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좋아한다. 준비하는 내내 설레고 실행하는 내내 즐거우며 추억하는 내내 흐뭇하다. 한 차례의 여행으로 오랫동안 행복해지는 것이다. 한 번에 한 나라씩, 보통 2주에서 3주간 여행한다. "2주? 역시 프리랜서야, 자유로운 영혼이네!" 매번 주위 사람들에게 듣는 소리다. 그렇게 긴 여행이라니 대단하다고들 한다. 그런가? 여행지에서 만나는 다양한 국적의 여행자들은 좀 다르게 반응한다. "겨우 2주? 휴가가 너무 짧아서 안됐다." 처음 이 말을 들었을 때 느꼈던 여러 가지 감정은 몇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내 안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한번 사는 인생, 우리는 좀 더 우리에게 잘해줘도 되지 않을까?
나에게 잘해줘야지. 그렇게 생각하니 내 한 끼 식사가 너무나 소중하다. 오늘의 기분을 좌지우지할 귀한 한 끼를 맛대가리 없는 음식 따위로 때울 수 없다. 재미없는 영화, 시덥지 않은 책 따위에 내 아까운 시간을 쓸 수 없지. 싫은 사람 입에서 나오는 기분 나쁜 소리를 억지로 참고 들어주기엔 나의 고막은 너무나 얇고 섬세하다. 마음에 들지 않는 물건들로 채우기엔 내 공간은 너무나 소중하다. 먹고 싶은 것도, 갖고 싶은 것도, 하고 싶은 것도, 가보고 싶은 곳도 많다.
한동안은 땅고에 푹 빠져 매일같이 밀롱가(땅고를 추는 곳)에 출근 도장을 찍었다. 춤을 추기에 편한 옷(뭐니 뭐니 해도 사방으로 쫙쫙 늘어나야 합니다)과 가늘고 높은 굽이 달린 전용 슈즈도 숱하게 사들였다. 필라테스와 웨이트 트레이닝, 이종격투기와 크로스핏 체육관을 넘나들며 신나게 뛰어다니던 때도 있었다. 우연히 한잔 얻어 마신 와인이 어쩜 이렇게 맛있을까 감탄하다 급기야 세상 와인들 다 궁금하다며 수업을 듣고 공부를 했다. 마시고 토하고 감동하기를 반복하다 결국 와인 책까지 썼다. 특정 언어에 꽂힌 적도 있고 머릿속이 온통 사진으로 가득했을 때도 있다. 그림 그리기와 책 읽기에도 몰두한다. 유효기간은 보통 2~3년 사이다. 그쯤 지나고 나면 아, 그동안 잘 놀았다! 하며 다음 취미로 옮겨가는 것이다. 깊이가 있고 없고, 그런 거 알게 뭐야. 하고 싶은 것, 아직 해보지 못한 것이 이렇게 많이 남아 있다. 그중에서 뭐가 나를 즐겁게 해줄까를 찾으려면 끊임없이 찔러봐야 한다.
세상 편하게 산다고? 겉으로 봐선 그럴지도. 실제론 마음을 꽤 굳게 먹어야 한다. 하고 싶은 걸 하기 위해선 마음의 근육량을 늘려놓을 필요가 있다. 뱃심과 허릿심, 그리고 탄탄한 하체가 받쳐줘야 꿋꿋하게 내 길을 갈 수 있다. 아니다 싶을 땐 가차 없이 홱 뒤돌아버릴 수도 있고. 멘탈을 보호하기 위한 굳은살도 필수다. 온 사방에서 사포같이 거친 태클이 휙휙 들어와도 무시할 수 있는 굳은살. 인터넷 커뮤니티엔 심심찮게 옷이며 가방, 외모에 관한 질문 글이 올라온다. 30대 후반인데 후드 티셔츠 입어도 될까요, 40대 중반인데 긴 머리는 이상할까요, 178cm에 75kg인데 뚱뚱한 건가요. 아니, 그걸 내가 어떻게 압니까? 니 마음대로 하세요. 다들 대체 누구의 허락을 구하는 것인가? 마음에 굳은살이 배기지 않은, 너무나 연약한 사람들.
