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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하고 아름다운 책] 우정 읽기
이상하고 아름다운 책 ⑧ - <은중과 상연>을 보며 전경린을 떠올리다.
글: 구구 (노혜지)
2025.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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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럿이 함께 책임을 진다는 의미로 흔히 연대라는 말을 쓴다. 그러나 이 단어에는 어쩐지 탐탁지 않은 구석이 있다. 현실을 초월해야만 가능한 강한 의지가 깃든 말이라서일까, 아니면 복음에서 읊는 구원처럼 멀게 느껴져서일까 입에 잘 붙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연대 위에 줄을 긋고 그 옆에 우정이라는 단어를 조그맣게 새겨 넣는다. 너무 무섭고 어렵고 때로는 끔찍하지만 언제나 내 삶과 존재의 일부를 책임져온 아름다운 그 단어를. 

 

우정에도 정답이 있다면 나는 오래전부터 줄곧 오답만 써온 열등생이다. 친구를 혼자 남겨두거나 버려져 홀로 남겨진 경험이 태반이었으니, 나는 우정 앞에 기어이 ‘실패했다’는 형용사를 붙이고야 마는 무책임한 인생을 살아온 셈이다. 그래서일까. 못된 마음이지만 나 말고도 실패한 우정을 해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볼 때 묘한 쾌감과 안도감을 느낀다. 너도? 야나두... 

 

최근에는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은중과 상연>을 보며 그런 감정을 느꼈다. “너는 참 좋겠다”라고 적힌 메모가 오프닝 시퀀스에 등장했을 때, 나는 이 드라마가 여자들의 관계를 ‘질투’라는 속성만으로 눌러버리는 납작한 서사일 거라 속단했다. 그러나 그것은 완벽한 오판이었다. <은중과 상연>은 우정과 상실, 그리고 실패와 책임에 관한 이야기였다. 드라마를 보는 내내 상연이 언제 비로소 자기 자신이 될까, 언제 사랑하는 친구를, 친구라는 잔인하면서도 그리운 관계를, 그리고 세상을 제대로 보게 될까 궁금했다. 


<은중과 상연> ⓒ넷플릭스

 

서로에게 각기 다른 방식으로 무책임했던 두 사람은, 얄궂게도 우정이 그저 즐겁거나 슬프기만 할 수 없는 관계라는 사실을 깨달았을까. 많은 걸 감내하며 끌고 가야 하는 우정, 그 두 음절 사이에 외로움과 공허가 스며들 수밖에 없다는 걸 알았을까. 그러나 상연은 세상을 떠났고, 은중과 나는 쓸쓸하게 남겨졌다. 우리에게는 수수께끼 같은 장면들만 남았고, 답을 적는 건 우리의 몫이 되었다. 그렇기에 어쩌면 이 드라마는 미완이라고 해야할 지도 모르겠다. 

 

<은중과 상연>을 보면서, 전경린을 떠올렸다. 연애 소설을 잘 쓰는 작가로 소환되는 그의 작품들은 뻔하고 지리멸렬한 사랑의 단면을 보여주다가도 불시에 삶의 핵을 건드리며 관계의 징그러운 속성을 드러낸다. 

 

그의 소설을 읽을 때마다 큰 수치심을 느꼈다. 그가 그리는 인물들이 뒤틀려 있고, 과장된 구석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수치심은 "보여지고, 관찰되고, 간파당하고, 얼어붙고, 대상화되는 감정과"1함께 시작된다. 나는 작품 속 화자가 사랑하는 대상을, 역으로 상대가 화자를 꿰뚫는 방식을 읽으며 나와 친구를 발견했다. 타인은 원죄라는, 우정이라는 심연을 들여다볼 때마다 죽고 싶을 정도로 강렬한 수치심에 휩싸였다. 왜 나는 그가 그린 남녀관계에 언제나 우정을 대입했던 걸까. 어쩌면 사춘기 여자애에게 전경린은 지나치게 가혹한 시련이었는지도 모른다. 

