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회는 꽤 오랫동안 서양문화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 이유는 아마 구한말의 혼란과 일제강점기, 전쟁을 연이어 겪으며 생겨난 우리의 결핍 때문이었다. 그 시절에는 클래식 음악이 고급문화라는 이미지를 확고히 가지고 있었다. 서양이 우리보다 앞서 있으므로 이를 배워야 한다는 생각이 그 세대 안에서 포괄적인 동의를 얻고 있었다. 많은 젊은이들이 유학을 떠났고 다시 돌아온 뒤 사회의 리더가 되었다. 그러면서 클래식 음악 역시 풍성해졌다.
사람들은 암묵적으로 서양 음악의 전통인 클래식을 존중했으므로 이런 생각이 자연스럽게 퍼져 있었다. 그것은 아무리 젊었을 때 사이먼&가펑클이나 에릭 클랩튼, 조용필을 듣던 사람이라도 좀 더 나이가 들고 호흡과 맥박에 여유가 생기면 클래식에도 자연스럽게 귀가 열릴 거라는 기대였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 귀가 열리는 문제라기보다는 이미 클래식에 마음이 열려 있을 때 가능한 일이었다.
우리의 결핍은 한강의 기적을 일군 우리의 자랑스러운 아버지, 어머니들의 땀과 열정으로 어느 정도 채워졌다. ‘잘 살아보세’라는 노력은 서구권이 수백여 년에 걸쳐 발전시켜온 자본주의를 불과 한 두 세대 만에 따라잡으려는 엄청난 속도전이었다. 그것은 실로 놀라운 성과였지만, 그 때문에 균형을 잡기란 사실상 어려웠다. 경제적인 면에서는 이미 과거의 결핍을 찾아보기 어려워졌다. 하지만 문화면에서는 그 같은 결핍이 채워졌다고 보기 어려웠다. 한 사회의 기저에 놓인 문화는 사실 오랜 시간을 통해 가꾸어져 간다. 때문에 우리가 기울인 30여년의 노력은 새로운 문화의 초석을 놓은 것일 뿐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우리가 짧은 시간에 일군 경제적 성공이 문화의 빈자리까지 채운 것처럼 여기기 시작했다. 빠른 속도로 서양 문화에 대한 경외감이 사라지고 우리 문화에 대한 자존감이 회복되기 시작했다. 물론 그것 자체는 바람직한 일이다. 그것이 우리 문화의 내실을 튼튼히 하려는 노력을 겸비한 근거 있는 자신감이라면 환영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그것이 그저 잠시 간의 경제적 번영에 편승한 ‘겉멋’이라면 이는 마땅히 경계해야 할 일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현 상태는 어떠한가? 우리는 우리의 내실을 튼튼히 하고 있는가?
이 질문을 가지고 한류라는 현상을 바라보면 우리는 몇 가지 건설적이고도 비판적인 방향성을 고민해 볼 수 있다. 한류는 한국 대중문화의 가장 큰 성과로 지목되는 성과로서 공교육과 학계가 고전하고 있는 동안 선전을 거듭했다. 문화 컨텐츠로서 한류는 이미 세계무대에서 그 경쟁력을 확인하고 있다. 그런데 이 현상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하는 문제를 우리는 깊이 있게 생각해 보아야 한다. 한류를 이끄는 힘은 스타가 되고 싶은 많은 아이들의 열정과 체계적이고 차별화된 공연 및 스타 마케팅 등을 그 동력으로 한다. 하지만 한류 열풍에는 문화를 양성하기 위한 고민은 빠져 있다. 즉 문화의 밑바탕을 튼튼히 하여 자생적인 컨텐츠를 지속적으로 공급해낼 수 있는 저력은 아직 시험대에 올라 있지 않은 것이다. 한류의 양지에서 반짝이는 많은 스타들은 문화생산자로서의 짧은 생명을 다 끝낸 뒤에 어디로 갈 것인가. 그들의 노력이 문화 저변을 이루는 데 쓰이는 것이 아니라 그저 한낱 문화 소비재로 소모되고 휘발된다면? 또 그들처럼 빛을 보지 못한 채 음지에 있는 숱하게 많은 이들은 그저 실패자일 뿐인가. 그들이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무대와 장소와 역할을 지속적으로 개발하는 것이 우리 사회의 몫은 아닐까? 비슷하게 이런 질문도 계속 나와야 한다. K-Pop이라는 장르가 다루는 내용 또한 좀 더 다채로워져야 하지 않을까? 세계화와 자유주의를 대변하는 내용들을 벗어나 한국적인 컨텐츠가 나와야 하지 않을까? 젊은이만을 위한 문화가 아니라 좀 더 다양한 연령층을 포괄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등등 이 같은 논의들은 본질적으로 분야와 상관없이 같은 내용을 보여준다. 한류냐 국악이냐 클래식이냐의 문제가 아니라 좀 더 오래가는 문화를 가꾸고 있는가. 베토벤 식으로 말하자면 늘 ‘전체를 눈앞에 두고’ 일하고 있느냐의 문제인 것이다.
