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철 사건을 최초로 세상에 알린 전 중앙일보 기자 신성호가 당시 목격한 사건의 진실을 다룬 『특종 1987』 이 영화 <1987> 의 흥행으로 다시 주목받고 있다. 언론 탄압에 맞서 그의 첫 보도가 어떻게 다른 언론에 영향을 미쳤는지, 이후 6ㆍ10 항쟁과 6ㆍ29 선언까지의 과정을 오늘날의 관점에서 재해석해 대한민국 민주화의 시작점을 짚어본다.
저자이자 기자인 신성호는 대학 4학년이던 1980년 중앙일보 기자 시험에 합격했으나 다음 달 신군부의 언론통폐합 조치로 합격이 취소되는 아픔을 겪었다. 1981년 공채 18기로 중앙일보에 입사, 이후 30년 동안 중앙일보 기자로 일하면서 사회담당 부국장과 수석논설위원 등을 거쳤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특종 보도로 1987년 한국기자협회에서 주는 한국기자상을 받기도 했다.
지금과 비교하면 언론에 대한 탄압이 훨씬 강했던 시기인데, 위험을 무릅쓰고 박종철 군의 사망 사건을 기사로 내야겠다고 결심하신 이유가 있나요?
기자의 ‘본능’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이 사건에 의혹이 있고, 반드시 이를 알려야 한다’는 기자로서 직감과 의무 같은 걸 느꼈습니다. 당시 전두환 정권은 집권 초기부터 언론 통폐합과 보도지침 등의 수단을 동원해 언론을 길들이려 했고, 언론 역시 정권의 가이드라인에 서서히 순응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언론과 언론인에 대한 신뢰가 땅에 떨어져 있었지요. 오죽하면 ‘신문을 보느니 대학가의 대자보를 보라’는 말까지 있었겠습니까. 그런 상황이 참 안타까웠지만 그렇다고 취재를 소홀히 할 수는 없었습니다. 1987년 1월 15일 오전, 그날도 취재를 위해 이홍규 대검 공안4과장 사무실에 들렀다가 뜻밖의 사건 단서를 잡은 거죠.
기사가 나간 직후 후폭풍이 대단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최근 개봉한 영화 ‘1987’에서는 본사와 전화 통화를 하던 중에 자기를 잡으러 온 경찰을 보고 도망치신 걸로 나오는데, 실제로도 그렇게 긴박했었나요?
정말 그렇게 경찰이 따라 붙었다면 도망치기도 전에 붙잡혔겠지요. (웃음) 실제로는 그날 저녁 사회부 기자 전원이 참석한 회의가 끝나고 기자들 회식이 있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선배들로부터 ‘쥐도 새도 모르게 끌려갈 수 있으니 오늘은 집에 들어가지 마라’는 조언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회사 근처 여관에 방을 잡고 하룻밤 묵었지요. 그날 밤 참 많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부의 강압으로 기자직에서 쫓겨나면 여섯 식구의 생계를 어떻게 꾸려 갈지 걱정도 됐습니다. 그러다 훗날 자식들이나 언론사 후배들이 ‘기자로 무엇을 했느냐’고 묻는다면 ‘박종철 군의 억울한 죽음을 세상에 처음 알렸다’고 말하면 부끄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자 용기가 생겨 어떤 것도 두렵지 않더군요. 다음날 오전까지도 그렇게 쥐죽은 듯 있다가 선배로부터 ‘괜찮을 것 같다’는 연락을 받고서야 회사로 들어갔습니다.
책을 보면 보도지침을 포함한 당시 정권의 언론 탄압을 꽤 자세히 기술하셨는데요, 혹시 이와 관련해 개인적으로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나요?
1982년 5월의 일입니다. 이철희ㆍ장영자 부부 거액 어음사기 사건이 언론의 최대 관심사였습니다. 장영자 씨가 당시 전두환 대통령의 인척이어서 이 사건은 대표적인 권력형 금융 비리로 꼽혔어요. 언론의 보도 경쟁도 그만큼 치열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국가안전기획부가 일부 기사를 문제 삼아 회사 선배를 불러다 조사했습니다. 취재 경위, 보도 의도 등에 관해 추궁을 받았다고 해요. 그 선배는 다음 날인가 풀려나긴 했지만 이런 사실 자체도 보도할 수 없었습니다. 보도지침 때문이었죠.
