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우마와 통증, 두 가지 모두 아프고 괴로운 일이다. 트라우마는 ‘외상’(外傷)을 뜻하는 외국어인데, 한국에서 트라우마는 사고, 거절, 폭력 등에 의해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아 발생하는 정신적 괴로움을 뜻하는 단어로 사용한다. 트라우마가 정신적 괴로움의 영역인데 반해, 통증은 신체의 고통이다. 누가 더 괴로운 것인지 우열을 가릴 문제는 아니다. 어떤 일에 의해서 상처가 생기고, 그것이 마음에 남으면 트라우마, 신체적 신호로 전달되면 통증이다. 우리는 정신과 육체를 구별하지만 둘 모두를 처리하는 ‘뇌’의 관점에서는 유사한 프로세스를 거친다. 모두 신경계와 신체 사이의 상호작용의 결과물이고, 이를 인식하고 처리하는 것은 사실은 생존을 위한 방어시스템이 작동한 덕분이다. 잘 처리하면 일시적 트라우마와 통증을 경험하는 것은 인간의 생존에 도움이 되고 위기를 잘 넘어가게 돕는다. 그러나, 장기간 트라우마에 시달리거나 통증으로 괴로워하게 될 수 있는데, 방어시스템이 과잉 작동하거나, 지속적으로 오작동을 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둘 사이의 관계를 뇌과학의 관점에서 잘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 문제를 직관적으로 이해하고, 극복할 방향을 제시해주는 책이 나왔다. 스티브 헤인스가 쓰고 소피 스탠딩이 그린 『뇌과학으로 읽는 트라우마와 통증-우리 몸의 생존법』이다. 쓴 사람과 그린 사람으로 저자를 나눈 것을 보고 눈치가 빠른 분은 알아차렸겠지만 이 책은 기본적으로 만화다. 어려운 뇌과학 지식을 고맙게도 만화로 그려냈는 데다가, 두 번째로 고마운 점은 그렇다고 무진장 두껍지 않고 겨우 80쪽에 불과하다. 그 안에 1부에 트라우마, 2부에 통증으로 나눠서 학술적인 정보를 기반으로 설명하고 실용적 전략까지 제시하였다.
나는 세상에는 아는 것을 전달하는 몇 가지 종류의 사람이 있다고 생각한다.
첫 번째가 아는 것이 많고 그만큼 어렵게 말하는 사람, 두 번째는 아는 것도 적고 말도 그 수준에 맞춰서 하는 사람, 세 번째가 아는 것은 별로 없는데 말만 복잡하게 하는 사람, 네 번째가 아는 것은 많은데 참 쉽게 전달해주는 사람.
당연하게 최고의 전달자는 네 번째이고 최악은 세 번째이다. 이 책은 아마도 최소한 내 소감으로는 네 번째 전달자에 속한다.
이제 저자가 전달하는 트라우마와 통증이 어떤 내용인지 잠시 맛보도록 하자.
트라우마에 의해 나타나는 증상은 생존을 위해 장착된 본능적 방어태세가 작동한 결과물이다. 특히 생명을 위협하는 상황이 닥치면 가장 먼저 안전을 최우선으로 한다. 이때 뇌의 편도체라는 부위가 최우선 결정권을 갖고 반응을 하고, 이 부분의 반응을 튜닝하고, 반응의 적절성을 판단하는 것은 전두엽이다. 그런데 트라우마가 극심하거나 반복적으로 일어나서 신경계가 손상을 입는 일이 발생한다. 편도체가 손상되면 과도하고 반복적인 경고신호를 보내고-집에서 그릇이 깨졌는데 강도가 들어왔다고 신호를 내는 것과 같이, 역시 손상된 전두엽은 신호를 합리적으로 분류하고 적절성을 평가하지 못해서 편도의 이런 과잉 반응을 내버려둔다. 그러니 트라우마 환자들은 사소한 자극에 온몸이 긴장되고, 충동적인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듯 ‘긴장-스트레스-트라우마’는 서로 연결되어있고, 스트레스에 대한 반응은 스트레스 요인 그 자체보다 피해를 많이 일으킬 수 있다.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인간은 트라우마 만날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유전적으로 설계되어있다. 회복이 가능하다. 트라우마는 인류가 진화화는 과정에 만나는 현상이다. 이렇게 주도권을 쥐고 있는 것은 편도이므로 전두엽과 연관된 기능은 ‘합리적 이유를 찾는 것’은 별다른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몸과 마음의 감각을 되찾는 것이다.
극단적 감각을 견디는 방법을 익히고 반성에 기반을 둔 자기인식을 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저자는 트라우마를 다루는 것은 흔든 콜라병을 따는 것과 비슷하다고 설명한다. 압도당한 상태에 서서히 튜닝하는게 필요한데 이때 가장 필요한 것이 안전하다는 느낌, 내 몸을 경험하고 느끼는 것이다. 이를 위해 방향, 운동, 지면이란 세 가지 노력을 제시하고 있다.