 

 

생각해 보면 사랑과 우정의 속성은 그리 다르지 않다. 최근 복간된 『얼룩진 여름』2을 떠올려봐도 그렇다. 우연한 기회로 지방방송국에서 일하게 된 은령은 결혼까지 결심했던 연인과의 관계를 뒤로 하고 낯선 지역으로 떠나게 된다. 어느 날, 지역에서 활동하는 시인을 섭외해야한다는 방송국의 압력에 은령은 유경을 만나게 된다. 그가 쓰는 성애적이고 퇴폐적인 시구 때문에 그를 섭외하는 데는 실패하지만 둘은 모종의 관계를 맺게 된다. 사랑인지 아닌지 모를, 그러나 생이 중요한 한 지점을 발견하게 만든 소중한 관계를. 은령은 유경을 알고 싶어한다. 그러나 유경은 자꾸만 삶의 허무 속으로 달아난다. 그 사이에 은령은 유경의 오랜 친구인 이진과 야릇하고, 그래서 환멸로 가득 찬 관계를 가진다. 은령은 이진과의 관계에서 모든 걸 잃고 자신을 알게 된다. 그러나 유경과의 관계에서는 은령은 늘 자기 자신인 채다. 상대를 비참하게 만들 정도로. 유경과 은령의 관계는 무엇이었을까? 은령의 말처럼 그것은 규정하기 어려운, 단지 느끼기만 해야 하는 무엇이었다. 

 

나에게는 우정이 그랬다. 구차하게 좇다가도 견딜 수 없이 멀어지고 싶은 마음, 규정하기 곤란하지만 한 번 규정되고 난 다음에는 돌이킬 수 없이 영영 실패로 남게 되는 관계. <은중과 상연>을 보며 나는 대체 내가 우정에 대해 무엇을 하고 싶은 걸까 생각했다. 아마도 나는 책임을 지고 싶은 것 같다. 꾹꾹 눌러쓴 글씨처럼 내 생의 뒷면에까지 배겨버린 우정이라는 흉터를 어루만지고 싶다. 새살을 돋우는 치료보다는 흉터를 인정하는 회복을 경험하고 싶다. 결국 우정이란 실패와 책임을 끌어안은 채 계속 이어가려는 마음일 것이다. <은중과 상연>처럼, 미완으로 남은 관계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단 하나, 정직하게 내 몫의 책임을 찾는 것이다. 

 

“어쨌든 저마다 스스로 책임져야 할 부분이 있는 것 아닐까요? 그것을 정직하게 찾지 않으면 스스로 회복할 수 없어요. 그것이 시작이죠.”3




1 프레데리크 그로, 『수치심은 혁명적 감정이다』

2 나는 이 책의 제목이 『유리로 만든 배』일 때 전경린을 알게 됐다.

3 전경린, 『얼룩진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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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룩진 여름

<전경린>

출판사 | 다산책방

수치심은 혁명적 감정이다

<프레데리크 그로> 저/<백선희> 역

출판사 | 책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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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구 (노혜지)

2017년부터 독서모임 공동체 ‘들불’을 운영해온 모임장. 들불이라는 이름은 2019년 모임 구성원들과 ‘함께’ 만들었다. 2020년부터 도서 큐레이션 레터 ‘들불레터’를 발행 중이며 동료와 함께 『작업자의 사전』(2024, 유유히)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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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린

