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막 비행기에서 내린 사람들이 무리 지어 입국장으로 이동하고 있다. 두 어깨 가득 묵직한 짐을 진 여행자도 가방 대신 엄마 손을 꼭 붙잡은 아이도 같은 곳을 향해 간다. 두툼한 외투로 몸을 감싼 그도 반팔 셔츠를 가볍게 걸친 그녀도 앞으로 앞으로 걷는다. 두리번거리는 아이의 시선 끝, 흐르는 인파 옆으로 자리한 투명한 유리벽 위에는 오슬로 공항에 온 걸 환영한다는 인사가 그들의 언어와 영문으로 나란히 새겨져 있고 그 뒤로는 태양이 오늘의 마지막 빛을 아낌없이 쏟아내며 새 사람들을 뜨겁게 환대한다.
아니다. 사실 저 빛살은 이제 막 떠오른 해가 만들어낸 것이고 아이는 두리번거리는 것이 아니라 어수선한 가운데서 엄마의 말을 놓치지 않기 위해 귀를 쫑긋 세우고 있다. 너무 오랜 비행으로 피로가 내려앉은 사람들의 등은 굽어있고 아직은 원인을 정확히 알 수 없는 절차상의 문제가 생겨 여행객들은 공항 안에 발이 묶인 채 대기하고 있다.
『북쪽으로 가는 길 The way to the North』은 사진작가 신혜림이 2009년과 2016년의 노르웨이 풍경에 짤막한 글을 더해 낸 책이다. 책에 실린 한 장의 사진, 양 페이지를 가득 채운 공항의 이미지를 간단하게 문장으로 풀어내면 이 정도가 될까. 실상은 전자일수도 후자일수도 둘 다 아닐 수도 있으나 어차피 정답은 중요하지 않다. 사진은 얼핏 침묵하고 있는 것 같지만 이따금 글보다 훨씬 수다스럽고, 낯설거나 혹은 낯설었으면 싶은 여행을 담은 사진이라면 더 그럴지도 모르겠다. 책에 실린 사진들은 작가 본인의 말처럼 ‘어디가 가장 좋았다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넘치게 좋았던’ 노르웨이에서의 보통 날들과 설렘의 순간들을 때로는 낮은 음성으로 차분하게, 또 가끔은 들뜬 목소리로 유쾌하게 들려준다.
작가는 필름 사진 특유의 풍부한 색감들과 마주할 때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하다고 말한다. 특유의 분위기와 감성으로 작가에게 황홀경을 선물한 사진은 그의 감각과 만나 새로운 이미지를 빚어내고, 이미지는 그 속에 다시 수많은 이야기를 품는다.
기차 안, 창문을 건너온 햇빛이 따듯한 색으로 탁자를 가득 물들이고 앞의 승객이 미처 챙기지 못한 한 잔의 커피가 나눠 받은 해님의 온기를 살며시 머금고 있다. 한참을 달려 도착한 곳에는 초록이 가득한 들판과 숲, 유유히 흐르는 강과, 강을 둘러싼 한적한 마을이 있고 저 멀리 하얗게 덮인 설산이 보인다. 이내 마을에는 서서히 밤이 찾아온다. 하늘은 한참 동안이나 붉은 듯 푸르게 물들어가고, 어둠을 허락하지 않는 새하얀 밤이 빨간 지붕 위에서 이제 그만 집으로 돌아오라 손짓한다.
이를 테면 이런 이야기를 말이다.
북유럽의, 노르웨이의 빛과 색으로 완성한 하나뿐인 지도, 그 시작도 끝도 없는 지도를 따라 떠나는 ‘북쪽으로 가는 길’. 지도 위에 새겨놓은 수십 장의 장면들, 카메라에 붙잡힌 찰나의 순간들은 또 어디의 누구에게 무슨 말을 건넬까?
박형욱(도서 PD)
책을 읽고 고르고 사고 팝니다. 아직은 ‘역시’ 보다는 ‘정말?’을 많이 듣고 싶은데 이번 생에는 글렀습니다. 그것대로의 좋은 점을 찾으며 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