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와 포이동
다른 사람들이 보는 색이 어떠한지 모르듯이, 내가 보는 색은 그 누구에게도 설명할 수 없다. 분명 누군가는 훨씬 더 많은 장면을 보고 있을 것이고, 누군가는 내가 보는 것과는 정반대의 색감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글ㆍ사진 정의정
2016.0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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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크로마젠 안경은 색약과 색맹을 위한 특수 안경이다. 빛의 파장을 조절하는 필터를 사용해 안경을 끼면 색맹이라도 어느 정도 색을 구별할 수 있다. 

 


이 안경을 쓰고 처음으로 자신이 못 보던 색을 본 사람들은 보자마자 울고 싶은 기분이 들거나, 탄성을 지른다.

 

“다른 사람들처럼 못 본다는 게 이렇게 큰 차이가 있는지 몰랐어요”

 

“이렇게 많은 의미들을 놓치고 살았네요”

 

“여러분은 이걸 매일 보고 살았다는 거죠?”

 

 

2.

 

대학교에 들어가 좋은/옳은 일을 하고 싶다는 마음에 공부방 활동에 자원했다. 지금은 개포4동 1266번지로, 포이동 266번지로 불린 재건마을 공부방이었다. 1982년 전두환 정부가 넝마주이 등을 집단 수용하고 강제 이주하는 과정에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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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이동 전경. ⓒ박김형준

 

오랫동안 정규교육과 사교육을 충실히 밟아 온 사람으로 내가 줄 수 있는 자원은 공부밖에 없었다. 그나마도 아이들은 10분을 못 버티기 일쑤였고, 어디론가 사라지거나 동네 슈퍼로 손을 끌고 가서 아이스크림을 사 달라고 요구했다. 일주일에 한 번 쭈쭈바를 물려주거나 교과과정과는 별로 상관없는 게임 같은 걸 하고 밥을 나눠 먹고는 했다. 금방 바뀌는 선생님보다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오래 있는 선생님이 낫다는 얼토당토않은 믿음으로 수업은 뒷전인 채 주로 공부방 선생님들과 노닥거렸다.

 

강남구청과 서울시 모두 주민들이 강제 이주 후 주민등록이 말소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고, 토지를 무단 점거했다는 이유로 부과된 토지변상금 체납을 해결해야 그다음으로 거취를 해결할 수 있다고 했다. 아이들은 나보다 빨리 크고 공부는 더욱 심드렁해졌다. 열심히 하면 장밋빛 인생이 될 거라고 누구도 말해주지 못했다.

 

2011년 마을에 불이 났다. 다닥다닥 붙어 있는 판잣집은 조그만 불씨에도 크게 불이 옮겨붙었다. 소방차가 왔지만 96가구 중 75가구가 전소했다. 소식을 들었을 때는 여전히 집에서 밥을 먹고 있었다. 강을 건너기도 전 탄내가 나고 뱃속에 연기가 들어찼다. 강남구청은 주거용 건물을 다시 지을 경우 철거하겠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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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탄 잔재를 치우기 전 모습. ⓒ박김형준

 

당장 아이들 잘 곳이 없었다. 마을 회관 맨 위층에 이불을 가져다 놓고 10여 명이 같이 잤다. 공부방 선생님들이 돌아가며 관리를 맡았다. 선생님이라고 해 봤자 거의 대학생들이었다. 어머니는 위험한 곳에 가지 말라며 나를 걱정했다. 잠은 집으로 와 자고는 했다.

 

어느 날 새벽, 용역이 왔다. 화재 잔해를 치우고 세웠던 가건물을 오함마로 부쉈다. 그 날 당번인 선생님은 망치 소리가 가슴으로 날아와 숨이 턱턱 막혔다고 했다. 철판은 종이처럼 구겨져 있고 부서진 단열재 속 스티로폼이 새하얬다. 그 뒤로 가끔 환청처럼 망치질 소리가 들렸다. 어딘가 고장 나고 구겨진 기분이었다. 눈물은 나지 않았다. ‘울기엔 좀 애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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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김형준

 

3.

 

같이 공부방을 했던 친구는 군대에 갔다 왔다. 다시 사회로 나오자 길거리를 지나다니는 사람들과 이제까지 알고 지냈던 형들이 다 놀라웠다고 한다. 다들 군대에 다녀왔던 사람들인데 어떻게 이렇게 그런 적이 없었던 척, 총을 쏴서 사람을 죽이는 방법과 명령에 복종하는 방법을 배운 적이, 상처받은 적이 없었던 척하면서 살아갈 수 있냐고.

 

4.

 

이후로도 강정과 밀양 같은 이름들이 가지는 색이 늘어났다. 졸업하기 전 취직이 되었고 포이동에 일 년에 한두 번 가던 횟수는 일 년 반, 이 년으로 점점 뜸해졌다. 나는 아주 가끔 안경을 끼고 간신히 이런 색이 있었지, 하는 마음으로 뉴스를 흘려보냈다.

 

5.

 

그 날도 밥을 먹고 있었다. 아마 김치볶음밥이나 제육 덮밥 같은 걸 먹지 않았을까 한다. 식당에 크게 틀어놓은 티브이에서는 수학여행 가는 아이들을 태운 배가 진도에서 좌초했지만, 전원 구조되었다는 뉴스가 나왔다. 다들 그래도 그나마 다행이라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6.

 

2년이 지났다. 가끔 “어떻게 이렇게 많은 걸 보면서 아무렇지 않을 수 있죠?” 라고 누구한테라도 물어보고 싶어진다. 사실 나도 364일 정도는 아무렇지 않다. 그저 처음 본 색의 강렬함이 무감해질 뿐이다.

 

4월 16일 만큼 노란색을 느끼는 날이 있을까. 다른 사람들이 보는 색이 어떠한지 모르듯이, 내가 보는 색은 그 누구에게도 설명할 수 없다. 분명 누군가는 훨씬 더 많은 장면을 보고 있을 것이고, 누군가는 내가 보는 것과는 정반대의 색감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저 저 색이 보이지 않냐고, 더듬거리면서 물어보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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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포이동 #변경 지도 # 그날의 기록 #울기엔 좀 애매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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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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