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삶은 출생과 죽음이라는 고정된 양극 사이에 아른거리는 뉘앙스들이다. 여기 우리의 존재라는 그 반짝임은, 비록 짧지만 무한히 복잡하여 겉치레, 자아기만, 덧없는 현현, 그릇된 출발과 더 그릇된 마무리로 이루어져 있으며-삶에서는 삶 자체 말고는 아무것도 끝나지 않는다-이 모든 것이 자신은 자신이지 단순한 등장인물, 자신들이 모인 덩어리가 아니라는 전제에서 발생한다.(250쪽)
『바다』에 실린 역자의 해설을 읽다가 저자인 아일랜드 소설가 존 밴빌의 위와 같은 말을 접했다. 그제야 나는 “나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다른 사람이 되고 싶었다”라는 주인공 맥스 모든의 문장을 이해할 수 있었다. 여기서 말하는 다른 사람이라는 건 물론 자기가 아는 자신과 다른 사람이라는 게 일차적인 의미지만, 더 나아가서는 타인과 다른 사람으로 인지되고 싶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런 욕망에는 우리들 대부분이 출생 환경과 교육을 통해 만들어진 가짜 개성, 그러니까 일정한 정서, 경향, 관념, 집착의 덩어리를 자신이라고 생각하고 산다는 인식이 밑바탕에 깔려 있다. 이를 맥스는 ‘독특하게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고 표현한다. 그에 반해 진짜 개성의 소유자는 ‘독특하지 않은 어떤, 그러니까 무엇인 존재’다. 독특하지 않은, 무엇인 존재란 과연 어떤 존재일까?
우리는 어떻게 ‘어떤’ 존재가 되는가?
어느 날, 암에 걸려 요양원에서 지내던 맥스의 아내 애나가 갑자기 그의 어머니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다. 그 즈음 애나는 한쪽 손목에는 플라스틱 꼬리표를 차고 있었고, 다른 손목에는 손목시계처럼 생긴 장치를 차고 있었는데, 거기 있는 단추를 누르면 이미 오염된 그녀의 핏줄기로 정해진 양의 모르핀이 들어갔다. 요컨대 죽을 날이 임박했다는 뜻이다.
그 지경이 되어 애나는 면세점 담배와 셰리주 한 병을 선물로 들고 운하 옆 아파트에 있던 어머니의 집에 처음으로 찾아갔던 날을 회상했다. 그 다음날, 세 사람은 동물원에 갔다. 맥스의 표현에 따르면, 그의 엄마는 그냥 앉는 자세만으로도 자신의 분노를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 내내 불편하던 동물원 관람은 더이상 자신을 엄마라고 부르지 말라는 그녀의 선언으로 끝났다. 그러나……
그러나 우리가 떠나자 엄마는 울었다. 아파트의 열린 문 뒤에서 얼굴을 가릴 것을 찾아 뒤로 물러났다가 팔뚝을 들어 눈을 가렸다. 자신에게 분노하고 있었다. 엄마는 그해 겨울, 겨울답지 않게 따뜻하던 주중의 오후에 운하 옆 벤치에 앉은 채로 죽었다. 협심증,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비둘기들은 여전히 엄마가 길에 뿌려준 빵껍질에 정신이 팔려 있었고, 부랑자 한 명이 엄마 옆에 앉아 갈색 봉투에 든 병을 한 모금 하라고 권하다가 엄마가 죽은 것을 알았다.
“이상해.” 애나가 말했다. “여기 있다는 게, 그런 식으로, 그러다 없어진다는 게.”
애나는 한숨을 쉬더니 창밖의 나무들을 보았다. 애나는 매혹되었다. 그 나무들에. 밖으로 나가 나무들 사이에 서고 싶었다, 나뭇가지들 사이로 부는 바람 소리를 듣고 싶었다. 그러나 이제 나가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녀에게. “여기 살았다는 게.” 애나가 말했다.(197쪽)
이제 마찬가지의 길을 갈 것이기에 애나는 감쪽같이 그 존재가 사라져버린 시어머니를 생각하는 것이다. 애나가 맞다. 죽음이란 그런 것이다. 맥스가 “사실 그것이 그녀의 허벅지에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불룩 튀어나온 것, 디애스(De’Ath)라는 커다란 아기. 그것이 그녀 안에서 자라며, 자기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라고 쓴 것처럼 인간은 죽음(Death) 앞에서 결국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된다. 출생 환경과 교육을 통해 만들어진 가짜 개성, 그러니까 존 밴빌의 말을 인용하지면 겉치레, 자아기만, 덧없는 현현, 그릇된 출발과 더 그릇된 마무리 등등은 이 죽음이라는 불길 앞에서 눈송이처럼 녹아 내린다. 그렇기 때문에 죽기 직전, 애나의 몸짓은 이토록 애절하다.
