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월을 보내며
바그너는 유태인들을 참혹하게 학살했던 히틀러가 가장 좋아하는 작곡가였기에 이스라엘에서 바그너 음악의 연주는 금기사항이었다.
글ㆍ사진 홍승찬(한국예술종합학교 예술경영학 교수)
2017.0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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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2년,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 존 바비롤리는 고국인 영국으로 돌아갔다. 유럽의 지식인과 예술가들이 앞다투어 미국으로 넘어오던 때 그는 오히려 전화의 소용돌이 한가운데로 뛰어들었다. 벌써 뱃길은 끊겼지만 처칠 수상의 특별 허가를 받아 전쟁 물자를 실은 수송선단에 몸을 실었다. 이미 바닷속은 독일의 잠수함 유보트가 진을 치고 있어 함께 출항했던 75척의 배 가운데 무사히 도착한 배는 32척뿐이었다.

 

돌아오자마자 그는 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번갈아 지휘하며 한 달 동안 무려 32번의 연주회를 열었다. 그리고는 런던보다 훨씬 더 심한 공습을 겪어야 했던 공업도시 맨체스터로 가서 할레 오케스트라의 상임 지휘자로 취임했다. 오케스트라는 이미 파산상태였고 단원들도 모두 뿔뿔이 흩어져 회생불능의 상태였지만 그는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곧바로 오디션을 열어 단원들을 뽑았고 날마다 연습을 시켜 얼마 되지 않아 다시 오케스트라를 살려놓았다. 그들이 닿을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찾아가서 연주회를 열었고, 심지어는 전투가 치열했던 벨기에 전선까지 날아가 장병들을 위문했다.

 

게다가 그는 단원들에게 음악에 재능이 있는 자녀가 있으면 데리고 오게 해서 그들을 직접 가르치기까지 했다. 오케스트라를 추슬러나가기도 버거운 처지에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에 시간과 정성을 쏟는다는 건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그렇게 시작된 할레 오케스트라와의 인연은 그가 죽을 때가지 27년이나 이어졌다. 그동안 그는 한 오케스트라뿐만 아니라 무너져 가던 영국의 음악계까지 다시 일으켜 세웠다. 한때 그가 가르쳤던 어린 음악가들은 이후 성장하여 영국뿐만 아니라 세계 유수의 오케스트라에 들어갔고 그 중에는 뉴욕 필의 악장 로드니 프렌드도 있었다.

 

지휘자 다니엘 바렌보임은 아르헨티나의 유태인 가정에서 태어나 열 살이 되던 해인 1952년에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건국한지 얼마 되지 않은 신생국 이스라엘로 이주했지만 곧바로 잘츠부르크의 모차르테움 음악원에 입학하기 위해 이스라엘을 떠나야 했다. 그때부터 줄곧 유럽과 미국을 오고 가는 삶을 살았지만 조국을 향한 마음만큼은 어느 누구보다 애틋했다. 이스라엘과 아랍 국가들 사이에 중동전쟁이 일어나자 다른 유태인 음악가들과 함께 포화 속의 조국으로 날아갔고, 언제 공습이 있을지 모르는 극도의 위험을 무릅쓰면서 날마다 연주회를 열어 동포들을 위로하였다.

 

거듭되는 전쟁을 모두 이긴 이스라엘은 그때마다 주변으로 영토를 넓혀 나갔고 먼저 살던 팔레스타인 사람들까지 핍박하여 몰아내기 시작했다. 그러자 누구보다 사랑하는 조국의 부당한 처사를 참지 못한 바렌보임은 이스라엘 정부에 탄원을 했고 끝내 그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팔레스타인 국적을 취득하였다. 그리고 1999년, 팔레스타인 출신의 문명 비평가 에드워드 사이드와 함께 팔레스타인을 비롯한 아랍 여러 나라의 젊은이들과 이스라엘 젊은이들로 구성된 서동시집 오케스트라를 창단했다.

 

『서동시집(West-Eastern Divan)』은 독일의 문호 괴테가 페르시아의 시인 하피즈의 시를 읽고 감명을 받아 집필한 시집의 이름이다. 괴테가 살던 시절 대부분의 서양 사람들은 동양의 문화가 서양의 그것보다 열등하다고 생각했고 괴테 또한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하피즈의 시를 접하고 생각이 바뀐 괴테는 동서양의 사상과 문학을 결합한 새로운 시를 짓고자 결심했고 그 결과 펴낸 시집이 “서동시집”이다. 오케스트라의 이름을 “서동시집”이라 한 것은 괴테가 시를 통해 이루고자 했던 것처럼 음악으로 다른 세계와 가치에 대한 편견을 극복하고 서로를 받아들여 하나가 되자는 뜻이었다.

 

2001년, 바렌보임은 베를린 슈타츠카펠레를 이끌고 이스라엘을 방문하였고 연주회의 앙코르곡으로 바그너의 음악을 연주하였다. 다른 나라에서라면 모를까 이스라엘에서 그것은 엄청난 사건이었다. 바그너는 유태인들을 참혹하게 학살했던 히틀러가 가장 좋아하는 작곡가였기에 이스라엘에서 바그너 음악의 연주는 금기사항이었다. 당연히 이스라엘 사람들은 물론 세계 각지의 유태인들로부터 거센 항의와 비난이 쏟아졌지만 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그들을 향해 특정 작곡가의 음악을 금지하는 것이야말로 폭력이라며 반박했다.

 

6월을 보내면서 다시 한 번 나라를 생각한다. 그리고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무엇인지를 짐작해 본다. 그래서 나는 또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긴 한숨이 새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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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승찬(한국예술종합학교 예술경영학 교수)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작곡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 음악학과 석사 학위를 받은 뒤 서양음악학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현재 한국예술종합학교 예술경영전공 교수, (사)한국문화관광연구원 이사로 일하고 있으며 음악평론가로도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