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1시,
이탈리아의 명(名)바리톤 레나토 부르손의 풍성한 저음이
오페라 리골레토의 <사랑의 묘약>을 노래하기 시작한다.
개가 낮게 그르릉거리나 싶더니
어디선가 삐걱대는 소리가 난다.
조금씩 들리던 소리가
점차 규칙적으로 나더니 점점 더 빨라진다.
성악가의 아리아는 클라이맥스로 향하고
옆방의 소리도 클라이맥스로 향한다.
탄성. 나지막한 대화 소리 잠깐. 그리고 욕실로 향하는 발소리.
이사 온 첫날, 페루식 가정식을 대접해줬던 친절한 대붓 꽁지 에스키엘의 방에서 셔츠 한 장만 걸친 초콜릿색 여인이 나왔다. 뒤이어 반라 상태로 등장한 에스키엘. 나를 보고 놀라지도 않고 싱긋 웃으며 “헤이!” 하고선 쿨하게 여자를 따라 욕실로 직행했다. 그의 방엔 여자가 데려온 개 한 마리만이 턱을 괴고 심드렁하게 엎드려 있었다.
에스키엘.
구릿빛 피부에 치렁치렁 흑단 같은 머리.
일어나자마자 오페라를 들으며
낭만적인 유화를 그리러 나갔다가
매일 밤 다른 여자와 들어오는
천하의 사랑꾼.
사람은 참 좋은데. 묵직한 중저음 보이스만큼 진중한 성격에 깔끔한 매너, 상대에 대한 배려까지 다 갖췄는데. 사람이 너무 좋은 나머지 매일같이 등장 인물이 바뀌는 에로무비를 찍으니 옆방 세입자로서 애로사항이 이만저만한 게 아니었다. 천장은 높아서 공명도 잘 되는 집에 벽은 또 왜 그렇게 종잇장처럼 얇은지. 어쩌다 한 번이면 그러려니 할 텐데 거의 밤마다 잠을 재우질 않으니 다음 날 학교를 가야 하는 내겐 웃지 못할 고문거리가 되었다. 그렇다고 타인의 사생활에 대해 뭐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셰어하우스의 또 다른 매력(?)을 여실히 체험했던 집이었다.
새벽 4시, 또다시 울려 퍼지는 오페라. 어느덧 나는, 덩달아 잠 못 이루는 슬픈 파블로프의 개(?)가 되어 있었다….
건물 안쪽 뜰에선 드릴로 바닥을 부수는 공사가 한 달째 계속되고 있었다. 1층에 커다란 레스토랑을 개축하는 공사였다. 처음 이사 왔을 때 집 주인 이반은 일언반구 얘기해주지 않았었다. 지적을 하자 그제야 곧 끝날 거라고 얼버무리는데 딱 봐도 석 달은 끌 공사였다. 처음엔 잘 몰랐는데 살다 보니 집 상태가 심각했다. 아틀리에처럼 쓰면서 청소를 거의 하지 않아 먼지가 수북한 데다 축축한 매트리스에선 베드버그도 들끓는 것 같았다. 다 치워 놓을 테니 걱정 말라던 약속도 공염불이었다.
바르셀로나의 한여름은 찜통처럼 뜨거운데, 공사판 먼지와 소음을 피해 창문을 닫자니 쪄서 죽을 것 같았고 창문을 열었더니 이번엔 모기가 득실득실 꼬였다.
낮엔 드릴 소리 때문에 노이로제,
밤엔 벽 너머 아리아에 트라우마.
내 사연을 듣고 데비가 깔깔대며 문자를 보내왔다.
“Out of the frying pan and into the fire.”
“프라이팬에서 뛰쳐나가더니 아예 불구덩이로 떨어졌네?ㅋㅋ”
밤낮으로 공사 중인 바르셀로나의 여름은
점점 더 후끈 달아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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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원 피디의 누구나 한번쯤 스페인이지원 저 | 중앙북스(books)
일반 관광객이 아닌 학생이자 생활자의 신분으로 낯설고 매력적인 스페인의 여러 도시를 포함해 인근 나라의 도시들을 날카로운 피디의 눈과 낭만적 가슴으로 때론 담백하게, 때론 치열하게 탐험했다.
이지원(PD)
예능 피디, 작사가, 작가. 지금껏 60개국 이상을 여행했다. 서울대학교 화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언론정보학과를 거쳐 2000년 SBS 예능국 피디로 입사했다. <유재석의 진실게임> <이효리의 체인지> <김정은의 초콜릿> <하하몽쇼> <정글의 법칙> <도시의 법칙> 등 수많은 인기 예능 프로그램을 기획, 연출했다. 다비치, 앤씨아 등의 작사가로도 활동했으며, 저서로 『이 PD의 뮤지컬 쇼쇼쇼』 등이 있다. facebook,instagram ID:@ez1p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