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럿이 함께 책임을 진다는 의미로 흔히 연대라는 말을 쓴다. 그러나 이 단어에는 어쩐지 탐탁지 않은 구석이 있다. 현실을 초월해야만 가능한 강한 의지가 깃든 말이라서일까, 아니면 복음에서 읊는 구원처럼 멀게 느껴져서일까 입에 잘 붙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연대 위에 줄을 긋고 그 옆에 우정이라는 단어를 조그맣게 새겨 넣는다. 너무 무섭고 어렵고 때로는 끔찍하지만 언제나 내 삶과 존재의 일부를 책임져온 아름다운 그 단어를.
우정에도 정답이 있다면 나는 오래전부터 줄곧 오답만 써온 열등생이다. 친구를 혼자 남겨두거나 버려져 홀로 남겨진 경험이 태반이었으니, 나는 우정 앞에 기어이 ‘실패했다’는 형용사를 붙이고야 마는 무책임한 인생을 살아온 셈이다. 그래서일까. 못된 마음이지만 나 말고도 실패한 우정을 해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볼 때 묘한 쾌감과 안도감을 느낀다. 너도? 야나두...
최근에는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은중과 상연>을 보며 그런 감정을 느꼈다. “너는 참 좋겠다”라고 적힌 메모가 오프닝 시퀀스에 등장했을 때, 나는 이 드라마가 여자들의 관계를 ‘질투’라는 속성만으로 눌러버리는 납작한 서사일 거라 속단했다. 그러나 그것은 완벽한 오판이었다. <은중과 상연>은 우정과 상실, 그리고 실패와 책임에 관한 이야기였다. 드라마를 보는 내내 상연이 언제 비로소 자기 자신이 될까, 언제 사랑하는 친구를, 친구라는 잔인하면서도 그리운 관계를, 그리고 세상을 제대로 보게 될까 궁금했다.
<은중과 상연> ⓒ넷플릭스
서로에게 각기 다른 방식으로 무책임했던 두 사람은, 얄궂게도 우정이 그저 즐겁거나 슬프기만 할 수 없는 관계라는 사실을 깨달았을까. 많은 걸 감내하며 끌고 가야 하는 우정, 그 두 음절 사이에 외로움과 공허가 스며들 수밖에 없다는 걸 알았을까. 그러나 상연은 세상을 떠났고, 은중과 나는 쓸쓸하게 남겨졌다. 우리에게는 수수께끼 같은 장면들만 남았고, 답을 적는 건 우리의 몫이 되었다. 그렇기에 어쩌면 이 드라마는 미완이라고 해야할 지도 모르겠다.
<은중과 상연>을 보면서, 전경린을 떠올렸다. 연애 소설을 잘 쓰는 작가로 소환되는 그의 작품들은 뻔하고 지리멸렬한 사랑의 단면을 보여주다가도 불시에 삶의 핵을 건드리며 관계의 징그러운 속성을 드러낸다.
그의 소설을 읽을 때마다 큰 수치심을 느꼈다. 그가 그리는 인물들이 뒤틀려 있고, 과장된 구석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수치심은 "보여지고, 관찰되고, 간파당하고, 얼어붙고, 대상화되는 감정과"1함께 시작된다. 나는 작품 속 화자가 사랑하는 대상을, 역으로 상대가 화자를 꿰뚫는 방식을 읽으며 나와 친구를 발견했다. 타인은 원죄라는, 우정이라는 심연을 들여다볼 때마다 죽고 싶을 정도로 강렬한 수치심에 휩싸였다. 왜 나는 그가 그린 남녀관계에 언제나 우정을 대입했던 걸까. 어쩌면 사춘기 여자애에게 전경린은 지나치게 가혹한 시련이었는지도 모른다.
생각해 보면 사랑과 우정의 속성은 그리 다르지 않다. 최근 복간된 『얼룩진 여름』2을 떠올려봐도 그렇다. 우연한 기회로 지방방송국에서 일하게 된 은령은 결혼까지 결심했던 연인과의 관계를 뒤로 하고 낯선 지역으로 떠나게 된다. 어느 날, 지역에서 활동하는 시인을 섭외해야한다는 방송국의 압력에 은령은 유경을 만나게 된다. 그가 쓰는 성애적이고 퇴폐적인 시구 때문에 그를 섭외하는 데는 실패하지만 둘은 모종의 관계를 맺게 된다. 사랑인지 아닌지 모를, 그러나 생이 중요한 한 지점을 발견하게 만든 소중한 관계를. 은령은 유경을 알고 싶어한다. 그러나 유경은 자꾸만 삶의 허무 속으로 달아난다. 그 사이에 은령은 유경의 오랜 친구인 이진과 야릇하고, 그래서 환멸로 가득 찬 관계를 가진다. 은령은 이진과의 관계에서 모든 걸 잃고 자신을 알게 된다. 그러나 유경과의 관계에서는 은령은 늘 자기 자신인 채다. 상대를 비참하게 만들 정도로. 유경과 은령의 관계는 무엇이었을까? 은령의 말처럼 그것은 규정하기 어려운, 단지 느끼기만 해야 하는 무엇이었다.
나에게는 우정이 그랬다. 구차하게 좇다가도 견딜 수 없이 멀어지고 싶은 마음, 규정하기 곤란하지만 한 번 규정되고 난 다음에는 돌이킬 수 없이 영영 실패로 남게 되는 관계. <은중과 상연>을 보며 나는 대체 내가 우정에 대해 무엇을 하고 싶은 걸까 생각했다. 아마도 나는 책임을 지고 싶은 것 같다. 꾹꾹 눌러쓴 글씨처럼 내 생의 뒷면에까지 배겨버린 우정이라는 흉터를 어루만지고 싶다. 새살을 돋우는 치료보다는 흉터를 인정하는 회복을 경험하고 싶다. 결국 우정이란 실패와 책임을 끌어안은 채 계속 이어가려는 마음일 것이다. <은중과 상연>처럼, 미완으로 남은 관계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단 하나, 정직하게 내 몫의 책임을 찾는 것이다.
“어쨌든 저마다 스스로 책임져야 할 부분이 있는 것 아닐까요? 그것을 정직하게 찾지 않으면 스스로 회복할 수 없어요. 그것이 시작이죠.”3
1 프레데리크 그로, 『수치심은 혁명적 감정이다』
2 나는 이 책의 제목이 『유리로 만든 배』일 때 전경린을 알게 됐다.
3 전경린, 『얼룩진 여름』
* AI 학습 데이터 활용 금지
얼룩진 여름
출판사 | 다산책방
수치심은 혁명적 감정이다
출판사 | 책세상

구구 (노혜지)
2017년부터 독서모임 공동체 ‘들불’을 운영해온 모임장. 들불이라는 이름은 2019년 모임 구성원들과 ‘함께’ 만들었다. 2020년부터 도서 큐레이션 레터 ‘들불레터’를 발행 중이며 동료와 함께 『작업자의 사전』(2024, 유유히)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