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 처음 하는 고백
내가 읽은 책이라고는 고작 『수학의 정석』과 『성문 종합영어』와 『여인추억』(도색소설) 정도였으니 (그러고 보니, 최초로 완독한 소설이 도색소설이었다!), 작가가 되고 난 후 오히려 ‘준비 안 된 얼치기’라는 콤플렉스에 시달려야 했다.
글ㆍ사진 최민석(소설가)
2016.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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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4.

 

아내가 연재중인 소설에 댓글을 달지 않은지 오래다. 

 

대신, 장모님이 댓글을 달고 있다. 

 

총 26개의 댓글 중, 8개가 장모님의 댓글이다.

거의 1/3에 해당한다. 

 

오늘은 귀가한 후 몹시 진지한 표정으로 “여보, 우리 대화 좀 해”라고 한 뒤 물어보았다. 
(지구상의 모든 부부에게 ‘우리 대화 좀 해’는 부부관계를 외교관계로 변화시키는 오피셜한 권력을 부여한다.) 

 

“왜 댓글을 달지 않는 거야?”

“나는 연재되기 전에 이미 수차례 읽었기 때문에, 지루하단 말이야.”
“그래서?”
“그래서라니. 당연히 연재될 때는 이미 지쳐버려서 보기도 싫단 말이야. 게다가…”
“게다가?”
“다음 회는 아무리 봐도 이상해. 좀 고쳐봐. 주인공의 대사가 감동적이지 않잖아.”

 

하여, 아내의 말대로 연재 마지막 회를 대수정하기로 했다.

출판사 대표에게 전화를 해, 마감도 미뤘다. 

 

 

7.8.


내 소설이 이상한 이유가 무엇일까.
정확히 말하자면, 내 소설의 생명력(이란 게 있다면, 이것)이 사라진 게 언제부터였을까. 

 

며칠째 이 고민을 하고 있다. 

 

그러다 한 장르소설가의 인터뷰를 읽었다.  

 

“글쓰기의 최고 스승은 열정이에요. 저는 잘 쓰고 싶은 열정이 강해요. 글을 쓴지 15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뜨겁고, 아직도 허기집니다. 이 열망이 저를 계속 쓰게 만들고 진보하게 만들어요.”

 

 

내 글의 생명력이 시들해진 것은 글쓰기의 열정이 예전만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때문에 독서를 하고픈 마음도 시들해진 것이다.
이를 극복하고자, 히라노 게이치로의 『책을 읽는 방법』을 들었다. 

 

연재소설에서 아내가 별로라고 한 대목을 닷새째 고치고 있다. 

 

 

7. 14. 

 

히라노 게이치로는 나보다 한 살 많은 일본 작가인데, 데뷔 당시에 서점가를 떠들썩하게 광고했던 게 기억난다. 당시에는 몹시 날카로운 인상으로, 세상을 향해 ‘그래, 어디 덤빌 테면 덤벼봐’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최근 사진을 보니 ‘허허. 밥 한 그릇 더 주세요. 이집 왜 이리 맛있죠?’라는 표정의 후덕한 인상이 되었다(나 역시 마찬가지지만). 

 

그나저나, 『책을 읽는 방법』의 원제는 ‘책을 읽는 방법 - 슬로리딩의 실천’이다.
나는 예전부터 책을 너무나 천천히 읽는 편이었는데, 작가가 되고 난 후에는 이게 스트레스가 될 정도였다. 이는 작가들의 인터뷰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들의 인터뷰에는 다음과 같은 공통점이 있다.

 

1. 어릴 때부터 책 속에 파묻혀 살았다.
2. 어릴 때부터 작가를 꿈꿨다.
3. 고로, 그들이 이름을 대는 작가의 수와 작품의 수는 전화번호부의 인명 수만큼이나 많다. 

 

나는 어릴 때부터 허무주의에 파묻혀 살았고 (인생이 도대체 뭐란 말인가?), 비디오 가게 주인과 영화감독은 꿈꾸었지만, 작가는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기에 (읽기도 힘든 걸 대체 어떻게 쓴단 말인가!), 내가 읽은 책이라고는 고작 『수학의 정석』과 『성문 종합영어』와 『여인추억』(도색소설) 정도였으니 (그러고 보니, 최초로 완독한 소설이 도색소설이었다!), 작가가 되고 난 후 오히려 ‘준비 안 된 얼치기’라는 콤플렉스에 시달려야 했다.

 

따라서 데뷔 후에는 ‘까짓것, 한 번 따라잡아 보자!’라는 심정으로 명작과 베스트셀러를 마구 펼쳤다. 하지만, 문제는 바로 이때 발생했다. 도무지 책을 읽는 속도가 붙지 않았고, 책을 끝까지 읽어낼 수가 없었다. 

 

이건 조금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소설가이지만 아직도 내가 완독한 소설은 30권이 채 되지 않는다(어쩌면 20권이 안 될지도).

이런 고백은 이번에 처음 한다. 나로서도 용기를 낸 고백이다. 

 

하여, ‘도대체 책은 어떻게 읽는 거야?’라는 마음으로 『책을 읽는 방법』을 펼쳐보니 히라노 게이치로가 내게 친구처럼 말을 건넸다. 

 

‘책은 많이 읽을 필요가 없어. 아무리 오랜 시간이 걸리더라도 한 권을 제대로 읽는 게 영혼을 살찌우는 길이야.’ 

 

어쩐지 그의 최근 사진은 영혼에 더 이상 찔 구석이 없는지, 안면까지 잔뜩 찐 분위기다.

나는 영혼은 말랐지만, 안면이 먼저 쪘으니 그래도 하나는 같은 셈이다. 다음엔, 영혼을 찌우면 되지. 영차.

