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나 영화에서는 주연보다 주목받는 조연이 많습니다. 독특한 캐릭터 해석과 감칠맛 나는 연기로 작품을 더 풍성하게 만들죠. 상대적으로 무대에서는 주연보다 사랑 받는 조연은 흔치 않은데요. 이 배우는 예외입니다. 주연으로 무대에 서던 한창 때보다 후배들에게 타이틀 롤을 내 준 뒤에 더 주목 받는 배우, 무대 위 강렬한 연기로 주인공에게 비출 스포트라이트마저 살짝 분산시키는 바로 서영주 씨인데요. 뮤지컬 <스위니 토드>의 터핀 판사로 지난 여름을 보냈던 서영주 씨가 이번 겨울은 <오! 캐롤>의 허비로 오랜만에 포근한 이미지로 무대에 설 거라고 합니다. <오! 캐롤> 연습이 진행되고 있는 광림아트센터 인근 카페에서 서영주 씨를 만나봤습니다.
“허비는 리조트 쇼 무대의 코미디언이자 MC예요. 개인적인 공간에서는 에스더라는 여성을 향한 마음을 키워가죠. 순정도 있고, 유머도 있는 인물이랄까. 여성에게 사랑 고백을 하는 캐릭터는 정말 오랜만이에요. 얼마만인지 기억도 안 나요(웃음).”
<오! 캐롤>은 닐 세다카의 히트곡들로 채워지는 주크박스 뮤지컬. 결혼식 당일 신랑에게 바람맞은 신부와 그녀의 친구가 함께 여행을 떠나면서 벌어지는 유쾌한 러브스토리입니다. 서영주 씨와 함께 남경주, 서범석 씨가 허비 역에, 허비의 사랑을 받는 에스더 역에는 전수경, 김선경, 임진아 씨가 캐스팅됐습니다. 공연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상대 배우들은 파악이 다 되셨을까요?
“파악이야 익히 다 알고 있는, 20년 전부터 알고 있는 사람들인데요(웃음). 허비도 그렇지만 에스더도 배우마다 드러나는 게 다를 거예요. 전수경 에스더는 인생을 좀 많이 산 것 같은 느낌, 김선경 에스더는 아직 통통 튀는 느낌이고, 진아는 나이에 비해 강렬하더라고요. 성격도 터프하고. 그런 색깔이 무대에서도 나오겠죠. 허브-에스더 외에 젊은 커플, 어린 커플도 나오지만 관객의 주 타깃은 중장년층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요. 40대만 돼도 노래 제목은 몰라도 들으면 다 아는 음악이거든요.”
3개월 넘게 <스위니 토드>의 터핀 판사로 섹시하면서도 강렬한 연기를 선보이셨는데, 오랜만에 편한 옷을 입은 셈이네요.
“그렇죠, 자극적이지 않은 생활 연기랄까. <스위니 토드>는 끝나서 정말 시원해요. 관객들이 많이 좋아해주셔서 감사했지만 개인적으로는 무척 힘들었거든요. 특히 매일 운동을 해야 해서. 연습 때부터 석 달 넘게 매일 운동했던 건 태어나서 처음이었어요. 작품이 끝나니까 운동을 안 해도 돼서 좋아요(웃음). 터핀도 그렇지만 최근 2~3년간은 좀 어둡고 센 캐릭터를 많이 했어요. 배우들은 캐릭터를 따라가는 면이 있어서 평소에도 무겁게 될 때가 있더라고요. 그래서 밝고 재밌는 게 없을까 생각했는데, <오! 캐롤> 대본을 봤더니 재밌고 유쾌해서 흔쾌히 참여하겠다고 했죠. 닐 세다카의 노래도 정말 좋고요.”
가까이에서 보니까 선악이 공존하는 얼굴이랄까요? 눈매가 날카롭긴 한데 개구쟁이 같은 모습도 있고요.
“나이 먹어 눈꼬리가 쳐져서 그래요(웃음). 그런 말은 자주 듣는 편이에요. 가만히 있으면 차갑고 말 걸기도 무섭다고 하는데, 웃으면 전혀 그렇지 않으니까. 그게 저이기도 하고요.”
원래 성격이 그렇게 센 편은 아닌가 봅니다.
“잘 모르겠어요. 남들은 세다고 느낄걸요? 이른바 마초 중의 상마초라고(웃음). 그런데 터핀 같지는 않아요! 센 반면에 섬세한 면도 있고, 허비와 더 가까운 면이 많을 겁니다. 사실 목소리도 예전에는 이러지 않았는데, 캐릭터에 맞추다 보니 굳어진 것 같아요. 선배들이 ‘너 예전에는 목소리가 이렇게 저음 아니었잖아?’라고 하시거든요. 베르테르 할 때만 해도 굉장히 미성이었어요. <베르테르> 보셨어요?”
서영주 씨가 참여하신 <베르테르>는 못 봤습니다. 솔직히 상상이 안 가네요(웃음).
“하하하하, 그렇죠? 제가 1대 베르테르였어요. ‘서영주 베르테르’를 잊지 못한다는 소수 팬들이 있죠. 대본도 좋았고 노래도 좋았고, 배우들끼리 매일 끝나고 술 마시고 얘기도 많이 하고. 전형적인 낭만과 열정이 있던 시절의 작품이라 기억에 많이 남아요. 하면서도 재밌었고요.”
베르테르를 다시 할 수 있다면...
