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공연계 주요 라인업을 얘기할 때 대부분 조심스레 언급했던 작품이 있었습니다. 바로 2014년 초연된 창작뮤지컬 <더 데빌>인데요. 괴테의 ‘파우스트’를 모티브로 이지나 연출이 직접 극을 쓴 이 작품은 세련된 음악과 스타일리시한 무대 연출이 더해져 뭔가 잔뜩 멋있기는 했지만 극 자체에 감동하기는 힘들었던 만큼 재연 소식에 기대와 걱정이 함께 묻어나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하지만 대대적인 수정작업을 거친 <더 데빌>은 추가된 캐릭터와 넘버, 무엇보다 막강한 배우들과 함께 다시 한번 특별한 무대를 예고하고 있는데요. 여주인공 그레첸으로 새롭게 합류한 리사 씨를 광화문의 한 카페에서 만나봤습니다.
“갑자기 너무 바빠져서 정신이 없어요. <더 데빌>이 개막하면 2주 정도는 공연이 겹쳐서 매일 무대에 오를 것 같아요.”
세종문화회관 인근에서 리사 씨를 만난 이유도 그녀가 뮤지컬 <영웅>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최근 신곡 ‘I’m Sorry’를 발표한 데다, 초연만큼이나 손이 많이 갈 <더 데빌>까지 정말 정신이 없을 것 같은데요.
“맞아요, <더 데빌>은 엄청난 에너지를 쏟아야 할 것 같더라고요. 그레첸이 존의 양심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잖아요. 하지만 극중에서는 여자 친구로 등장하니까 존이 망가질수록 달라지는 감정선을 보여줘야 하는데, 그동안 계속 수정 작업이 이뤄져서 그 감정선을 계산하는 게 어려웠어요. 어느 정도의 강도와 흐름으로 가져가야 관객들과 공감할 수 있는지.”
<더 데빌>, 뭔가 멋있기는 한데 친절하지는 않았던 작품으로 기억됩니다. 재연에서는 등장인물도 바뀌고 재정비가 이뤄진 모습인데요.
“저도 초연 때 관람하고 ‘이걸 누가 시키면 안 해야겠다!’ 생각했어요(웃음). 너무 셌고 못 알아들었거든요. 이미지로만 즐기고 왔던 것 같은데, 이번에는 많이 친절해졌어요. 제가 대본을 보고 바로 이해했으니까요. 일단 불편할 수 있는 장면들이 많이 수정됐고, X가 화이트와 블랙 두 명으로 나뉘어서 라인이 더 쉽게 보여요. 초연 때 그냥 멋있게 봤다면 이번에는 좀 더 극 안으로 들어가서 즐기실 수 있을 거예요.”
안 하겠다 생각했던 작품에 참여하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을까요(웃음)?
“이지나 선생님이 전화하셨어요, ‘네가 하면 안 되냐?’고(웃음). 저는 지나 선생님에 대한 신뢰가 있어서. 그 분은 어떻게 난리를 피워도 결과적으로는 세련되고 멋있는 작품을 만드시거든요. 그리고 지금 사회 분위기와 잘 맞는 작품이 아닐까. 사람에게는 모두 양면성도 있고, 나쁜 걸 알면서도 선택할 때가 있잖아요. <더 데빌>을 보면 우리 안에 잠재된 악에 대해, 자신에 대해 점검하실 수 있는 기회가 되지 않을까 싶어요.”
어떻게 보면 가장 표현하기 힘든 인물이 그레첸이 아닐까 합니다. 캐릭터는 어떻게 잡았나요?
“초연 때 차지연 씨 공연을 봤는데, 그 분은 그냥 서 있기만 해도 강렬하잖아요. 그래서 대사도 정말 많고, 노래도 18곡쯤 부르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노래도 4~5곡이고, 생각했던 것보다 대사도 많지 않더라고요. 그만큼 임팩트가 강했던 거겠죠. 그래서 초연 때 만들어진 그레첸을 참고하되 저로 시작하려고 했어요. 존과 그레첸은 서로 사랑하는 사이잖아요. 연인이, 내 목숨 같은 사람이 안 좋은 길로 걸어갈 때 나는 어떻게 할까, 내가 망가지더라도 어떻게든 막을 테니까 그런 마음을 표현해보고 싶어요.”
실제 성격은 그레첸과 비슷한가요?
“비슷한 면이 있는 것 같아요. 털털하면서도 소심하고 민감한 편이거든요. 생각이 너무 많아서 뭘 하게 되면 잠을 푹 못 자요. 이렇게 말하면 좀 그렇지만 타인을 너무 배려해서 제가 다치는 편이고요. 제가 예민한 만큼 X가 존에게 손을 뻗고 있을 때를 감지하고 민감하게 반응하는 모습을 어떻게 리얼하게 표현할까 생각하고 있어요. 존을 많이 배려하고 사랑하는 만큼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을 담고 싶어요.”
작품에 참여하는 배우들 입장에서는 음악이 무척 탐나는 작품이라는 말을 많이 들었습니다. 이번에도 특히 노래 잘 하는 분들만 모였네요.
“음악이 정말 좋아요, 그레첸 넘버도 좋고. 나중에 넘버로만 <더 데빌> 콘서트를 해도 멋있을 거예요. 그런데 굉장히 어렵기도 해요. 초연 때 마이클 리 오빠가, 그런 분이 아닌데, 노래 연습하다 영어로 욕했대요(웃음). 그냥 노래만 잘 불러서는 안 되고 수많은 감정을 멜로디로 표현한다는 게 어려운 것 같아요.”
