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할머니들이 매주 한 번씩 모여서 세미나를 한다고 했다. 세미나 주제가 뭐냐고 물으니 성경에 나오는 음식이란다. 성경과 음식? 내가 다소 의외라는 반응을 보이자 “성경에 먹는 얘기가 얼마나 많이 나오는데”라며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내 호기심을 자극했다. 생각해 보니 성경을 잘 몰라도 누구나 선악과나 최후의 만찬 정도는 막연히 떠올릴 수 있다. 다섯 개의 보리빵과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의 사람이 나눠 먹은 ‘오병이어’ 일화도 역시 유명하다. 뒤늦게 『맛있는 성경 이야기』라는 흥미로운 책도 알게 되었다.
플라우틸라 넬리Plautilla Nelli, <최후의 만찬>, 16세기: 잘 알려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이 아니라 플라우틸라 넬리의 <최후의 만찬>이다. 플라우틸라 넬리는 수녀이며 르네상스 시대 기록으로 남아있는 첫번째 여성 화가이다. 16세기 미술사가이며 예술가인 조르조 바사리가 <예술가의 삶>에서 언급했다.
음식을 중심으로 성경을 보듯이 문학 작품도 요리를 중심으로 읽으면 그 소재가 무궁무진하다. 인간이 살아있는 한 먹기를 멈출 수는 없으니까. 제인 오스틴 소설에는 식탁에서 이루어지는 대화가 많고 음식이 다채롭게 등장한다. 당시 영국의 차와 요리는 물론 상차림, 아침 식사의 변천 등을 알 수 있다.
배고픔을 해결하고 맛을 느끼기 위해 먹기도 하지만 인간의 ‘먹는 행위’에는 그 외의 많은 문제가 덕지덕지 붙어있다. 종교, 정치, 지리적 환경에 따라 형성된 규칙과 관습이 있다. 예를 들어 성경에도 음식에 대한 규율이 있다. 레위기 11장은 육지와 수중에 사는 ‘정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을 세세히 구별하고 식물과 물도 무엇이 부정한 것인지 알려준다. 무슬림은 ‘할랄’이라는 도축 방식이 있고 발굽이 갈라지지 않은 짐승은 부정한 짐승이라 하여 먹지 않는다. 유교 문화권인 한국에서는 죽은 사람을 위한 밥상에도 ‘법도’가 있어서 해마다 명절이면 성차별을 관습화하고 있다.
식탁은 때로 배움의 장소다. 예수의 식탁에도, 종교개혁자인 마틴 루터의 식탁에도 제자들이 붐비었다. 그들은 식탁에서 스승의 ‘말씀’을 들었다. (그 음식은 누가 만들었을까) 신화든 종교든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 흔히 ‘말씀’에는 금지가 포함되어 있다.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유일하게 금지한 것은 선악과를 ‘먹지 말 것’이었다. 이브는 이 금단의 열매를 먹었고, 아담에게 권했다. ‘먹지 않음’으로 순종을 해야 했는데 이브는 이를 어긴 셈이다.
단군신화의 웅녀는 삼칠일 동안 마늘과 쑥을 먹고 백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않는 극도의 고통을 감내하여 사람이 되었다. 이브는 먹지 말 것을 먹어서 벌을 받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났다면, 웅녀는 먹어야 할 것을 먹어서 사람이 된다. 고통을 인내하고 명령에 복종한 결과 ‘사람’이 되었으며 그 사람은 ‘여성’의 모습이다. 한국 여성의 근원이 인내심과 깊은 관련이 있다는 점은 해석하기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진다. 호랑이가 인내심이 없어서 포기했다기보다 이 규율에 순종하지 않았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호랑이는 포기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되기를 거부했을 수 있다.
이렇게 ‘말씀’을 지키는 ‘먹기’가 있다면, 폭력적 지배를 위한 ‘먹기’도 있다. 남성들은 여성과의 성’관계’를 은어로 ‘먹다’라고 한다. 여성을 ‘먹기’ 위해 일명 ‘강간 약물’을 여성에게 먹이는 남성들도 있다. 여기에 ‘관계’는 없다. 먹다, 따먹다라는 표현은 여성을 하나의 고깃덩어리로 정의한다. 반면 ‘먹는 여자’는 어떻게 소비되는가. JTBC의 <잘 먹는 소녀들>은 예쁘고 어린 먹는 여자에 대한 포르노적 소비다. 여성은 먹히거나, 먹임을 당한다.
먹거리를 기르고, 만들고, 먹고, 치우는 모든 문제가 정치적이다. 밥상 뒤엎는 사람, 밥숟가락을 먼저 들 수 있는 사람, 식사 중에도 계속 움직이며 시중드는 사람, 직사각형 식탁의 가장 ‘윗자리’에 앉는 사람, 준비된 음식을 앞에 두고 ‘설교’하는 사람, 제삿상의 도리를 입으로만 따지는 사람, 먹는 입과 노동하는 손의 성별에 따른 역할 구별 등, 식탁에는 권력이 오간다. 요즘은 ‘혼자 밥 먹는 남자들’에 대한 사회적 연민이 증가하고 있다. 그리고 정치인들은 선거철만 되면 시장에서 어묵을 물고 식상한 메시지를 보낸다.