결국 내가 안전하다고 여기고, 몸을 통제하고 있다고 여기게 되는 과정을 서서히 해나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트라우마 치유는 기억을 다루는 문제가 아니라 몸 속의 강렬한 반응을 낮추고 스스로 조절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통증도 마찬가지다. 데카르트적 세계관으로는 몸의 부상이 강할수록 통증도 강할 것으로 여겨왔다. 그러나 지금껏 밝혀진 바로는 이와 달리 그렇지 않다는 연구가 매우 많다. 통증을 일으키는 몸의 부위의 신호를 차단하면 통증도 사라질 것으로 여겨 신경차단술을 많이 시행했다. 그런데, 신기하게 일시적으로 고통이 없어졌지만 곧 다시 돌아오거나 가끔은 처음보다 더 심해지는 일이 발생했다. 상처가 생긴 조직자체만이 문제가 아니라, 통증의 위치를 찾아내서 이름을 붙인 뇌의 시스템에 문제가 생긴 것이다.
이를 저자는 통증학자 모즐 리가 제시한 ‘뉴로태그(neurtag)’를 인용해서 설명한다. 뉴로태그는 신체의 특정 부위에서 통증이 느껴지는 신경세포들의 네트워크다. 이 뉴로태그가 통증신호를 가볍게 여기면 가벼운 통증으로 인식한다. 그런데 같은 허리통증으로 태그가 된 것이라 해도 만일 허리가 생명인 운동선수의 부상으로 큰 대회를 앞두고 스트레스를 받는다면 강한 통증으로 인식할 수 있다. 그리고 통증으로 실제 경기를 제대로 하지 못하면 통증은 더 심해지는 악순환에 빠지고 만성통증이 만들어지게 된다. 이때에는 허리에 자극이 없어도 통증을 느낄 수 있다. 통증은 꼭 그 신체부위의 염증이나 상처, 자극뿐 아니라 우울, 불안과 같은 감정, 통증에 대한 개인적 인식이나 해석 같은 인지기능과 밀접한 상호작용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안타깝게 이런 일이 반복되면 만성적 통증에 시달리게 되는데, 통증신호가 강렬하게 반복되면서 다른 어떤 신호들보다 우선하게 되면서 그 모든 것보다 우선하는 강한 신경망을 형성한 결과다.
이런 상황이 되었을 때 해결책은 먼저 부정적 감정을 치료하고, 통증에 대한 왜곡된 인식을 개선하면서 해당 뉴로태그가 갖는 강렬한 연결망을 서서히 풀어내면서 다른 신체감각을 강화시키는 작업을 하는 것이다. 강력한 통증신호가 빈발하게 발신될 때에는 뇌는 몸의 다른 부위의 신호는 그동안 다 무시하거나 왜곡을 해왔다. 이제는 원래 신호들을 강화시키고 정상화시켜야 한다. 그래야 더 이상 강력한 통증신호가 우리 몸의 전체 신경망을 좌지우지 못하게 된다. 이런 꽤 어려운 이야기를 저자는 이해하기 쉬운 그림과 함께 한 눈에 알아보기 쉽게 짧은 분량으로 전달하고 있다.
뇌과학에 관심이 많은 사람뿐 아니라, 트라우마나 통증으로 고생을 하는 환자와 그 가족들이 문제의 핵심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고 해결방향을 잡는데 많은 도움이 될 책이다. 비록 트라우마와 통증, 둘은 우리의 생존을 위해 불가피한 반응을 하는 과정에 만들어진 것이나, 어쩌다 몸과 마음을 지배해버린 괴물이 되는 경우가 있다. 내가 만든 괴물들을 다시 제자리로 되돌리는 방법을 찾는 것은 실제로는 어렵지만 꼭 필요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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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과학으로 읽는 트라우마와 통증스티브 헤인스 저/소피 스탠딩 그림/김아림 역 | 푸른지식
이 책은 의학적 관점을 그래픽으로 쉽게 풀어놓으면서 트라우마와 통증이라는 두려운 존재를 상대하고 있거나 상대하려는 사람들에게 손길을 내민다. 치료자나 환자는 물론이고 몸과 마음의 상호작용을 제대로 이해하고 싶은 이들에게 훌륭한 안내서가 되어줄 것이다.
하지현(정신과 전문의)
어릴 때부터 무엇이든 읽는 것을 좋아했다. 덕분에 지금은 독서가인지 애장가인지 정체성이 모호해져버린 정신과 의사. 건국대 의대에서 치료하고, 가르치고, 글을 쓰며 지내고 있다. 쓴 책으로는 '심야치유식당', '도시심리학', '소통과 공감'등이 있다.
iuiu22
2016.08.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