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문제에서 여러분에게 하고 싶은 중요한 말 가운데 하나는 바로 스스로 주인이 되어 묻고 따져 보라는 겁니다.
연재를 시작할 때 동요 <옹달샘>을 입체적으로 설명하였던 것을 기억하나요? 그저 하나의 답만 배우고 익히며 따르는 게 전부라 여겨서는 안 됩니다. 그건 내가 주인이 되어 사는 것도 아니고 제대로 배우는 것도 아닙니다. 답은 정해져 있습니다. 그 답은 내가 만든 게 아니고 이미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답은 하나뿐입니다.
하지만 질문은 내가 합니다. 누가 대신하는 게 아닙니다. 그러므로 질문은 주체적입니다. 그리고 질문은 하나가 아니라 끝이 없습니다. 또한 모든 질문은 반드시 그 답을 갖고 있습니다. 그 과정을 찾아내고 채워 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앞으로 계속해서 끊임없이 묻고 따지고 캐야 하겠습니다. 그것이 정의의 문제에서 잊지 말아야 할 핵심입니다.
그와 관련한 사례를 하나 던지는 것으로 연재를 마무리할까 합니다.
여러분은 교복을 입고 있지요? 마음에 듭니까? 한때 교복이 학교에서 사라졌습니다. 획일적이고 개성을 말살한다는 교복의 부정적 측면 때문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이전의 교복이 일본 제국주의 교육의 잔재라고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물론 제복이 주는 여러 장점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사회가 민주화되면서 자유로운 개인을 억압하는 불필요한 요인들은 제거해야 한다는 시민적 합의가 결국 교복을 추방하게 했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서 여러분은 교복을 입게 되었을까요? 그리고 누가 그렇게 하기로 결정했나요? 교복을 입게 될 청소년 학생들이 결정했나요? 아닙니다. 어른들이 결정했습니다. 물론 나름대로 이유와 근거가 있겠지요, 교복을 입지 않으면 외모에 신경을 쓰게 되고(교복을 입으면 외모에 신경 안 쓰나요?), 비싼 옷으로 자신을 드러내려 하기 때문에 여러 문제가 발생할 뿐 아니라 빈부의 차이가 드러난다는 이유도 댑니다.
하지만 그건 정당한 근거가 되지 못합니다. 교육이란 그저 교과서의 지식만 가르치는 게 전부가 아닙니다. 누구나 좋은 옷, 비싼 옷, 심지어 명품으로 두르고 싶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형편과 분수에 맞게 합리적으로 선택해서 입어야 합니다. 그리고 비싸다고 무조건 좋은 것도 아니고요. 더 중요한 것은 옷이 신분이나 부를 과시하는 수단이 아니라 자신의 개성을 표현하는 방식이라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합리적으로 옷을 고르고(이런 게 경제 아닌가요?) 개성과 멋을 표현해 내며(미술 시간에 이런 걸 가르쳐야 하는 거 아니에요?) 사람을 평가하고 판단할 때 그가 입은 옷의 값으로 따지는 건 가장 유치하고 어리석은 일이라는 걸 먼저 가르쳐야(그게 사회 수업이지요) 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거의 실천하지 않으면서 문제가 되는 현상들만 크게 부풀려서 마치 모든 문제가 교복을 입지 않았기 때문인 것처럼 어른들의 편의대로 생각한 결과입니다. 사실 교복이 싼 것도 아니고, 게다가 한창 자랄 시기에 교복 하나로 졸업 때까지 입는 것도 어려워요. 그래서 입학 때는 자루처럼 펑퍼짐하게 입다가 졸업 때는 거의 쫄쫄이가 되는 게 교복이지 않나요? 개성은 둘째 치고 사람을 옷에 억지로 끼워 맞추게 됩니다. 이건 일종의 폭력이고 불필요한 길들이기의 과정입니다.
상당수의 어른들과 선생님들은 교복을 입어야 학생답다고 말합니다. 그건 자신들이 그렇게 자랐기 때문에 그걸 기준으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리고 도대체 학생답다는 건 뭐죠? 똑같은 제복을 입어야 학생다운 걸까요? 어떤 선생님들은 교복을 입지 않으니 산만해지고 규율도 잘 지키지 않는다고 불평했습니다. 그럴까요? 설령 그런 점이 조금은 있다 해도 그게 교복을 다시 입어야 할 근본적인 이유는 되지 못합니다.
