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브이아이피>의 촬영 현장: 박희순(왼)과 박훈정 감독
박훈정 감독은 연출자 이전 좋은 이야기꾼이다. 엇! 박훈정이 누구냐고? 곧 개봉하는 <브이아이피>(8월 24일)와 <대호>(2015) <신세계>(2013) 등을 연출한 감독이다. <혈투>(2010)로 연출자 데뷔하기 전 그는 류승완 감독의 <부당거래>와 김지운 감독의 <악마를 보았다>(이상 2010)의 시나리오를 썼고 자신이 연출한 모든 작품의 각본 또한 담당했다. <악마를 보았다>의 각본을 읽고 박훈정의 재능을 높이 산 최민식 배우가 영화화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움직인 건 유명하다.
박훈정이 다루는 이야기의 소재는 그리 새롭다고 할 수 없다. <신세계>만 하더라도 ‘한국의 <무간도>(2002)’라는 평가를 받았을 만큼 이 영화의 핵심 설정인 ‘언더커버’(신분을 위장하고 잠입한 요원)는 영화팬들에게 익숙한 장르 요소다. 신작 <브이아이피>는 또 어떤가, 여자만을 골라 잔혹하게 살해하는 또 한 편의 연쇄살인마 이야기다. 박훈정은 이와 비슷한 소재의 작품을 <악마를 보았다>에서 다룬 적이 있다. 그렇다면 무엇이 뻔한 설정의 이야기를 흥미롭게 만들까.
먼저 <브이아이피>의 줄거리부터 살펴보자. 연쇄 살인마를 어서 잡으라는 언론 보도에 부담감을 느낀 경찰이 자살하는 일이 벌어진다. 범인 검거가 급해진 경찰청은 폭력 수사로 징계 중인 채이도(김명민)를 복귀시킨다. 수사의 백지수표를 손에 쥔 채이도는 인정사정 볼 것 없는 수사로 유력한 용의자의 신원을 확보한다. 그의 이름은 김광일(이종석). 이제 검거는 시간 문제다. 하지만 문제가 발생한다. 국정원 요원 박재혁(장동건)이 김광일을 빼내려 한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김광일은 국정원과 CIA의 기획으로 북에서 남으로 온 ‘브이아이피 VIP’다!
미국을 배경으로 하는 할리우드의 장르가 한국으로 넘어오게 되면 틈이 생긴다. 한국이라는 특수성이다. 사이코패스 성향의 연쇄살인마인데 북한에서 남한으로 내려왔고 게다가 고위 간부의 아들이라 고급 정보까지 손에 쥔 상태다. 게다가 북한의 현재 정세라는 것이 어떤가. 김정일의 갑작스러운 사망 후 새파란(?) 김정은이 가장 높은 자리에 앉으면서 북한의 권력 서열은 족보가 무너지면서 어떤 세력이 실권을 장악하고 누가 숙청될지 가늠하기 힘든 시계 제로의 상황으로 변모했다.
아무리 사이코패스 연쇄살인마라고 하더라도 김광일은 국정원이나 CIA에게는 보험의 성격이 짙다. 채이도와 같은 일개 형사가 잡아가게 내버려 두기에 김광일이 지닌 잠재적 가치는 한반도의 상황을 고려할 때 그 쓸모가 상상 이상이다. 영화는 상상 이상의 그 지점까지 나아가지는 않지만, 김광일을 중심에 두고 그를 선점하려는 경찰 채이도와 국정원 요원 박재혁과 CIA 요원 폴 그레이(피터 스토메어)와 북한에서 그 때문에 숙청당한 전직 공작원 리대범(박희순) 등의 신경전과 추격전 속에 복잡한 정치적 이해관계를 풀어 넣는다.
영화 <브이아이피>의 한 장면
한국의 특수한 배경을 익숙한 장르로 풀어내는 것이 박훈정 감독의 특기다. 그러다 보니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면면은 어딘가 낯이 익다. 경찰이면서 법과 규칙 따위 무시하기 일쑤인 ‘폭력 경찰’ 채이도처럼 일차원적인 캐릭터가 있는가 하면 김광일처럼 미소년이면서 하는 짓은 악마와 다름없어 그 부조화 때문에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경우도 있다. 한때 국내에서 우라사와 나오키의 <몬스터>가 큰 인기를 끈 적이 있는데 김광일은 이 만화에 나오는 괴물 ‘요한’과 무척이나 닮았다.
그렇다고 이 영화가 <몬스터>의 요한처럼 악(惡)의 기원을 밝혀 나가며 깊이를 부여하는 건 아니지만, 이 장르가 연쇄살인마를 사이코패스로 ‘퉁치고’ 마는 경우와 비교할 때 북한 출신의 고위 간부 자제라는 레이어로 눈길을 붙들어 매는 것이 사실이다. 그로 인해 여자를 대상으로 벌이는 엽기적인 행각의 잔인성이 더욱 눈에 띄는 건 차치하고 (이와 같은 묘사 때문에 불편하실 분들이 꽤 많을 테다!) 박훈정의 작품 목록에서 <신세계>의 정청처럼 오랫동안 회자할 캐릭터가 될 공산이 크다.
장르영화의 특징은 새로움보다는 능숙함이다. 이미 존재하는 캐릭터와 사건 설정으로 관객의 눈과 귀를 붙들어 맬 이야기를 만드는 것이 장르를 업으로 삼는 창작자들의 의무다. 물론 하늘에서 어느 날 뚝 떨어진 것처럼 새로운 종류의 장르영화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예외적인 사례를 제쳐둔다면, 장르영화는 관객에게 익숙한 이야기 전개와 캐릭터와 볼거리 요소를 일종의 제도화를 통해 지속하면서 꾸준한 사랑을 받아왔다. 박훈정 감독은 바로 이에 대한 장르의 이해도가 높은 감독이다.
박훈정 감독의 영화가 충무로에서 꾸준히 만들어지는 이유는 그의 연출이 특출해서가 아니다. 이야기를 무리 없이 전달하는 쪽이지 개성 있는 이미지로 이야기에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는 연출과는 거리가 멀다. 그런데도 박훈정의 영화에 많은 이들이 관심을 두는 이유는 혹할 만한 설정과 눈이 가는 캐릭터와 한국이라는 특수한 배경과 이 모든 걸 능수능란하게 이어붙일 줄 아는 이야기 구축 능력에 있다. <브이아이피>는 박훈정의 이야기꾼의 면모가 여실히 드러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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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남웅(영화평론가)
영화에 대해 글을 쓰고 말을 한다. 요즘에는 동생 허남준이 거기에 대해 그림도 그려준다. 영화를 영화에만 머물게 하지 않으려고 다양한 시선으로 접근하기 위해 노력 중이다.
iuiu22
2017.08.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