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한 추석 연휴 계획이 없다면, 서점에 가자. 동네책방이든 인터넷서점이든. 5일 휴가 동안 책 1권은 볼 수 있지 않을까. 평소 좋아하는 소설, 전혀 관심이 없었던 만화도 좋다. 집안일에서 잠깐 벗어나고 싶다면, 친척들의 잔소리에서 해방되고 싶다면, 동네 카페로 가자. 침대에 눕자. 조용히 나를 만나자.
김이경(작가)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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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에 혼자 있는 것은 누구에겐 꿈이고 누구에겐 설움이다. 이유는 달라도 괴롭긴 마찬가지. 속내 모르고 서로를 부러워도 하지만 긴 연휴를 견디려면 남의 시간을 탐하기보다 내 시간을 알뜰히 챙기는 게 낫다. 시간이 넉넉하면 『협상의 전략』처럼 평소 엄두를 못 냈던 두꺼운 책에 도전하면 좋겠고, 짬짬이 틈을 내야 하는 처지라면 비스와바 쉼보르스카의 『충분하다』를 강추한다. 삶에 두 번은 없다고, 그래서 모든 평범은 단 한 번뿐인 비범이라고 일깨웠던 시인의 유고시집을 읽고 나면, 심란한 일상이 더도 덜도 없는 한 편의 시임을 깨닫게 된다. 순간, 하늘의 보름달이 당신 마음에 뜰 것이다.
김병수(정신과 전문의)
마쓰이에 마사시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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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 휴가(imagery vacation). 클라이언트에게 종종 권하는 치료 기법이다. 가고 싶은 여행지의 풍경을 마음에 그려낸다. 소리와 향기, 촉감과 온기까지. 마치 지금 그곳에 있는 것처럼. 그 느낌에 잠겨 있으면 스트레스가 스르륵 풀린다.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를 읽는 동안, 나는 심상 휴가를 떠났다. 책장을 펼치면 가루이자와, 아오쿠리 마을, 아사마 산으로 순간 이동을 했다. 책장을 덮으면 다시 서울. 책을 다시 펼치면 숲 속 별장과 계수나무가 보였고, 졸참나무 장작이 타는 냄새와 "사각사각" 연필 깎는 소리가 들렸다. 책 속의 문장처럼, 나는 "혼자 조용히 충족되어 있었다."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의 문장들은 읽혀지는 것이 아니라, 물이 젖듯 몸으로 스며들었다. 책이 끝나자, 책 속 세상과 내가 사는 현실의 낙차를 크게 느껴야 하는 부작용은 있었다. '나는 언제쯤 답답한 진료실을 떠나 아오쿠리 마을 숲 속의 여름 별장 작업실에서 일 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래도 이번 생에는 어려울 것 같다.
권석천(기자)
커트 행크스 『발상과 표현기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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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 고교 시절 나는 낙서로 스트레스를 풀었다. 공책 곳곳에 관우ㆍ장비 같은 삼국지 인물이나 친구들 얼굴을 긁적였다. 세월이 흘러 초년병 기자 때였다. 로버트 레드포드가 타자로 등장하는 영화 '내추럴'을 보았다. 영화엔 야구 경기를 취재하는 기자가 삽화를 그리는 장면이 나온다. 삽화 그리는 기자도 괜찮겠는 걸? 그 꿈이 도진 건 최근 만화가 권용득이 에세이집 『하나같이 다들 제멋대로』, 사진전문기자 권혁재가 『권혁재의 비하인드』를 내면서다. 만화가, 사진기자가 무슨 글까지 잘 쓰는 거야?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그래, 나라고 삽화 그리지 말라는 법 있어? <중앙일보> 만평 그리는 화백 박용석의 강력 추천으로 『발상과 표현기법』을 샀다. '느낌으로 그려라.' '눈→ 두뇌→ 손→ 눈의 순환이다.' '자신과 도구(펜)를 일체화시켜라.' 이번 연휴 나는 이 책에 도전할 것이다. 혹시 아는가? 몇 달 뒤쯤 삽화 그리는 나를 발견할 수 있을지.