흔히 '귀기의 작가' '정념의 작가' '대한민국에서 연애소설을 가장 잘 쓰는 작가'로 불리는 소설가 전경린은 이미지의 강렬함과 화려한 문장으로 기억된다. 서른 세 살. 아이와 피와 심지어 죽음조차 삶이 모두 허구라는 것을 느낀 작가는 허구가 아닌 삶의 실체를 갖고자 소설을 쓰기로 시작했다. 1993년 작가의 가족은 마산 옆 진양의 외딴 시골로 이사를 갔다. 꽤나 적적한 곳이었지만 여기서 전경린은 `뭔가가 밖으로 표출되는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었고, 3년 가까이 사람들과 인연을 끊다시피 하고 들어앉아 많은 글을 써냈다. 자기 욕망에 충실한 내면적 세계와 질서화 되고 체제화 된 바깥 세계 사이의 작용과 긴장과 요구 속에서 갈등하는 여성과 여성적인 삶이 문학적 관심사다. 작가의 본명은 안애금. 전혜린을 연상시키는 전경린이라는 이름은 옛날 신춘문예에 응모할 때 임시로 지었다. 당시 누가 `린'이라는 화두를 주었고, 차례대로 `경'과 `전'을 추가해서 `전경린'이라는 이름을 완성시켰다. 작가도 물론 `전혜린'을 떠올렸다. 작가는 전혜린을 좋아한다. 그리고 전혜린뿐 아니라 나혜석, 윤심덕 더 올라가서 황진이까지 소위 강한 자의식 때문에 고통 받고 분열될 수밖에 없었던 선각자적 여성을 좋아하고 흠모한다. 1963년 경남 함안에서 태어났으며 경남대학교를 졸업하고, 마산 KBS에서 음악담당 객원 PD와 방송 구성작가로 근무했다. 그 후 운동권이었던 남자와 결혼하여 딸과 아들을 낳고 평범한 주부로 살다 둘째를 낳은 후인 1993년부터 본격적인 습작에 들어갔다. 199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중편소설 부문에 「사막의 달」이 당선되어 작품활동을 시작하하였으며 1997년 「염소를 모는 여자」로 제29회 한국일보 문학상, 1997년 장편소설 『아무 곳에도 없는 남자』로 제2회 문학동네 소설상, 1998년 단편소설 「메리고라운드 서커스 여인」으로 21세기 문학상, 2004년 단편소설 「여름휴가」로 대한민국소설문학상 대상, 2007년 단편소설「천사는 여기 머문다」로 제31회 이상문학상 대상을 수상했다. 소설집 『염소를 모는 여자』, 『바닷가 마지막 집』, 『물의 정거장』, 장편소설 『아무 곳에도 없는 남자』, 『내 생에 꼭 하루뿐일 특별한 날』, 『난 유리로 만든 배를 타고 낯선 바다를 떠도네』, 『열정의 습관』, 『검은 설탕이 녹는 동안』, 『황진이』, 『엄마의 집』과 어른을 위한 동화 『여자는 어디에서 오는가』, 산문집 『붉은 리본』, 『나비』 등이 있다. 전경린의 베스트셀러인 『내 생에 꼭 하루뿐인 특별한 날』은 2002년 변영주 감독에 의해 영화화되기도 했다. 가정의 틀안에서 안주하던 한 여성이 내면에 지닌 혼란스런 욕구를 발견하고 자아를 찾아가는 여정에서 나타나는 일탈과 매혹에 대한 이야기이다. 또한 이상문학상 수상작인 「천사는 여기 머문다」는 인간 본성의 양면성을 섬세한 문체와 절제된 기법을 통해 감동적으로 그려낸 작품으로, 삶의 현실에 대한 고뇌와 갈등을 내면화하는 데에 성공하고 있다는 평을 받았다. 대표적인 작품 『엄마의 집』에서는 처녀의식을 가진 엄마들에게 “미스 엔”이라는 이름을 부여하였다. 아버지에게도 남편에게도 자식에게도 종속당하지 않는 미스 엔이 그녀의 소설 속에서 새롭게 탄생한 것이다. 여성들의 욕망에 주목해 온 작가답게, 현실의 엄마가 놓인 지형을 넘어서는 대안적이고 이상적인 집의 전형을 제시하고자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