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책방 (왼쪽부터 김이설, 조남주, 최정화)
올해 봄 정민교 다산책방 편집자는 서점을 돌다 페미니즘 책들에 눈을 돌렸다. 2년 전부터 쏟아지고 있는 페미니즘 도서 중 소설은 많지 않았다. 페미니즘을 이야기하는 소설은 있지만, 페미니즘을 전면에 내세워 기획된 작품은 없었다. 서둘러 평소 눈여겨보던 국내 여성 소설가들에게 청탁 메일을 보냈다. 7명의 소설가들은 청탁을 받고 뜸을 들이지 않았다. 대부분 곧장 수락했다. 이렇게 나온 책이 페미니즘 소설집 『현남 오빠에게』다.
지난 11월 13일, 서울 마포구 합정동에 위치한 다산북카페에서 『현남 오빠에게』 출간 기념 기자간담회가 열렸다. 조남주, 김이설, 최정화 작가가 참석했다. 세 작가는 이번 소설집에 각각 「현남 오빠에게」, 「경년(更年)」, 「모든 것을 제자리에」를 썼다. 「현남 오빠에게」는 가스라이팅(gaslighting)을 소재로 한 10년간 사귄 남자친구 ‘현남’에게 프러포즈를 편지로 거절하는 내용이다. 「경년(更年)」은 갱년기에 접어든 한 여성이 또래 여자아이를 ‘엔조이’ 대상으로 여기는 열다섯 살 아들을 보며 겪는 이야기를 그렸다. 「모든 것을 제자리에」는 ‘붕괴된 건물 촬영기사’라는 낯선 직업을 가진 한 여성의 강박과 자기검열을 다뤘다.
우리는 이렇게 손잡고 있습니다
작품의 시작이 궁금하다.
김이설: 40대 여성이 아이를 키우며 겪는 여성의 목소리를 담아보고 싶었다. 늙음으로 가는 갱년기에 접어들어 한창 크고 있는 사춘기 자녀를 바라보는 시선, 이 시선이 어때야 하는지 고민해보고 싶었다.
조남주: 예전에 시사교양 프로그램 작가로 일할 때, 가정폭력 피해자를 만난 적이 있었다. 딸이 중학생인 분이었는데, 결혼 초기부터 딸이 중학생이 될 때까지 폭력을 견디고 있었다. 왜 이렇게 오랫동안 이 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했을까, 의문을 가진 적이 있다. 그 이후에는 이 의문을 가졌던 내 자신에 대한 의문이 생겼고 오랫동안 이 질문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자신의 피해 상황을 인지하지 못하는 상황, 알더라도 쉽게 빠져나가지 못하는 현실을 생각했다. 오로지 책임을 개인에게만 전가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으로 「현남 오빠에게」를 썼다.
최정화: 여성으로서 살면서 겪는 모순과 괴로움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이번 작품을 쓰면서 부담감이 컸다. 내가 어떤 것을 말할 수 있을까, 고민이 많았다. 내가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갖고 있는 여성혐오, 사회에서 여성에게 가하는 압박 등을 담아보고 싶었다. 우리도 각자 자신에게 갖고 있는 모순이 많지 않나? 스스로를 좀 더 냉철하게 바라보면 어떨까 싶었다.
국내에서 페미니즘 소설로 기획된 것은 처음이다. 부담감이 컸을 텐데.
김이설: 사실 작가 입장에서는 부담스러운 주제일 수 있다. 독자들에게는 골라 읽는 재미가 있을지 모르지만, 작가는 주제에 합당한 소설을 써야했으니 어려웠다. 얼마 전, 조남주, 최정화 작가님의 작품을 읽었다.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이것이 비단 여자들만의 이야기가 아닐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 책이 페미니즘 소설이지만 문학의 한 편린, 문학을 향유하는 즐거움도 수반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최정화: 어렵겠다는 생각도 있었지만 쓰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보통 글을 쓰면, 그 당시 내가 갖고 있는 생각들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렇기 때문에 걱정스러운 마음도 있었지만, 일곱 명의 작가가 독자에게 말하는 어조는 “우리 이렇게 하자”가 아니다. “우리, 지금 이렇지 않냐요”라는 질문이다.
퇴고한 소회가 궁금하다.
