 것은 오로지 결과다. 다른 아이들처럼 승환이도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통조림 학원의 컨베이어 벨트에 발을 들여놓는다. 그리고 통조림을 순순히 받아먹지 않는 방식으로 삐에로 박사에게 저항하면서 비밀을 캐나가기 시작한다.

 

‘학업 경쟁’이라는 소재는 마트 계산대 앞에 쌓인 할인 통조림만큼 흔하다. 그러나 작가 송미경은 아이들을 둘러싼 훨씬 더 근원적인 포획을 간파하고 그 압착의 과정을 파고든다. 승환이가 한사코 거부하는 것은 아이들 하나하나 다른 역사를 거치면서 지니게 된 각자의 상처를 진공에 가두는 일이다.

 

승환이와 비슷한 아픔을 지닌 윤아는 승환이 대신 승환이의 기억이 깃든 통조림을 받아먹으면서 도벽을 이어받는다. 승환이가 다른 사람의 물건에 손대게 된 까닭은 그들이 소중히 여기는 것을 갖게 되면 자신도 소중한 사람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 때문이었다. 승환이는 소중한 누나를 잃었고 누나가 사라진 뒤에는 자기 자신을 비롯해서 그 누구도 소중해질 수 없다는 상실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딸을 잃고 나서 떡 찌는 일 외에는 무엇에도 무심해져 버린 승환이 엄마와 아빠도 마찬가지다. 그건 오빠를 교통사고로 떠나 보내고 웃음을 잃어버린 윤아도 마찬가지다. 윤아에게 필요할 거라고 생각해서 승환이가 학원에서 훔쳐온 웃음 통조림은 윤아를 웃게 만들긴 하지만 그 웃음은 등을 펴지 못한 꽁치처럼 이상하게 일그러진 웃음이다.

 

삐에로 박사는 아이들의 감정과 기억이 오직 효율성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재편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나쁜 습관은 삭제해야 하지만 성취도를 올리려면 우울을 넣어서라도 안정적인 결과를 만들어내야 한다는 식이어서 일관성이 없다. 이러한 좌충우돌은 어디에서 많이 본 장면이다. 이 시대의 어른들은 아이들을 각종 영양제와 심리 치료와 학습 처방으로 에워싸면서 에너지는 넘쳐야 하지만 공부에 방해가 되지 않을 정도까지만 발휘해야 한다는 말을 반복한다.

 

크기변환_통조림학원_본문7.jpg

 

 

마음 속 이야기는 가둔다고 가두어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모두 입체적인 몸을 갖고 있다. 이 몸에는 자연스럽게 상처가 생기고 피가 흐르고 그 피는 상처를 낫게 해주기도 한다. 그러나 어른이든 아이든 우수한 순위의 납작한 결과물로 출력되어야 한다는, 이른바 ‘아웃풋’의 압력에 시달리고 있다. 작가는 아이들이 저마다 어떤 고치지 못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는 건 그가 살아있는 사람이고 심장 안에 숨겨진 상처가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작가는 그 기억과 상처를 묵음의 통조림 안에 꽁꽁 가두지 말고 꺼내서 이야기하라고 말한다. 힘들더라도 공기 중에서 썩을 수 있게, 발효되어 땅으로 바람 속으로 날아갈 수 있도록 개봉하라고 권한다. 마음 속 이야기는 가둔다고 가두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작가의 이러한 권유는 어린 시절 남과 다른 외모로 놀림 받은 상처 때문에 기억 조작 연구에 몰두하게 된 삐에로 박사에게도 유효하다.

 

아이들이 달려들어 다함께 통조림을 개봉하는 장면은 통쾌해 보이지만 아슬아슬한 경계를 걷는 느낌이다. 강제 밀봉이 풀리고 흩어져 널브러진 통조림 속의 음식들, 아이들의 기억은 이제 어떤 길을 달려가게 될지 두렵다. 박사의 설계 속에서 완벽했던 공장은 엉망이 되었고 아이들은 탈출에 겨우 성공하지만 작가는 그 뒤의 경로를 섣불리 제안하지 않는다. 이것은 어찌 보면 결말을 작품 밖으로 던지는 방식처럼 여겨지는데 서사를 따라오던 독자로서는 이제 어쩌란 말인가 작가에게 되묻게 되는 것도 당연하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 송미경의 전작을 읽는 일은 중요하다. 작가의 최근 작업에서는 어떤 구성요소와 인물들의 끊임없는 순회공연이 펼쳐지고 있다. 단편 「돌 씹어 먹는 아이」에서 채석장을 찾아가 맛 좋은 돌을 마음껏 씹어 먹었던 연수는 우표 수집상 할아버지가 가진 추억의 돌에 집착하는 승환이와 닮았다. “무엇을 먹으면 어때. 무럭무럭 자라서 신나게 뛰어다니렴.”이라고 격려하는 채석장의 할아버지와 “너는 돌 구슬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갖고 싶어 하는 것”이라고 조언하는 우표 수집상 할아버지는 아이들의 상처를 이해하는 어른이라는 점에서 비슷한 인물이다.