학생이라면 강제로 교복을 입어야 하는 게 정의로운 일일까요? 정의가 너무 값싼(?) 상황에서 제기된다고 느끼나요? 아닙니다. 정의는 모든 문제에서 고려될 사항입니다. 만약 교복을 입는 게 좋다 해도, 그리고 많은 선생님과 학부모가 동의한다 해도 강제될 필연성은 없는 일입니다. 교복을 입기 원하는 사람은 교복을 입고 사복을 입고 싶어 하면 사복을 입게 하면 됩니다. 반드시 똑같은 옷을 입어야 하는 의무가 있는 걸까요?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생각했던 것들도 이렇게 따지고 파고들면 많은 것을 발견하게 되고 문제의 핵심에 접근하게 됩니다. 이게 질문의 힘입니다.
그런 문제 하나만 더 다루고 끝내겠습니다. 학생들은 교복을 입고 명찰을 답니다. 명찰에 새겨진 건 자신의 이름입니다. 이름은 나를 나타내는, 즉 내 정체성을 대표하고 대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는 이름을 옷에 달고 다닙니다. 제복에는 반드시 이름표가 붙어야 하는 걸까요? 교복은 입어도 명찰은 달지 않는 학교도 있지만 그건 탈부착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아예 명찰이 없는 경우는 소수에 불과합니다. 사람들은 내 이름을 압니다. 명찰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는 상대의 이름을 모릅니다. 그는 명찰을 달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름이 노출되는 건 나의 ID가 노출된 것과 같습니다.
명찰을 단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관계는 이렇게 불공정합니다. 그게 정의일까요? 내가 명찰을 다는 건 단지 어린 학생이기 때문에, 교복을 입는 청소년이기 때문에 따라야 하는 법칙인가요? 그리고 그것이 정의에 합치하는 일인가요?
요즘은 선생님들도 명찰을 다는 경우가 많아졌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은 여전히 명찰을 달지 않습니다. 어른들이 명찰 다는 게 부끄러워서일까요? 아니면 명찰 단 사람과 달지 않은 사람을 구별하여 관계를 명확히 하기 위해서일까요? 나는 학생들이 명찰을 달아야 한다면 선생님도 명찰을 다는 것이 옳다고 봅니다. 모든 사람은 평등합니다. 교사도 학생도 같이 명찰을 다는 것은 그런 평등의 상징이며 그 자체가 교육입니다.
명찰을 달지 않아 이름을 몰라서 불편하다면 학기 초에 열심히 학생들의 얼굴과 이름을 대조하며 외우면 됩니다. 예를 들어 교장선생님이 학생들의 이름을 다 익혀서 복도에서 만났을 때 이름을 불러 준다면 어떤 느낌이 들까요? 나의 존재감, 자존감이 절로 생길 겁니다. 교장선생님께서 명찰이 없는데 내 이름을 불러 주신 건 그만큼 나의 존재에 대해 그분께서 생각하고 노력하셨다는 증거니까요. 그런 학교에서의 생활은 조금이라도 더 행복하겠지요?
이러한 문제 제기는 단순한 시비 걸기가 아닙니다. 여러분이 끊임없이 묻고 캐고 따지면 지금까지 보이지 않던 게 보입니다. 그리고 새롭게 보게 된 것에 대해 함께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고 논의하면 보다 나은 방법이 찾아집니다.
정의는 누가 시혜처럼 베푸는 게 아닙니다. 그렇다고 예전처럼 피 흘리며 싸워 쟁취하는 것도 아닙니다.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고, 그런 정의를 위해 내가 노력하면서 내 삶이 정의의 수호를 받아야 보다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그게 우리가 반드시 정의를 지켜 내야 하는 이유입니다. 여러분이 정의를 지키고 정의가 여러분을 지켜 줄 것을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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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나만 지키면 손해 아닌가요?김경집 저 | 샘터
우리가 일상에서 접할 수 있는 정의의 문제부터 함께 짚어보고, 동서양의 시대별, 인물별 정의에 관한 생각과 이론을 살펴본 뒤, 정의를 실천하기 위한 연대의 마음가짐과 실행 방법 등을 고민해본다.
김경집(인문학자)
가톨릭대 인간학교육원에서 인간학과 영성 과정을 가르쳤다. 인문학을 대중과 나누는 일과 문화운동에 뜻을 두고 있으며, 거대담론보다는 소소하고 따뜻한 이야기를 좋아하고, 또한 그러한 삶을 소중하게 여긴다. 저서로 《책탐》《생각의 인프라에 투자하라》《고장난 저울》《완보완심》《인문학은 밥이다》《생각의 융합》《엄마 인문학》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