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뉴욕에 출장 겸 여행을 다녀왔다. 수많은 도시 중에서 뉴욕을 선택한 이유는 책과 술 두 가지 모두 배울 점이 있기 때문이었다. 먼저, 뉴욕에는 세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바들이 모여 있다. 그리고 서점업계가 어려운 한국과 달리, 미국의 서점은 2007년 이래로 매출이 지속해서 증가하고 있다. 낮에는 서점을 구경하고 밤에는 바에서 술 한잔 할 수 있는, 그야말로 완벽한 일정이었다. 그저 바에서 하나의 규칙만 지키면 됐다.
“첫 잔은 김렛을 마신다.”
김렛의 짜릿하면서도 상큼한 맛은 첫 잔으로 마시기에 적합하다. 더불어 바마다 사용하는 재료와 조주 방법이 조금씩 달라서 눈요기로 공부하기에도 좋다. 마지막으로 미국의 추리소설 작가인 레이먼드 챈들러가 쓴 『기나긴 이별』을 읽으면 김렛을 사랑할 수밖에 없게 된다.
『기나긴 이별』은 잔인하고 폭력적인 사건을 무덤덤하게 표현하는 ‘하드보일드 문체’를 온전히 느낄 수 있는 책이다. 주인공은 ‘필립 말로’라는 사립 탐정이다. 영국의 코난 도일에게 셜록 홈스가 페르소나이듯이, 미국의 레이먼드 챈들러에게는 필립 말로가 있다. 그는 낭만과 의리 그리고 고독이라는 키워드로 요약되는 캐릭터다. 커피 한 잔을 따르고 옆에 담배를 둔 뒤 불을 붙여 친구를 추모하기도 하고, 종종 홀로 술을 마시고 체스를 둔다.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 혼잣말하는 것이 습관이다. 하지만 그의 모습을 보면, 화려하지는 않아도 무게감이 느껴진다.
이 책은 필립 말로가 술에 취해 쓰러져 있던 테리 레녹스를 도와주면서 시작이 된다. 이 일을 계기로 둘은 종종 술을 마시며 우정을 다진다. 그들이 항상 마시는 술은 김렛이다. 특히 테리 레녹스는 김렛을 너무 좋아해서,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에게 회자되는 유명한 말을 남기기도 했다.
“여기 사람들은 김렛 만드는 법을 잘 모릅니다. 사람들이 김렛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냥 라임이나 레몬주스와 진을 섞고 설탕이나 비터를 약간 탄 것에 지나지 않아요. 진짜 김렛은 진 반, 로즈사의 라임주스 반을 섞고 그 외에는 아무것도 섞지 않는 거죠. 마티니 같은 것은 비교도 안 됩니다.”
과연 어떤 술이길래, 칵테일의 왕이라는 마티니가 비교도 안 된다는 것일까?
김렛(Gimlet)의 어원에는 두 가지 흥미로운 설이 있다. 첫 번째, 김렛은 ‘날카로운 송곳’이라는 뜻을 가진 단어다. 김렛에는 꽤 높은 비율로 라임이 들어가기 때문에 맛이 짜릿하다. 마치 송곳에 찔리듯이 온몸의 신경을 깨우는 맛이기에 이름이 지어졌다는 설이 있다. 두 번째,20세기 초반의 영국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영국 왕립 해군들은 오랫동안 항해를 하다 보니 비타민C 섭취가 부족해서 괴혈병에 걸리곤 했다. 그때 외과의사이자 해군 소장인 토마스 김렛이 진에 라임주스를 섞자고 제안을 했다. 그러면 상할 염려도 없고 병사들의 건강과사기 진작에도 도움이 되니 일거양득의 효과였다. 자연스레 그의 이름은 칵테일의 이름이 되었다.
그렇다면, 테리 레녹스는 왜 김렛을 즐겨 마시는 것일까? 그는 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가 동료들을 대신해 부상을 당한다. 동료를 위해서라면 몸을 사리지 않는 의리의 사나이다. 전쟁 이후에는 알코올에 빠지지만, 그사이 엄청난 부자의 딸과 결혼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의 머릿속에는 전쟁 이전에 만났던 연인에 대한 기억이 여전히 남아 있다. 그리고 결국 그녀를 위해 용기 있는 결정을 내리기도 한다. 즉 그는 알코올중독자에 가까운 삶을 살지만 동시에 의리와 낭만을 간직하는 사람이다.
김렛은 그의 의리와 낭만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연결이 된다. 그는 “진 반, 로즈사의 라임 주스 반”이라는 자신만의 레시피를 고집한다. 이런 고집은 이것저것 수시로 바꾸지 않는 의리의 성격을 대변하며, 동시에 자신만의 레시피로 술을 마신다는 것은 애주가만이 느낄 수 있는 낭만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보드카 마티니. 젓지 않고 흔들어서”라고 줄기차게 외치는 제임스 본드 또한 의리와 낭만의 사나이라고 볼 수 있다. 가을은 남자의 계절이고, 동시에 의리와 낭만이 떠오른다. 가을의 시작을 김렛과 함께한다면 꽤 괜찮을 것 같다.
김렛
재료
진 1.5oz
라임주스 1.5oz
얼음 약간
만들기
1 진과 로즈사의 라임주스를 1.5oz씩 얼음이 들어 있는 쉐이커에 넣는다.
2 진과 라임주스가 골고루 섞이도록 쉐이킹한다.
3 쿠프 글라스 혹은 마티니 글라스에 따른다.
정인성(Chaeg Bar 대표)
바와 심야서점이 결합해 있어 책과 술을 동시에 즐길 수 있는 공간인 책바(Cheag Bar)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가뜩이나 더운 날, 누군가와 갈등이 생긴다면 스트레스가 생길 수밖에 없겠죠. 이 뜨거운 더위와 갈등을 식혀주는 책 한 잔을 소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