조남주: 소설은 빨리 쓴 편인데, 혹시 다른 작가 분과 소재가 겹치지 않을까 걱정됐다. 편집자 분께 서로 조율해야 하지 않냐고 물었더니 자유롭게 쓰라고 했다. 그런데 모든 작가 분의 작품을 읽고 나니 하나도 겹치는 부분이 없었다. 편집자의 기획력에 감탄했다. 김이설 작가님의 「경년(更年)」을 읽으면서, 남자 아이를 대하는 사회의 편견, 여자 아이를 대하는 사회의 편견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었다. 딸만 키우는 엄마라서 모르는 것들, 생각할 수 없었던 지점을 알게 되어 좋았다. 최정화 작가님의 「모든 것을 제자리에」를 읽으면서는 내 안의 여성성, 남성성을 되돌아보게 됐다. “나는 페미니스트”라고 말할 때, 완벽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있다. 내가 갖고 있는 고민을 소설을 통해 읽을 수 있었다.
김이설: 초등학교 3학년 6학년, 두 딸을 키우고 있다. 아이를 키우는 지점에서, 내 생활에서 페미니즘을 어떻게 이야기해야 하는지를 생각하면서 썼다. 독자들이 이 소설집을 어떻게 읽을지 몹시 떨리면서 또 궁금하다. 우리는 작품을 쓰면서 “이렇게 합시다” 같은 전사적인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 다만 “우리는 이렇게 손잡고 있습니다”라고 말하고 싶었다. 사회를 읽는 우리의 목소리가 누군가에게는 불쾌할 수도 있지만, 말하지 않으면 전달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동안 좋은 페미니즘 책들이 많이 나왔지만, 접근이 아주 쉬운 책은 많지 않았다. 우리 소설을 통해 좀 더 쉽게, 대한민국 여성으로 어떤 것들을 겪고 있는지를 함께 느끼고 말하면 좋겠다.
최정화 : 두 작가님의 작품을 읽으면서 어떤 면에서는 내 소설과 다르다고 생각했다. 나 역시 현실을 리얼하게 담아내야 할지,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봐야 할지를 오랫동안 고민했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은 어쩌면 너무 부조리극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소설집을 읽으면서 내 자신이 너무 이상하게 낯설게 느껴졌다.
올해 『82년생 김지영』이 페미니즘 소설로 이례적인 베스트셀러가 됐다. 남자 독자들의 이야기를 많이 들을 수 있었는지 궁금하다.
조남주: 종종 남자 독자 분들을 만나 이야기해보면, 여성의 이야기들을 충분히 듣고 싶었는데 기회가 너무 부족했던 게 아닐까 싶었다. 나 역시 딸아이를 키우다 보니 페미니즘을 어떻게 이야기하고 알려줘야 할까, 생각해본다. 요즘 아이들은 일찍부터 유튜브 등을 통해 여성혐오적인 콘텐츠를 접한다. 이런 것들을 피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아이들이 직접 대면하는 어른들이 성숙한 자세를 갖는 것이 가장 중요한 문제인 것 같다. 아이들의 롤 모델이 될 수 있는 어른들에 대한 이야기도 소설로 만나면 좋지 않을까 생각한다.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최정화 : 독자 분들이 정말 많이 읽어주면 좋겠다. 쓰고 나니, 이 마음이 간절해졌다. 앞으로 작품을 쓸 때, ‘이 사회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역할이 뭘까’라는 질문을 갖고 쓰고 싶다.
조남주: ‘페미니즘 소설’이라고 찍힌 책이 나왔을 때, 얼마나 많은 악플이 달릴까. 생각했다. 아주 편하지 않은 마음으로 소설을 썼다. 동시에 어디에선가 불편함을 감수하고 다가오는 마감에 마음 졸이면서 밤새고 있을 여섯 명의 작가님들을 떠올렸다. 나는 여기 혼자 있지만 같은 배를 탄 작가들이 있어 마음이 든든했다.
김이설: “남자들과 싸우자”는 의미로 받아들이지 않으시면 좋겠다. 서로의 이름을 가만히 쓰다듬는 시간이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런 기획을 할 수밖에 없는 2017년 한국 사회를 지켜보며, 흔쾌히 할 수 밖에 없는 작가들을 생각했다. 이 책의 기획의도가 많은 독자들에게 잘 전달됐으면 좋겠다.
-
현남 오빠에게구병모, 김이설, 김성중, 조남주, 손보미 저 외 2명
성차별이 만연한 이 시대 명실공히 뜨거운 현장 보고서가 되어준 『82년생 김지영』의 조남주 작가, 그리고 현재 활발하게 활동 중인 최은영, 김이설, 최정화, 손보미, 구병모, 김성중 등 여성 작가 7인이 함께했다.
엄지혜
eumji01@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