애나는 숨을 헐떡거렸다, 부드럽게, 천천히. 마치 아직 몇 마일을 더 달려야 하는 달리기 선수가 잠시 쉬는 것 같았다. 그녀의 숨에서 온화하고 메마른 악취가 났다. 시든 꽃 냄새 같았다. 내가 이름을 불렀지만, 애나는 잠깐 눈을 감기만 했다. 귀찮다는 듯이, 이제 자기는 애나가 아니라는 것, 자기는 아무도 아니라는 것을 내가 알아야 한다는 듯이. (221쪽)
이제 자신은 애나가 아니라는 것, 그 무엇도 아니라는 것. 여기에 맞서 맥스는 언제까지나 애나는 애나라는 것, 그 무엇이어야만 한다는 것을 증명해야만 한다. 이것은 맥스가 고백하다시피 하나의 싸움이다. 진짜라고, 우리가 자력으로 생겨난 생물들이라고 느끼기 위한 싸움이다. 그리고 동시에 실패가 예정된 싸움이다. 애나가 말한 것과 같이 여기 무엇으로 존재했던 모든 것들은, 이상하기도 하지, 그런 식으로 없어진다. 맥스의 엄마가 그랬듯이 애나도, 그리고 결국에는 맥스 자신마저도. 어떤 인간도 이 싸움에서 이길 수는 없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죽을 때까지 죽은 자를 이고 갈 뿐이다. 그런 다음에는 누군가가 우리를 잠시 이고 가고, 그런 다음에는 또 누군가가 우리를 이고 갔던 자들을 이고 가고, 이렇게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먼 세대들로 이어져간다. 나는 애나를 기억하고, 우리 딸 클레어는 애나를 기억하고 나를 기억할 것이며, 그 뒤에는 클레어도 사라질 것이고, 클레어를 기억하지만 우리는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생겨날 것이다. 그것으로 우리는 최종적으로 소멸한다. (114쪽)
그런데 절망의 순간에 반전이 일어나면서 죽음으로서 깨끗이 소멸하는 존재 말고, 진짜, 자력으로 생겨난 존재에 대한 싸움이 이제부터 시작된다. 시작은 고주망태가 된 맥스가 멀리 바다의 빛을 보고 걷다가 물가에서 발을 헛디뎌 돌에 관자놀이를 찧으면서부터다. 썰물이 아니었다면, 또 그 즈음 그가 익사가 가장 부드러운 죽음이라고 떠든 것을 기억한 같은 숙소의 블런던 대령이 그를 찾아나서지 않았더라면, 그는 그대로 죽었을 것이다. 목숨을 구해준 대령은 그에게 스완 만년필을 준다. 그 만년필이 의미하는 바는, 아마도 이런 게 아닐까?
정말이지 기억하려는 노력만 충분히 기울이면 사람은 인생을 거의 다시 살 수도 있을 것 같다.(151쪽)
중층적으로 풍경을 구성하는 글쓰기
존 밴빌의 『바다』를 읽다가 영국의 일렉트로닉 프로젝트 팀인 시네마틱 오케스트라의 ‘To Build A Home’을 생각한 건 ‘I climbed the tree to see the world(나는 세상을 보려고 나무 위를 기어 올랐다.)’라는 가사 때문이다. 이 소설을 끝까지 읽는다면 왜 이 가사가 그토록 인상적인지 이해할 것이다. 주인공 맥스 역시 떡갈나무인가, 플라타너스인가, 어떤 나무를 기어오르기 때문이다. 패트릭 왓슨이 부르는 노래 가사와 그 부분의 소설 구절을 겹쳐 놓으면 다음과 같다.