다시 클래식계로 돌아와서 논의를 계속해 보자. 앞서 제기한 우리는 우리의 내실을 튼튼히 하고 있는가? 라는 질문은 물론 흑백논리로 단순하게 대답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여전히 많은 예술가와 학자들이 현실적으로 넉넉한 보상을 받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외롭고 험난한 예술과 학문의 도정에서 의미 있는 성과들아 쌓아져가고 있다. 필자의 대학 시절에 나오지 않았던 숱한 작품과 학술서적들이 속속 출판되고 있고, 세계 수준의 연주자들과 작가들이 다양한 분야에서 나오고 있다. 그러나 이 같은 개인적 노력과 성취가 곧 그 사회 자체의 역량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게 우리가 되돌아보아야 할 현실이다.
김연아와 박태환이 존재한다고 해서 한국이 피겨 강국이나 수영 강국은 아니다. 그러나 기보배나 박성현이 없이도 한국은 양궁 강국이다. 전자와 달리 후자는 자생적인 발굴, 육성 시스템과 경쟁력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예술계는 아직 양궁의 모델이 아니라 개인 역량에 의존하는 피겨나 수영의 모습을 하고 있지 않은가? 우리의 음악 교육 역시 재능 있는 개인이나 능력 있는 몇몇 지도자의 역량에 기대 지금까지 달려온 것은 아닌가?
인간의 가치는 점수로 매기는 것이 아니다
2009년 교육과정 때 결정되어 2011~13년까지 시행되다 폐지된 집중이수제는 문화와 교육을 바라보는 정책입안자들의 시각이 백년대계의 그것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음을 확인시켜 주었다. 집중이수제는 수업의 집중도를 높이기 위해 특정 한 과목의 수업을 각 초?중?고 학기 중 특정 학기나 학년에 집중적으로 학습하는 제도였다. 각 학교가 사회군(사회ㆍ도덕), 과학군(과학ㆍ기술ㆍ가정), 예술군(미술ㆍ음악)과 같이 유사한 과목끼리 교과군을 묶어 각 과목별 수업시간만 충족시키면 수업 시점은 자율적으로 편성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것이 핵심이다. 하지만 미술과 음악을 하나의 교과군으로 묶는다는 발상 자체가 넌센스이고, 꾸준히 접하고 친해져야 그 진가를 알 수 있는 예술 분야를 한꺼번에 몰아서 가르칠 수 있다는 생각 또한 상식과 거리가 멀다. 결국 교육부는 학생들의 전인적인 인격 형성을 도모하고 자살을 방지하자는 취지에서 예술 교과를 집중이수제에서 배제했지만 곧 시행상의 혼란과 학교 현실과의 괴리 때문에 폐지 수순을 밟았다. 하지만 이 같은 잘못된 접근으로 인해 이 시기 초등, 중등학교를 다닌 학생들은 음악의 아름다움을 만날 첫 경험의 시간을 놓쳐 버렸다. 다시 말하면 이는 클래식 음악의 가치를 각인시킬 기회를 놓쳐 버린 것을 뜻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제도의 성패를 떠나 이 문제는 우리가 심각하게 다루어야 할 문제이다. 어린이들이 예술을 접하지 않는다. 여기서 집중이수제와 같은 실패한 제도 자체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이면에 흐르는 암묵적 메시지다. 그들도 이미 알고 있다. 예술 교과는 중요하지 않고 국영수가 더욱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다시 말해 그들은 국영수가 아닌 것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어른들의 태도를 보고 빠르게 학습한다. 뒤늦게 아무리 예술이 중요하다고 말해도 그것은 어른들의 체면과 품위를 위해 그냥 하는 말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때문에 집중이수제의 결과는(그저 제도의 문제점을 넘어서 사람들의 사고방식의 결과를 봤을 때)언제나 집중해야 하는 과목(국영수)과 몰아서 해치우고 잊어버려도 되는 과목(음악 등)으로 갈린다. 어른들의 본보기를 따라 어린이들은 현실적인 것이 중요하지 현실 너머의 것이 뭐가 중요하다는 건지 이해할 수 없게 된다. 우리의 어린이들이 그런 어른이 되면 사회는 점점 먹고 사는 문제에만 메이게 되고, 그로서 인간다운 가치의 향상을 점점 도외시하게 된다.