윤지회(동화작가)
수신지 『3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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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책인가? 그림책인가? 그림이 예뻐서 샀다가 재밌게 읽은 『3그램』은 일러스트레이터들 사이에서 이슈가 되었던 그래픽노블이다. 책을 열면 먼저 따뜻한 먹색의 드로잉이 눈에 띄는데 시각적으로 즐겁다. '3그램'은 난소 하나의 무게라고 한다. 작가는 난소암으로 힘들었던 20대의 투병기를 무겁지 않고 담담하게 그려내었는데 흔히들 생각하는 슬프고 힘든 암투병기와 달리 심각하지 않아서 좋다. 그렇다고 고통이 없지는 않지만 병을 치료하며 겪게 되는 감정적 변화를 눈으로 마음으로 함께 할 수 있어 매력적이다. 실제로 지인이 난소암에 걸렸을 때 추천했던 책이기도 하다. 이 책을 보게 된다면 평범한 오늘 하루가 조금은 더 소중할 것이다.
윤이나(칼럼니스트)
빌 브라이슨 『발칙한 영국 산책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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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쁘다는 핑계로 서문, 혹은 두어 장만 읽다 만 책이 한 가득이다. 그 책 무더기에서 추석 연휴 본가로 들고 갈 책을 추린답시고 한 권씩 들춰보았다. 리베카 솔닛의 『멀고도 가까운』과 경합을 벌이다 근소한 차이로 승리해 짐 가방에 들어간 책은 빌브라이슨의 『발칙한 영국 산책2』. 사실 일단 연휴라면 책이고 뭐고 쉬고 싶을 뿐이고 쉬는 것에 가장 가까운 책이라면 역시 빌 브라이슨의 여행기를 고를 수밖에 없다. 내 오늘은 여기 있지만 내년에는 기필코 떠나리라는 반복되는 다짐을 되새기기에도 좋다. 『대단한 호주 여행기』를 들고 호주로 향했던 어느 날처럼, 언젠가는. 이를테면 미리 보기 같은 느낌으로, 이번에는 영국이다.
펭귄(만화가)
신경숙 『엄마를 부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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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국 생활을 한지 4년 반. 여기, 나 말고 또 다른 한국인이 있을까 싶은 영국 안의 작은 도시에 사는 나는, 어쩔 수 없이 한국의 명절이 점점 낯설어져 간다. 연휴 기간, 한국에서 고향집으로 향하는 차들이 고속도로에 줄을 서고, 집집의 부엌엔 명절 음식 냄새가, 또 TV가 분주하게 추석 특집 프로를 내보내는 동안, 내가 속해 있는 이 곳에선 그저 어제와 같은 그림의 오늘을 보내게 되니 말이다. 하지만 나와 추석 사이 연결 고리의 느슨함과는 별개로 여전히 필연적으로 맛보게 되는, 향수와 사모. 한 두 번은 재료들을 구해 명절 음식 비슷한 것도 만들어 남편과 함께 먹어 보았지만, 내가 만드는 전은 엄마의 전이 될 수 없다는 걸 느낄 때, 나는 한국에 있는 엄마와 나의 거리를 실감하게 되고, 그 거리의 아득한 만큼 엄마가 보고 싶어진다. 즐거운 이야기의 책을 추로 달아 돌덩이 같은 마음을 끌어 올리는 것도 좋을 텐데. 이상하게, 눈물 뚝뚝을 예약한 이 책을 읽으며, 마음에 무게를 더 얹어 저기 바닥 아래 끝으로 가, 더 큰 그리움으로 그리움을 다독이며 추석을 보내고 싶다.