“하고 싶죠. 대신 제일 큰 극장에서, 주름살 안 보이게(웃음). 이제 해서는 안 되는 역할도 있어요. <그리스>의 케니키 같은. 장난삼아 <그리스> OB팀 꾸려서 짧게 공연하면 재밌지 않겠느냐고 말은 해요. 춤추다 힘들면 잠시 쉬자고(웃음). 나이를 먹으면 자연스럽게 배역이 바뀌잖아요, 주연에서 조연으로 바뀌고. 모든 배우들이 마찬가지일 거예요. 저는 <닥터 지바고> 때 지바고가 아니라 코마로브스키를 하면서 그 과정을 겪은 것 같은데, 솔직히 아직까지 인정하기 싫은 부분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더 많은 것들을 해볼 수 있으니까 편안하게 받아들이기로 했어요.”
하지만 <스위니 토드>의 터핀 판사, <로빈훗>의 존, <맨 오브 라만차>의 여관주인 등 무대 위 서영주 씨의 모습은 주인공보다 더 강렬하게 남을 때가 많습니다. 나이가 더해져서 오히려 더 하고 싶은 배역도 있을까요?
“기억을 많이 해주셔서 굉장히 감사하죠.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인데 <맨 오브 라만차>의 돈키호테나 <닥터 지바고>, <스위니 토드>의 주인공은 나이가 좀 있는 배우가 해야 하지 않나. 실제 캐릭터의 나이도 그렇고, 연륜 있는 배우가 했을 때 원작의 느낌을 더 잘 살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
단박에 조승우 씨가 떠오르는데요. 모두 참여하셨던 작품인데, 무대에서 ‘저건 내가 해야 하는데...’ 생각하셨나 봐요(웃음).
“승우가 했으니까요(웃음). 그런 생각 자주 해요. 배우들은 보는 순간 ‘저건 내꺼!’라는 느낌이 드는 캐릭터가 있거든요. 그런데 그 작품에서 모두 악역을 했네(웃음). 물론 티켓 판매가 걱정되기는 하지만, 회 차를 조정해서라도 캐스팅에 좀 기회를 열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요즘은 무대에서 내공을 쌓으신 분들이 영상매체에서 훨씬 다양한 역할을 하시잖아요.
“저도 기회가 된다면 다양한 곳에서 다채로운 역할을 해보고 싶어요. 제가 30대 초반일 때까지만 해도 공연하는 사람들은 연극정신, 무대에 대한 경외감을 중요하게 생각해서 타 매체를 하는 것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했는데, 이제 능력만 된다면 자기가 가진 것을 어디서든 펼쳐 보일 수 있잖아요. 정통 사극하면 재밌을 것 같아요. 성격 있는 왕(웃음)? 반면 한없이 자상한 역할도 해보고 싶고요.”
오랫동안 무대에서 활동하셨던 만큼 후배들에게 한 말씀 해주신다면요?
“술 한잔 하자! 요즘은 술들을 안 마셔요. 연습 끝나면 다 가더라고요. 자기네들끼리 먹나(웃음)? 사실 많은 의미가 담긴 말이잖아요. 사람들이 모여서 만드는 작품이니까 많이 부대끼고 얼굴을 봐야 더 좋은 무대가 나오는데, 요즘은 대부분 스마트폰 보고 있으니까 저는 그게 싫더라고요. 대화할 기회도 적어지고, 대화를 일부러 유도하려고 하면 ‘꼰대’ 소리 듣고. 같이 술 좀 마셨으면 좋겠어요.”
<오! 캐롤>과 함께 해가 바뀔 텐데요.
“개인적으로는 건강했으면 좋겠어요. 건강해야 뭐든 할 수 있잖아요. 누구나 알고 있고 쉬운 말인데, 실천하기는 힘들더라고요. 그리고 관객들도 진한 여운이나 깊은 감동을 기대하시기 보다는 편한 마음으로 공연장에 오셨으면 좋겠어요. 좋은 사람, 가까운 사람, 또는 그동안 챙기지 못한 친구들과 오셔서 연말연시를 닐 세다카의 음악과 함께 즐겁게 보내셨으면 합니다.”
인터뷰는 이렇게 끝났지만 녹음기를 끄고, 그러니까 ‘오프 더 레코드’로 대화는 계속 됐습니다. 솔직히 더 재밌고 대담한 얘기들이 많이 나왔지만 기사화할 수 없는 점이 아쉽네요(웃음). 서영주 씨는 무대를 보며 상상했던 모습과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모습이 적절히 섞여 있어 재밌었습니다. 기자가 배우를 인터뷰하고, 관객들이 그 기사를 읽을 때도 비슷한 재미를 느끼지 않을까 싶네요. 뮤지컬 <오! 캐롤>은 11월 19일부터 광림아트센터 BBC홀에서 공연됩니다. 기자처럼 ‘베르테르’보다는 ‘터핀’에 더 익숙한 관객이라면 <오! 캐롤>의 허비로 전혀 다른 분위기의 서영주 씨를 확인해보면 어떨까요?
윤하정
"공연 보느라 영화 볼 시간이 없다.."는 공연 칼럼니스트, 문화전문기자. 저서로는 <지금 당신의 무대는 어디입니까?>, 공연 소개하는 여자 윤하정의 <공연을 보러 떠나는 유럽> , 공연 소개하는 여자 윤하정의 <축제를 즐기러 떠나는 유럽>, 공연 소개하는 여자 윤하정의 <예술이 좋아 떠나는 유럽> 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