 

크기변환_통조림학원_본문3.jpg

 

 

작가는 거대한 새 서사를 바느질하기 시작했다

 

『바느질 소녀』『통조림 학원』은 같은 상상의 양화와 음화가 아닌가 싶을 만큼 견주어볼 대목이 많다. 두 작품은 선행하거나 후행하면서 상대 작품을 설명하기도 한다. 모두 초능력이 등장하는데 『바느질 소녀』의 거지소녀는 마치 초월적 신을 대행하듯이 초능력을 공동체적 심판의 행위에 쓴다. 반면 『통조림 학원』의 삐에로 박사는 ‘일곱 개나 되는 박사학위’로 상징되는 특수한 능력을 지녔지만 한없이 나약한 인간을 대행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가 사용하는 능력은 대단해 보였지만 ‘개인의 아픔’이라는 좁고 깊은 영역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었음이 밝혀진다.

 

이 두 작품에서는 모두 ‘바느질’이라는 행위가 중요한 요소로 등장한다. 거지 소녀는 아픈 강아지의 다리를 깁고, 다친 아이의 눈자위를 깁고, 굽어버린 할머니의 등을 펴서 다시 꿰매준다. 승환이는 가면 뒤에 너덜너덜한 아픔을 숨기고 있던 삐에로 박사의 낡은 돼지 인형 슬리퍼를 꿰매면서 그의 고백을 들어준다. ‘어릴 때 부모가 떨어진 단추를 한 번도 다시 달아준 적이 없다’는 삐에로 박사의 말은 아픔을 충분히 위로 받지 못한 채 성장한 어린이의 미래를 보여준다. 또한 바늘과 실을 들고 타인의 상처를 돌보는 거지 소녀와 승환이를 보면 『광인수술보고서』에서 초록색 손뜨개 스웨터를 풀어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던 주인공 이연희의 모습이 겹쳐서 떠오른다.

 

송미경 작가에게 바느질이란 『광인수술 보고서』에서 더플코트를 해체하는 것이나 『통조림 학원』에서 캔 뚜껑을 따버리는 사건들 이후의 방향을 암시하는, 회복과 복원의 과정이다. 걸핏하면 식당에서 난동을 피워 엄마를 괴롭히는 『바느질 소녀』의 재호는 작품 속에서 파란 실타래를 마구 풀면서 자신의 상처를 드러내는데 그를 보면 『통조림학원』에서 학원의 모범생으로 가장 먼저 길들여졌던 재호의 숨겨진 얼굴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한편 『바느질 소녀』의 수목이와 『통조림 학원』의 승환이는 모두 떡집 아이다. 남편의 주취 폭력에 시달리는 수목이 엄마와 딸을 사고로 잃은 승환이 엄마에게 있어서 새벽부터 묵묵히 떡을 찐다는 행위가 공통적으로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그밖에도 송미경 작가는 작품 여러 곳에 독특한 기호를 감추어두고 있다.

 

그동안 여러 단편동화에서 송미경 작가가 보여준 이야기의 매력은 대단한 것이었다. 독자는 그 조준의 방향을 따라가는 것이 벅찰 정도로 새로운 서사를 경험했다. 간명하고 유보적인 결말이 이야기의 스타일이 되기도 하는 단편에 비해 장편동화는 훨씬 폭이 넓고 장구한 옷감을 바느질하는 일이다. 작가는 『통조림 학원』을 통해서 이야기의 해제경보를 발령하고 그간 발표한 다른 작품과도 엮이는 거대한 새 서사를 바느질하기 시작했다. 이 용감한 작가는 독자를 향해 당신도 조각난 채 방치해둔 이야기가 있다면 어서 반짇고리를 꺼내라고 말한다. 그가 앞으로 어떤 작업을 계속 하고 어디까지 가게 될 지는 아직 짐작하기 어렵다. 다만 어린이들의 미처 말하지 못한 마음을 잇는 마법의 바느질이 시작되고 있다는 것밖에는.


 

 

img_book_bot.jpg

통조림 학원 송미경 글/유준재 그림 | 스콜라
아이들이 현실에서 잃어버린 것은 무엇이고, 작가가 현실과 다른 판타지 속에서 아이들에게 되찾게 해 주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요? 환상을 통해 진짜 현실을 돌아보게 만드는 송미경 작가의 판타지 세상을 만나 봅니다.



[추천 기사]

 

- [특별 기고] 시리 허스트베트, 틈새의 존재, 틈새의 욕망
- [팔리는 책] 초판본 열풍의 주인공은 윤동주가 아니다
- [같은 책 다른 표지] 이기적 유전자
- [출판사 탐방] 애니북스, “경계를 짓지 않는다”

- 필리버스터, 인문학 잔치가 되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김지은 #통조림 학원 #송미경 #장편동화
0의 댓글
Writer Avatar

김지은(아동문학평론가)

1972년 서울에서 태어나 이화여자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심리철학과 철학교육을 공부했다. 1997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동화 「바람 속 바람」이 당선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 서울예술대학교, 숙명여자대학교, 한신대학교 등에서 아동문학을 강의하고, 창비 팟캐스트 ‘서천석의 아이와 나’에서 어린이책 코너를 진행하고 있다. 함께 쓴 책으로 『달려라, 그림책버스』 『그림책, 한국의 작가들』 등이 있고, 엮은 책으로는 『마해송 전집』, 옮긴 책으로는 그림책 『우리들의 비밀 놀이터』 『안녕, 낙하산!』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