이은의(변호사)
프레드릭 배크만 『오베라는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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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추천을 해달란 요청에 덜컥 '좋아요'를 외쳐놓고, 쉽게 첫 문장을 떼지 못했다. 내게 『오베라는 남자』가 왜 좋았는지, 다른 이들에게 이 책이 좋을 이유가 같은지가 망설여졌다. 정직하고 까칠한 영감님인 오베 씨에겐 사랑하는 아내가 있었다. 오베 씨의 아내는 '그동안 흑백이었던 인생'에 '다양한 색깔을 가진 컬러' 같은 존재였다. 그런 아내가 먼저 죽고 컬러를 잃은 흑백의 인생에 남겨진 오베 씨는 자살을 결심하는데, 이 즈음 이사온 이웃과 얽히게 된다. 아내가 인생의 아름다움을 느끼게 해줌으로써 색깔을 칠해줬다면, 이웃은 성가시게 인생에 끼어들면서 색을 덧칠한다. 덧칠해진 색깔이나 색깔을 칠하는 방법은 다르지만, 외롭고 밋밋했던 삶은 소소한 이야기들이 생겨나며 온기와 활기를 띄게 된다. 『오베라는 남자』는 읽는 이에게 인생이란 무엇인지, 사람과 사람이 함께 살아가는 풍경이란 무엇인지를 마음 따뜻하게 돌아보게 만든다. 산다는 것은 가슴 벅찬 설렘과 기쁨으로도 행복을 만들지만 귀찮은 관심과 번거로운 어우러짐으로도 보람을 일군다. 책장을 덮을 무렵에는 그렇게 설레거나 귀찮게 만드는 곁의 사람들을, 그들과 함께 하는 오늘을 뭉클하게 느끼도록 해준다. 너무 많은 이들과 어울리게 되거나, 아무하고도 어울리지 않게 되는 추석 연휴에 이 책이 좋을 것 같은 이유다.
김동영(작가)
커트 보니것 『마더 나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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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은 아니지만 시간이 지나면 고전에 반열에 오를거라 주장하고 싶다. 왜냐하면 커트 보네커트는 매 작품에서 복잡하고 어려운 주제를 재치있고 명쾌한 문장으로 써내려 갔기 때문이다. 그의 많은 작품 중에서 가장 쉽게 시작할 수 있는 책이 바로 『마더 나이트』가 아닐까 싶다. 이 작품은 제 2차 세계대전부터 현재가 뒤죽박죽 엉켜 있지만 하나도 그것이 어색하거나 복잡하지 않고 오히려 참신하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영향 받은 작가라서 그런지 책을 읽다 보면 하루키가 어떤 부분에서 그의 문체와 이야기를 풀어 가는 과정을 배웠는지 확인할 수도 있어 하루키의 글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반드시 읽어볼 가치가 있다. 쉽게 읽히지만 절대 쉽게 잊혀지지는 않을 책이다.
신예희(작가)
이사벨 아옌데 『영혼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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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레 출신 작가이자 언론인 이사벨 아옌데는 사촌 지간이던 살바도르 아옌데 대통령이 피노체트의 쿠데타로 축출되자 베네수엘라에 망명했고 작가로 데뷔한 후 미국으로 이주했다. 굳이 작가의 인생 역정을 이야기하는 것은 작품 속에 그것이 고스란히 녹아 있기 때문이다. 체념하는 여성, 참지 않는 여성, 순종하는 여성, 목소리를 내는 여성. 아옌데의 책에는 다양한 여성이 등장한다. 부드러우며 강하고 꼿꼿하면서 유연한 그들의 모습에 내 심장이 뛰고 내 주먹에 힘이 들어간다.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용기가 생긴다. 술술 읽히는 이사벨 아옌데의 책이 함께한다면 짜릿한 추석이 되지 않을까. 연휴 후유증에는 『세피아빛 초상』을 권한다.
이진송(칼럼니스트)
이민경 『우리에겐 언어가 필요하다 : 입이 트이는 페미니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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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연휴에 혼자 있기를 선택한 이유는 가지각색이겠지만, 꿀송편을 걸고 말하자면 "오랜만에 만나 할 말 없는 친척들이 무차별 폭격하는 잔소리"로부터 피신한 사람들 꽤 많을 것이다. 왜 이렇게 살이 쪘느냐, 결혼은 언제 하느냐와 같은 '고나리'는 명절 단골 레퍼토리고, 이번에는 페미니즘 관련 이슈가 새로 등판할 예정이다. 아…! 사랑하는, 혹은 어쩔 수 없이 얽혀버린 혈연들과 벌이는 젠더 관련 논쟁은 상상만 해도 뒷골이 당기고, (고구마, 호박이 아닌) 호박 고구마 먹은 답답함이 밀려온다. 집에 가고 싶죠, 집에 있는데도 집에 가고 싶을 거야. 그럴 땐~ 이 책을~ 아침 사과처럼~꺼내 읽어요~ 본격 실용주의 페미니즘 책, 혼자서 물개박수 치며 읽어도 좋고, 이동하는 동안에 읽어서 전투력을 높여도 좋다.
채널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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