예술은 가장 사회적인 존재이다
만일 그렇다면 이전 시대에 존재했던 믿음은 이미 잘못된 신화로 전락한 것인지도 모른다. 나이가 들면 자연스럽게 클래식이 좋아질 것이라는 근거 없는 믿음. 이 믿음은 클래식에 대한 열린 마음이 있어야 가능하다. 하지만 현재 우리의 클래식계는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왜 그것이 꼭 필요하고 중요한지를 이해시키려는 노력을 등한시해 왔다. 어린이들이 선망할 만한 요소를 찾아내는 데도 충분한 공을 들이지 못했다. 그런 상황에서 이 덜 중요한 과목들은 점점 삶의 바깥으로 밀려난다. 아이들이 내몰릴 그 때 가장 큰 역할을 해 주어야 할 예술이 그저 겉돌고 있는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더 깊이 있고 오래 가는 문화력을 기르는 일이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이제 클래식이 들리는 나이 같은 표현은 수정되어야 한다. 클래식이 들리는 나이는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이 같은 잘못된 생각 때문에 우리는 그동안 클래식이 들리는 나이를 기다리느라 클래식을 듣는 아이들을 길러내지 못한 것이다. 예술의 가치를 가르치고 즐기는 법을 알려주어야 한다. 그래야 우리 사회가 건강해진다.
우리나라와 달리 클래식 강국 독일의 음악초등교육은 학생들이 클래식을 듣고 감상하고 즐길 수 있는 사람으로 커 나가는 것에 중점을 두고 있다. 가치를 알아볼 수 있도록 시각과 기준을 만들어주는 것이다. 그들은 녹음된 음악만을 들려주는 것이 아니다. 실제 연주자들을 학교로 초청하여 악기가 무엇인지 어떤 원리로 소리가 나는지 연주자들은 어떤 방법으로 연주하는지 등등 현실감 넘치는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이 같은 교육은 우선 아직 추상적이고 개념적 사고에 익숙하지 못한 아이들의 발달단계(구체적 조작기)와 잘 맞아 떨어진다. 아이들은 이 활동이 가진 매력을 온 몸으로 느끼고 이해할 수 있다. 그 효과란 녹음과는 비교할 수 없다.
실례로 독일의 각 도시의 시향 중에는 그 도시의 초등학교와 특수학교(장애아동)들과 연계하여 한 번에 두, 세 반씩 오케스트라 연습실에 학생들을 초청하는 프로그램을 시행하고 있다. 이를테면 현악 4중주로 모차르트ㆍ하이든ㆍ바흐, 때로는 캐리비안의 해적 같은 친숙한 곡들을 들려주며 곡 사이사이에 악기들을 소개하고 어떻게 줄이 울려 아름다운 소리가 나는지 등등 악기의 원리를 가까이에서 설명하고 더 나아가 학생들이 직접 소리를 내도록 만들며 캐스터네츠나 템버린을 나누어 주어 함께 박자를 맞추어 연주하게 한다.
특히 시각장애학생들을 위하여 특별 콘서트를 매 시즌 연주한다든지 두엣이나 트리오를 결성해서 일반학교의 음악 수업시간에 찾아가 연주하며 학생들에게 악기와 클래식음악을 소개하는 활동들은 어린 학생들에게 큰 호응을 얻어내고 있다. 또한 시립교향악단들의 무대연습에 초등학교 학생들을 초청해 클래식음악을 들으러 연주홀로 가는 것에 거부감을 갖지 않도록 한다. 가끔 열에서 열다섯 명의 학생들을 뽑아 연주자들 옆에 앉혀 실제 연주의 느낌을 느낄 수 있는 시간도 마련해준다. 이렇게 독일의 음악교육은 학생들이 성인이 되었을 때 클래식음악을 이해하고 감상하며 악기와 연주자들에 대한 이해와 조예가 깊은 사람들을 만드는 데에 중점을 두고 있다. 이 같은 활동의 핵심은 이것이다. 예술은 아름답고 선하며 누구나 가까이에서 이를 즐길 수 있다.
이들의 교육에 비해 우리의 음악 교육은 아직도 폐쇄적인 학교 시스템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음악시간에 다뤄지는 수업은 좋은 감상자를 길러낸다는 명료한 목적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예술과 사회의 거리가 여전히 먼 것 또한 독일과의 큰 차이점이다.
이제 우리 사회와 우리 클래식계는 변화하지 않으면 안 되는 위기의 지점에 와 있다. 많은 어린이들이 정서적인 위기를 극복하지 못하고 목숨을 끊는다. 그러나 인간을 인간답게 해 주는 방책인 예술은 정작 아무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예술과 사회의 괴리를 끊어야 한다. 그 출발은 어린이들에게 예술을 되돌려주는 일에서 출발해야 한다. 우리에게 클래시컬 키즈 프로젝트가 필요한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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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저널 (월간) : 12월 [2017] 음악저널 편집부 | 음악저널
음악 전문 잡지이다. 대중음악 보다는 주로 클래식 쪽으로 집중하고 있다. 국내외 교향음악단의 내용은 물론 해외 소식과 해외에서 활약하는 음악인에 대한 내용도 소개한다.
나성인(음악저널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