 

친구(어느새, 친구다) 히라노 게이치로는 주장한다.

‘양의 독서가 아니라, 질의 독서를 해야 해.’ 

 

이 친구에 따르면 “칸트나 헤겔이 평생 동안 독파한 책의 권수는 지금의 기준으로 보면 의외로 적다.” 왜냐하면, 과거에는 현대처럼 많은 책이 유통되지 않았고, 당시 사람들은 이를 당연히 받아들여 적은 정보만으로도 깊은 사색을 했기 때문이다. “책뿐 아니라, 음악의 세계 역시 마찬가지”인데, “마일스 데이비스는 어렸을 때 레코드를 세 장 밖에 가지고 있지 않았다.” “예전에는 음악을 라이브 연주 아니면 라디오로 들을 수밖에 없었다. 20세기 이전의 클래식 음악가들이 평생 들을 수 있었던 곡의 수 역시 지극히 한정적이었다. 아마, 지금의 클래식 마니아의 몇십분의 일, 몇백분의 일 정도였을지 모른다(이상 24쪽).”

 

즉, 모두 이러한 환경에서 명작과 명곡을 써낸 것이다. 이런 얘기를 덧붙여 미안하지만, 나 역시 등단작을 쓰기 전까지 평생 읽은 장편소설은 두 권이었다. 

 

이 생각을 하니 냉정하게 나 자신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어릴 때 돈을 모아 산 앨범은 수백 번을 들었기에, 자다가 누군가 ‘이봐. 노래!’ 하며 찔러대면 유재하 노래를 곧장 부를 수 있었다. 가사가 틀리지 않음은 물론, 테이프처럼 꺾는 부분도 정확히 흉내 낼 수 있다. 하지만, 요즘은 음원 사이트에서 손쉽게 들은 곡은 가사는커녕, 곡명조차 가물가물하다. (이런 말은 또 뭣하지만), 표지가 닳을 때까지 읽은 (도색소설) 『여인추억』은 주인공 이름(마사오)부터, 그가 만난 여인들(친구, 간호사, 옆자리 승객)과, 그 여인들과 사랑을 나눈 장소(여관, 기차, 아니… 그의 발길이 닿는 지구상의 모든 장소)와 그때의 분위기까지 또렷이 기억해낼 수 있다. 예로 든 근거가 다소 격이 떨어지지만, 인생을 오랫동안 함께 여행할 동반자는 ‘천천히, 오랫동안, 음미하듯 즐긴 책(과 음반)이며, 이를 위해서는 느릿느릿 읽고, 여러 번 반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책을 읽는 방법』의 골자가 바로 이것이다.
하여, 나는 이번엔 창작의 기법이 아닌, 독서의 기법을 훔치기로 했다.
앞으로 나는 ‘슬로 리딩’을 하고, ‘리 리딩(Re-reading)’을 할 것이다. 

 

아내가 말한 소설의 어색한 부분을 드디어 고쳤다.
두 단락이 마음이 안 들었는데, A4 2장으로 늘렸다가, 모두 지웠다가, 두 문장으로 썼다가, 결국은 세 단락으로 정리해 새로 썼다.
내일 보여줄 것이다.
아내는 고뇌하는 이 소설가 가장의 눈물 어린 분투에 어떤 마음을 표할까. 

 

 

7. 15.


아내가 새로 고친 원고를 보고 경악했다. 

“아니, 왜 이리 많이 고친 거예요? 맘에 안 든 건 두 문장이었는데.”

“두 문장?! 두 단락 아니었어?”

나는 간만에 울기 직전의 얼굴이 되었다. 

 

“그리고 진짜 미안한데, 예전 원고가 더 나아요.”

나는 마흔이 되어 최초로 울 뻔했다.

“별로라고 했잖아!”

“그러니까……”
얼버무리는 아내에게 솔직히 말해달라고 하자, 어렵게 말했다.
“…이전 원고는 별로였어요. 근데, 고친 게 더 별로예요. 차라리 예전 게 나아요.”

 

열흘간 머리카락을 빠지게 하고, 살을 빠지게 하고, 실의에 빠지게 만들었던 원고는 결국, 원 상태로 돌아갔다. 

 

이게 바로 소설가의 일상이다. 

 

나는 화장실에 가서 얼굴에 물을 틀어놓고 샤워를 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내 얼굴에 흐르는 것은 눈물이 아니었다.
단지, 물에서 조금 짠 맛이 날 뿐이었다.
나는 스스로 되뇌었다.
‘물론, 완벽에 도달하진 못했다.
하지만, 적어도 발버둥은 쳐보았다(라고 자위했다. 엉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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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도일기 #히라노 게이치로 #책을 읽는 방법 #책
2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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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요

2016.08.11

저두요 ㅋㅋ
글 너무 재밌게 쓰시는데 최민석작가님 소설이 궁금해집니다
채널예스 잡지로 받아보는데
절도일기 팬이에요
이번엔 일부러 로그인해서 댓글달러왔어요
발버둥 치시는 모습에서 저도 힘을 얻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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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계노트북

2016.07.23

여러 상황들이 정말 공감되네요.
책을 좋아하지만 장편 완독은 정말 힘들어요. ^^
작가님 연재 즐겁게 읽고 있습니다.
슬럼프 극복 진심으로 기다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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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민석(소설가)

단편소설 ‘시티투어버스를 탈취하라’로 제10회 창비신인소설상(2010년)을 받으며 등단했다. 장편소설 <능력자> 제36회 오늘의 작가상(2012년)을 수상했고, 에세이집 <청춘, 방황, 좌절, 그리고 눈물의 대서사시>를 썼다. 60ㆍ70년대 지방캠퍼스 록밴드 ‘시와 바람’에서 보컬로도 활동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