이 칼럼의 제목에 ‘식탁’이 들어가지만 맛이나 요리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놓을 작정은 아니다. 그러기엔 요리 실력이 별 볼 일 없고, 음식에 관하여 특별한 지식도 없으며, 맛에 대한 수사를 과시할 능력도 딱히 없다. 요리 잡지나 관련 책을 즐겨보지만 조리법은 대충 넘긴다. 주로 언제 누구와 먹으면 좋을지 상상하면서 음식을 눈으로 먹는다. 무엇을, 어떻게, 왜, 누가, 어디에서, 언제 먹었는지에 대해, ‘먹기’를 둘러싼 인간의 이야기에 더 관심이 많다. 누군가가 해준 음식, 혹은 누군가와 함께 먹은 음식을 기억하는 이유는 단지 음식 맛 때문은 아니다. 결국은 사람을 기억한다. 때로는 장소이기도 하다. 또한 음식을 매개로 그때의 나를 떠올린다. 먹어서 내 몸에 쌓인 기억들, 혹은 역사 속에서, 예술 작품 속에서 간접적으로 만난 먹는 이야기를 꾸릴 예정이다.
주디 시카고Judy Chicago, <디너 파티>, 1979 : 한 면에 13명씩, 신화와 역사 속의 여성 인물 39명을 기리는 형식으로 한 자리에 모이게 한 작품이다. 물론 이 식탁도 ‘어디까지나 미국 여성의 시각’에서 만들어졌다.
정유미와 예수정이 출연하는 <그녀들의 방>. 좋아하는 영화 중 하나다. 커다란 집에 혼자 사는 석희(예수정)는 집을 비울 때 식탁 위에 음식을 정갈하게 차려놓고 문도 잠그지 않는다. 언젠가 집에 쓰러져있을 때 “배가 고파 담을 넘은 어느 부랑자” 덕분에 살았다고 했다. 그 후 석희는 항상 그가 먹을 수 있는 음식을 차려놓고, 침입을 허가받은 부랑자는 그의 집에 들어와 밥을 먹고 떠난다. 낯선 사람을 집에 들이면 무섭지 않냐는 언주(정유미)의 물음에 석희는 “나의 죽음이 방치된다는 것은 공포지요”라고 답한다. 나의 죽음이 홀로 방치되기를 원치 않는다면 잘 차린 한끼의 식사를 내 집에서 낯선 부랑자에게 얼마든지 제공할 수 있다는 그의 태도는 잊을 수 없다. 물론 영화니까.
식탁은 배고픔을 해소하는 장소이며 타인과의 교제 장소다. “언제 밥 한번 먹어요.”, 누구나 들어보았을 인사. 또 적어도 한 두 번은 누군가에게 이 말을 건넨 적이 있을 것이다. 밥 한번 먹자는 인사를 듣고 아직도 못 먹은 사이도 있다. 처음에는 진짜 먹자는 줄 알았는데 차차 ‘그냥 인사’인 줄 알게 되었다. 한자리에 앉아 밥을 먹는 인연은 참 귀하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나’와 함께 그 자리를 하고 싶지도 않다. 식탁을 지배하려는 사람과 밥을 먹는 일은 진짜 고역이다. 함께 밥을 먹는 행위는 다른 생명을 나눠 먹으며 서로가 연결되는 시간이다. 편하지 않은 사람과는 도무지 맛있게 음식을 먹을 수 없다. 또한 먹는다는 것은 살아있는 나와 죽은 타자와의 만남이다. 다른 대상을 죽이지 않고 나를 먹일 수 없다. 필연적으로 시체와 만난다.
설이라고 집에 몇 명 모여서 식사를 했다. 만두 빚고, 생선전과 파전을 부치고, 갖가지 예쁜 전채요리에 칵테일, 뱅쇼를 만들어 먹었다. “인간이라는 유기체는 실상 마음과 몸, 두뇌가 함께 결합되어 있고, 앞으로 백만 년이나 지나면 모를까 각각의 칸막이 속에 격리 수용된 것이 아니기에, 훌륭한 저녁 식사는 훌륭한 대화를 나누는데 대단히 중요한 요인이지요.” (버지니아 울프, 『자기만의 방』) 페미니즘은 관계의 학문이다. 살아가면서 점점 다짐하게 되는 삶의 태도는 ‘남의 입에 밥 넣기를 주저 말고, 내 입으로 죄짓지 말자’이다. ‘관계’를 위한 기본이다.
예수도 루터도 아닌 내 식탁에서 뭐 그리 근사한 ‘말씀’이 오가겠냐만, 화려하지도 고급스럽지도 않은, 때로 친환경적이거나 ‘웰빙’과도 거리가 먼, 때로는 분노와 위로가 오가는 ‘먹는 사람’의 이야기를 시작하려 한다. 이제 나의 식탁에 초대합니다.
이라영(예술사회학 연구자)
프랑스에서 예술사회학을 공부했다. 현재는 미국에 거주하며 예술과 정치에 대한 글쓰기를 이어가고 있다. 지은 책으로 『여자 사람, 여자』(전자책), 『환대받을 권리, 환대할 용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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