우리가 씨를 심은 뜰에는 나만큼 나이 든 나무가 있다. 가지들은 초록색으로 기워지고 땅은 솟구쳐 그 무릎을 지났다. 등걸의 갈라진 틈을 잡고 나는 우듬지까지 기어 올랐다. 나는 세상을 보려고 나무 위를 기어 올랐다. 갑작스런 돌풍에 떨어질 뻔했으나 나는 꽉 안고 있었다. 네가 나를 꽉 안았듯이. 나는 꽉 안고 있었다. 네가 나를 꽉 안았듯이. 내가 지은 집이니까. 너를 위해. 나를 위해. 없어지기 전까지. 나에게서. 너에게서. 그리고 이제는 모든 게 먼지로 돌아갈 때……(‘To Build A Home’)
지평선에 도시의 지붕들이 보였고, 더 멀고 더 높은 곳에 얼룩 같은 창백한 바다에 아주 작은 은색 배가 신기루처럼 꼼짝도 않고 버티고 있었다. 새 한 마리가 잔가지에 내려앉더니 놀란 눈으로 나를 보고는 불쾌하다는 듯이 짹짹거리며 다시 잽싸게 날아가버렸다. 이제 클로이가 나를 잊었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이렇게 높이, 모든 것으로부터 이렇게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이 몹시 기뻐 조증 같은 환희에 사로잡혔다. 흐느끼는 소리가 들리기 전까지는 밑에 로즈가 있다는 것도 몰랐다.(212쪽)
몽환적인 피아노 선율과 패트릭 왓슨의 미풍처럼 부드러운 목소리는 가사 속의 이야기를 마치 환상 속의 한 장면처럼 만든다. 그게 바로 시네마틱 오케스트라의 음악들이 지닌 사운드스케이프의 힘이다. 그들은 노래를 들려주는 게 아니라 목소리와 악기의 음이 지닌 높이와 너비를 펼쳐 보여준다. 그러므로 우리가 듣는 것은 선율이 아니라 어떤 풍경 그 자체다. 그런데 이는 또 다른 인터뷰에서 존 밴빌이 한 말을 떠올리게 만든다.
“내가 말하는 스타일이란, 헨리 제임스가 말한 바로 그 스타일을 말한다. 우리는 축복받은 세계를 지나간다. 그 세계 안에서 우리는 스타일을 통하지 않고는 무엇도 알 수 없다. 그 세계 안에서 모든 것은 스타일을 통해서만 구원받는다.”
이제 만년필을 손에 쥔 그의 주인공 맥스는 스타일을 통해 죽음과 망각에서 구원받고자 한다. 그가 자신의 기억을 마치 풍경화를 그리듯 노트에 만년필로 써놓은 것이 바로 이 소설 『바다』다. 이 글쓰기는 자신이 사랑했던 사람들을 죽음과 망각에서 건져내는 것이 목적이다. 제일 먼저, 어린 시절에 알게 된 그레이스 집안이 있고, 그다음에는 애나가, 그리고 딸 클레어가 있다. 그들에 대한 기억을 세세하고도 입체적으로 짜놓을 때, 그들은 그동안 죽음과 망각의 아가리 속으로 빠져들어 흔적도 없이 사라진 다른 이들과 달리 잊혀지지 않을 수 있으리라.
바로 이 욕망이 그를 예술가로 만든다. 그는 마치 화가처럼 만년필로 풍경화를 그리려고 한다. 과거의 모든 일들이 그 풍경 속으로 밀려든다. 그가 글로 쓰는 풍경은 중층적이고 복잡하며, 그 자체가 하나의 스타일이 된다. 시네마틱 오케스트라가 사운드스케이프에 집중하듯이 맥스는 스타일에 집중한다. 거기에 연대순으로 적힌 일대기 같은 건 없다. 그런 건 장례식의 조사에나 어울릴 테니까. 대신에 어린 시절과 청년 시절과 노년 시절을 마음대로 오가는 맥스의 문장만이 오롯하게 남는다. 그리고 그 너머의 원경에서 바다가 넘실거린다. 쉽게 해독되지 않는 바다인데도 아름답다. 어쩐지 그렇다.
나는 완벽하게 투명한 물에 허리까지 담근 채 서 있었다. 바다 바닥에 늑골 무늬를 그리고 있는 모래가 또렷하게 보였다. 더불어 아주 작은 조개껍질과 게의 부러진 발톱 조각, 그리고 내 발도 보였다. 진열장 아래 전시된 표본처럼 핏기 없고 이질적인 내 발. 그곳에 서 있는데 갑자기, 아니, 갑자기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몰려오며 몸을 들썩이듯이 바다 전체가 솟아올랐다. 단순한 파도가 아니라, 깊은 곳으로부터 올라온 것처럼 보이는 부드럽게 굽이치는 너울이었다. 마치 저 밑에서 거대한 뭔가가 몸을 흔든 것 같았다. 나는 몸이 잠깐 들려 해변 쪽으로 약간 밀려갔지만, 다시 전처럼 두 발로 섰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실제로 아무런 일도 없었다. 중요한 일은 없었다. 그저 큰 세상이 또 한번 무관심하게 어깨를 으쓱한 것일 뿐이었다.(24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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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존 밴빌 저/정영목 역 | 문학동네
아내와 사별하고 슬픔을 달래기 위해 어린 시절 한때를 보낸 바닷가 마을로 돌아와 자신의 과거와 마주하게 된 미술사학자 맥스를 화자로 한 『바다』는, 자전적 경험과 함께 섬세하고도 냉철한 아름다움을 지닌 문체로 슬프고도 아름다운 생의 궤적을 그려낸 소설로, ‘현존하는 최고의 언어 마법사’로 불리는 밴빌의 명성을 입증한다.
채널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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