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가 만든 책은 서점으로 배본되었다가 끝내 독자들의 선택을 받지 못하면 출판사로 되돌아온다. 그 과정에서 때가 타고 먼지가 묻고 찌그러지기도 한다. 출판사가 가려내서 쓸고 닦아 보지만 한계가 있다. 이때 열심히 쓸고 닦았음에도 때가 지워지지 않아서 다시 서점으로 나가지 못하는 책을 재생불능반품이라 한다. 이 책들은 어떻게 되느냐. 쓰레기로 분류된다. 엉뚱한 경로로 반품되어 돌아올까 싶어 표지와 본문을 분리하고 조각내서 버린다.
읽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는 책이 버려지는 걸 가만히 바라보고 있노라면 아무래도 마음이 편치 않다. 그래서 어떻게 살려볼 수 없을까 고심하다가 미야베 미유키의 장편소설을 구입한 독자들에게 재생불능반품에서 조각조각 잘라낸 미야베 미유키의 단편을 증정했다. 어디까지나 심심풀이땅콩 삼아 읽어주십사 하는 바람을 담아서. 한데 이걸 받은 독자들이 취지를 이해해 주고 꽤 화제가 되는 바람에 출판 담당자 몇 사람에게 이런 얘기를 들었다.
출처_스포츠조선
“센스 있네. 그런 아이디어는 어떻게 생각해 낸 겁니까.” 실은 『중쇄를 찍자』라는 만화를 보다가 만화 속 출판사의 신입 마케팅 담당자인 ‘쿠로사와’의 대사에서 힌트를 얻었다고 대답하며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대관절 센스란 무엇일까. 센스 있는 인간이란 어떤 인간일까. 센스는 후천적 학습이나 교육에 의해서 길러지는 것인가, 아니면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것인가. 만약 전자라면 어떻게 해야 그런 걸 가질 수 있나.
나는 전에도 몇 번인가 “센스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맛있는 책 공연’을 무대에 올리거나 ‘원기옥 이벤트’ 따위를 했을 때 그랬다. 종종 강연에도 불려가곤 했는데 늘 나오는 질문 가운데 하나는 “어떻게 그런 아이디어를 떠올렸느냐”는 것이었다. 어떻게 떠올렸느냐. 나도 모른다. 하지만 “어쩌다 보니”라며 매번 머리를 긁적이는 것도 마땅치 않아서 한번쯤 알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도 내가 어떻게 그런 아이디어를 떠올렸는지 궁금했으니까.
도서관과 서점을 오가며 몇 권의 책을 주야장천 읽다보니 ‘쿠마몬’을 만들어 유명해진 마나부의 일화가 눈길을 끌었다. 그래픽 디자인으로 일가를 이룬 그가 인테리어 디자인을 시작해야겠다고 마음먹었을 무렵의 일이다. 관련 지식이 전무했던 그는 우선 인테리어 서적과 잡지를 200권쯤 읽고 어떤 가게에 손님이 모이는지 알아보기 위해 힘이 닿는 데까지 발품을 팔았다고 한다. 그 과정에서 이른바 ‘잘 되는 가게’의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바닥이 어둡고 입구가 높지 않으며 어수선한 느낌을 주는 잡화점에 사람들이 몰렸다. 일본에는 신발을 벗는 문화가 있어서 얼룩 하나 없는 깨끗한 바닥보다는 지저분한 신발을 신고도 편하게 들어갈 수 있는 바닥을 선호했기 때문이다. 잡화점의 경우 ‘예쁜 가게니까 구경이나 하자’거나 ‘선물로 뭘 살까’ 등의 막연한 동기로 들어오는데 너무 질서정연해 보이면 내가 뭘 보는지 다른 사람이 쳐다볼 것 같아 들어가기를 꺼리고 어수선해야 물건을 ‘발견하는’ 재미를 만끽하더라는 것이 그의 관찰 결과였다.
작년에 한국에도 번역된 『센스의 재발견』에 그는 이렇게 적었다. “나는 공간의 바닥 색이나 상품 선반의 배치를 하늘에서 주어진 번뜩임을 통해 결정한 것이 아니라 지식을 토대로 결정했다. 이러한 지식과 규칙은 어디까지나 내 나름대로 발견한 공통점으로 인테리어 전문가는 뭐라고 할 수도 있다. 다만 적어도 나는 이 규칙을 토대로 여러 가게와 사무실을 디자인했고 지금도 성공적으로 유지하고 있다. 지식의 축적을 통해 만든 가게가 ‘센스 있는 가게’라고 불리게 된 것이다.”
톱 세일즈 매니저인 아키라도 『나라면 그건』에서 비슷한 일화를 소개했다. 자기가 아는 디자이너는 600여 곳의 매장 디자인을 담당하는데 언제나 인테리어에 대한 아이디어가 넘쳐흘러서 감탄하던 와중에 그의 사무실을 들렀다가 전 세계에서 발행된 잡지들로 뒤덮인 서가를 보고 이게 다 뭐냐고 물었더니 17살 때부터 이 잡지들을 싸그리 몽땅 읽어왔다는 대답이 돌아왔다고 한다. 마르지 않는 아이디어의 토대는 잡지를 탐독하며 얻은 막대한 정보들이었던 것이다.
즉, 이들의 공통점을 추출해 볼작시면 다음과 같다. (1) 많이 읽는다. ‘센스 있는 가구를 고르고 싶은데 고를 수가 없다’는 사람이라면 인테리어 잡지를 100권이고 200권이고 읽으면 된다. (2) 많이 본다. “베란다 구석에 처박아둔 채 물도 주지 않는 화분에서 아름다운 꽃이 피어나기를 바랄 수는 없다.”(멋진 비유) 보고 들은 것이 쌓여야 센스도 생기는 법이다. (3) 지금까지 한 적이 없는 일을 사소하게나마 시도한다. 남성이 여성지를 사본다든가 출근길 코스를 매일 바꿔보는 식으로.
이상의 사례들에서 살펴본 것처럼 센스 있는 인간들의 일화에서 무릎을 칠 정도로 대단하다고 할 만한 건 찾기 어려웠다. 베팅 센스를 기르려면 날아오는 공을 힘껏 치는 연습을 많이 해야 하고, 센스 있는 글을 쓰고 싶으면 ‘다독다작다상량’이 필요하다는 얘기를 해주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하긴 고작해야 서너 권의 책을 읽고 “만능의 진리를 살 수 있다”고 예상한 내가 어리석었던 걸까.
그렇더라도 소득이 아주 없었던 건 아니다. 이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입을 모아 누누이 했던 당부는, 센스란 타고나는 것이 아니며 지식의 축적을 통해 얼마든지 가질 수 있다는 것이었다. 태어나서 지금껏 센스와는 도통 거리가 멀다고 생각했던 내가, 툭하면 왜 옷차림이 그 모양이냐는 지적을 받던 내가 “센스 있네, 그런 아이디어는 대체 어디서 얻는 겁니까”라는 얘기를 꽤 자주 듣고 있다는 것이 그 증거라 하겠다.
그런 의미에서 소개해 드리고 싶은 읽을거리가 하나 있으니 ‘야매 장르문학 소식지인
출처_북스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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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민(북스피어 대표)
미남이고 북스피어 출판사에서 책을 만든다. 가끔 이런저런 매체에 잡문을 기고하거나 라디오에서 책을 소개하거나 출판 강의를 해서 번 돈으로 겨우 먹고산다.
akagingy
2016.05.04
제목에 오타가 있는건 아닌지요..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