물론 나이가 든다고 해서 고민이 줄어드는 건 아니다. 스무 살 나이엔 막연히 서른 두어 살쯤 되면 모든 게 다 정리되어 있을 거라 기대했다. 나에게 완벽히 맞는 최적의 인생 세팅이 완료되어 있을거라 생각한 것이다. 설마, 서른 넘어서까지 질풍노도의 시기가 계속되겠어? 하지만 그 나이가 되어보니 정리는 개뿔, 여전히 흔들린다. 마흔을 훅 넘겼지만 여전히 갈팡질팡한다. 21호인지 23호인지, 내 얼굴에 맞는 파운데이션 호수도 매번 헷갈린다. 이대로라면 쉰 살도 예순 살도 거기서 거기 아니겠어? 아마 나는 평생 서툴게, 평생 설레면서 살 것이다. 초연하고 고고하고 우아한 어른 따위는 개나 주고.
그렇다고 해서 나이를 헛먹었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나에게 어떤 것이 편안한지 하나씩 배워왔다. 옷장 문을 열면 새빨간 케이프와 핫핑크 털코트가 손을 흔든다. 연한 베이지 컬러, 일명 소 색깔의 트렌치코트는 나에게 어울리지 않는다는 걸 안다. 화려한 원색 옷을 차려입어야 내 기분이 확 좋아진다는 걸 안다. 그리고 무엇보다, 생각보다 남들은 나에게 관심이 없다는 걸 안다. 200명이 모여서 단체 사진을 찍은 후 그 콩알만 한 머리통들 가운데서 기어이 내 얼굴을 찾아내어 잘 안 나왔네, 다시 찍었으면 좋겠네 소리를 하며 내 걱정을 해 주는 건 나뿐이다. 남이 아니라.
원하는 건 행복, 결국 그거다. 인간은 미지의 행복 대신에 익숙한 불행을 선택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행복을 위해 도박할 준비가 되었는가? 거창한 것 같지만 실은 사소한 것들의 문제다. 악마의 겨드랑이 냄새 같은 고수풀을 입에 덥석 넣고 우물우물할 준비가 되었는가? 생소한 지역을 향해 과감히 날아갈 준비가 되었는가? 처음 보는 식당 앞에서 그놈의 '맛집'인지 아닌지 검색하지 않고 들어갈 배짱이 있는가?
그 도박의 결과로 무엇을 얻느냐고? 둘 중 하나다. 야, 요거 괜찮네 하며 스스로 만족해하거나 똥 밟았다며 투덜대거나. 똥일지라도 슬퍼하지 말자. 굳은살이 되어줄 것이다.
신예희(작가)
홍익대학교 산업디자인학과를 졸업한 후 현재까지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사진을 찍는 프리랜서의 길을 걷고 있다. 재미난 일, 궁금한 일만 골라서 하다가 문득 고개를 들어보니 30대 후반의 나이가 되어버렸다는 그녀는 자유로운 여행을 즐기는 탓에 혼자서 시각과 후각의 기쁨을 찾아 주구장창 배낭여행만 하는 중이다. 큼직한 카메라와 편한 신발, 그리고 무엇보다 튼튼한 위장 하나 믿고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다 보니 어느새 40회에 가까운 외국여행을 했다. 여전히 구순기에서 벗어나지 못해 처음 보는 음식, 궁금한 음식은 일단 입에 넣고 보는 습성을 지녔다. ISO 9000 인증급의 방향치로서 동병상련자들을 모아 월방연(월드 방향치 연합회)을 설립하는 것이 소박한 꿈.
저서로는 『까칠한 여우들이 찾아낸 맛집 54』(조선일보 생활미디어), 『결혼 전에 하지 않으면 정말 억울한 서른여섯 가지』(이가서), 『2만원으로 와인 즐기기』(조선일보 생활미디어), 『배고프면 화나는 그녀, 여행을 떠나다』(시그마북스), 『여행자의 밥』(이덴슬리벨) 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