지금껏 주로 대극장 공연에 참여하셨는데, 그러고 보니 대학로 입성은 처음인가요?
“뮤지컬 데뷔를 대학로에서 했죠, <밴디트>로. 대학로 무대는 이번이 두 번째인데 좀 겁이 나요. 중소극장에서는 카메라 연기처럼 디테일하게 연기해야 하고, 관객들과 가깝기 때문에 좀 더 ‘잘근잘근한’ 에너지를 이어가야 해서 더 어려울 것도 같아요. 물론 좋은 작품이 있다면 소극장 공연도 하고 싶어요, 새로운 배우들도 만날 수 있고. 이번에 대극장은 물론이고 중소극장에서 많이 활동하시는 배우들과 작업하니까 그분들에게서 나오는 에너지가 또 새롭고 강렬하더라고요.”
최근에 신곡도 발표하셨던데, 이제는 뮤지컬배우라는 타이틀도 편한가요?
“네, 편해요. 내년이면 뮤지컬 데뷔 10년이더라고요. 아직도 걸음마 중인 것 같은데. 그런데 가수 겸 뮤지컬배우라는 호칭이 지금은 가장 잘 맞는 것 같아요. 가수활동도 애쓰고 있거든요. 많이 달라요. 뮤지컬은 그 캐릭터로 변신을 해야 하는 거고, 가수는 그냥 나여야 해요. 가수는 내가 중심이고, 뮤지컬에서는 리사로 보이면 안 되잖아요. 예전에는 두 무대를 오가는 게 힘들었는데, 이제는 더 빨리 전환이 되는 것 같아요. 그래서 모두 열심히 해보려고 해요. 나중에 돌아봤을 때 ‘많은 걸 표현하며 열심히 살았구나’ 생각할 수 있게요.”
그럼 작품 선택할 때 대본과 음악 중에 좀 더 비중 있게 살펴보는 건 어떤 걸까요?
“음악이요. 뮤지컬이잖아요, 일단은 음악이 무조건 좋아야죠. 그런 다음 스토리가 얼마나 재밌는가, 내가 그 안에서 할 일이 매력적인가 살펴봐요.”
내년이 뮤지컬 데뷔 10년이라고 하셨는데, 여전히 도전하고 싶은 캐릭터가 있나요?
“그럼요, 저는 욕심이 많아요. 무대 위 여배우들의 모습을 보면 ‘나도 저거 할래!’ 이랬거든요. 이왕 배우로 활동하는데, 이 사람으로도 살아보고 싶고, 저 사람으로도 살아보고 싶잖아요. 우리나라 배우들은 좀 상징적이잖아요. 물론 음색이나 창법 때문에 한계가 있지만 청순, 섹시, 강함, 바보스러움 등의 이미지가 한정적이라서 제가 깨보고 싶었어요. 저 사람은 뭘 해도 다 할 수 있다는 믿음을 드리고 싶었어요. 지금은 내려놓음이 좀 생겨서 제가 연기를 했을 때 관객들이 더 공감하실 수 있는 캐릭터를 하는 게 서로 편하겠다 싶은데, 그래도 새로운 캐릭터가 있으면 다 해보고 싶어요(웃음).”
실제로는 청순, 섹시 중 어느 쪽이세요(웃음)?
“음, 저는 귀여운 편이에요(웃음). 예전에 <보니 앤 클라이드> 했을 때 많이 좋아해주셨거든요. 그래서 사랑스러운 캐릭터도 해보고 싶어요.”
<더 데빌>이 괴테의 ‘파우스트’를 모티브로 하고 있잖아요. 지금 이 순간, 영혼까지 팔지는 않더라도 그만큼 간절한 바람이 있다면요?
“어려운 질문이네요. 저를 포함해서 모든 사람들이 정말 건강했으면 좋겠어요. 건강해야 뭐든 할 수 있으니까. 그리고 사람들에게는 하루에도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나잖아요. 작게나마 위로할 수 있는 노래를 부르고 싶고, 그런 연기를 하고 싶어요. 저에게는 긍정적이고 밝은 에너지가 있는 것 같고, 그게 기쁜 일이든 슬픈 일이든 사람들에게 내가 가진 에너지와 사랑을 나눠드리고 싶거든요. 그러면서 제가 빛날 수 있다면 정말 좋고, 빛나지 않더라도 그 과정만으로도 감사하다고 생각해요.”
몇 시간 뒤에 있을 뮤지컬 <영웅> 공연을 위해 분장까지 다 한 상태에서 열심히 <더 데빌> 이야기를 하는 리사 씨의 모습은 꽤 인상적이었는데요. 생각했던 것보다 솔직하고 털털하고, 그러면서도 예민하고 정이 넘치는 모습에서 무대 위에서 그레첸으로 변신할 그녀가 무척이나 궁금해지기도 했습니다. 대대적인 보완 작업을 거쳐 2월 14일 대학로 드림아트센터 1관에서 새로운 무대를 열어갈 뮤지컬 <더 데빌>. 세련된 음악과 무대 연출 만큼 이번에는 매혹적인 스토리로도 관객들을 사로잡을 수 있을지 함께 지켜보시죠!
윤하정
"공연 보느라 영화 볼 시간이 없다.."는 공연 칼럼니스트, 문화전문기자. 저서로는 <지금 당신의 무대는 어디입니까?>, 공연 소개하는 여자 윤하정의 <공연을 보러 떠나는 유럽> , 공연 소개하는 여자 윤하정의 <축제를 즐기러 떠나는 유럽>, 공연 소개하는 여자 윤하정의 <예술이 좋아 떠나는 유럽> 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