6월 항쟁의 시발점을 제공한 사람으로서 ‘6ㆍ29 선언’이 발표되는 순간 많은 생각이 드셨을 것 같습니다. 당시 어떤 심정이었는지 기억나시는 게 있나요?
발표 장면을 TV로 보면서 전율했지요. 박종철 군의 죽음이 결코 헛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의 억울한 죽음이 불씨가 돼 민주화를 외친 시민들의 염원이 마침내 결실을 보게 됐으니까요. 엄밀히 말해 ‘6ㆍ29 선언’은 당시 전두환 정권의 대국민 항복문서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첫 제보자인 이홍규 공안과장님의 정체를 25년 동안 감추셨는데, 그 시간 동안 두 분이 사적으로 만나는 자리에서 그때 일을 얘기하신 적은 없나요?
사건 보도 직후엔 한동안 얼굴도 마주치지 않았습니다. 검찰 내에서 제보자 색출 작전이 벌어질 정도로 중대한 사안이었으니까요. 취재원 보호를 위해 회사 사회부장이나 편집국장 등에게도 첫 단서를 제공한 분이 누구인지 밝히지 않았습니다. 시간이 흐르고 주변이 좀 잠잠해진 뒤 그 분의 사무실에 다시 드나들고 사적으로 만난 적도 있지만 이 사건에 대해선 25년 동안 서로가 한마디도 얘기하지 않았습니다.
『특종 1987』의 초판은 고 박종철 군의 30주기에 맞춰 출간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올해 31주기에는 영화 ‘1987’의 주연 배우들이 추모행사에 참여해 화제가 되었는데요, 요즘 들어 새삼 박종철 군의 죽음이 대중의 주목을 받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시나요?
30년은 보통 세대와 세대를 구분하는 시간 단위입니다. 6월 항쟁의 주인공이던 당시 젊은이들은 이제 기성세대가 되었고, 그 자녀들은 장성해 사회에 진출할 나이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요즘 젊은 세대는 청년 박종철의 이름이나 우리의 민주화 과정에 대해 잘 알지 못했어요. 지난해 겨울과 봄을 뜨겁게 달군 일련의 사건들을 겪으며 젊은이들이 30년 전 우리의 민주화 과정에 관심을 갖게 됐고, 자연스레 그 출발점인 박종철 군의 죽음에 주목한 것 같습니다. 이들의 부모 가운데서도 탄핵이라는 역사적 순간의 오라(aura)에서 30년 전 그 뜨거웠던 6월을 떠올린 사람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이런 기성세대의 과거 기억도 자녀들에게 일부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요. 물론 이건 전적으로 제 추측입니다만.
박종철 군 사망 사건 보도를 해외 사례와 비교하시면서 미국의 워터게이트 사건, 프랑스의 드레퓌스 사건, 그리고 튀니지의 재스민 혁명을 언급하셨습니다. 앞쪽의 두 사건에서 신문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면 재스민 혁명에서는 SNS가 핵심적인 역할을 했는데요, 언론인 출신 언론학 교수의 눈으로 볼 때 SNS가 기존의 언론 매체를 대체할 거라는 주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한마디로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 같습니다. 확실히 페이스북이나 트위터 같은 SNS는 사건 현장의 모습을 날것 그대로 대중에게 전달할 수 있다는 강점이 있습니다. 이 때문에 언론의 기능을 일부나마 대체하는 것도 사실이고요. 하지만 이런 정보들은 언제나 신뢰성에 문제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콘텐츠 제공자가 특정한 목적을 위해 내용을 조작하거나 왜곡할 가능성이 있으니까요. 반면 언론은 언제나 시민사회의 감시를 받고 있고, 하나하나의 사건 보도에서도 더 무거운 책임을 요구받습니다. 그만큼 언론에 대한 시민들의 신뢰도 더 크지요. 저는 이 ‘신뢰’야말로 SNS가 언론을 완전히 대체할 수 없는 이유라고 봅니다. 지난해의 탄핵 사건 과정에서도 SNS를 통한 여러 의혹 제기나 정치적 의사표현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언론사인 JTBC의 태블릿PC 관련 보도가 결정적인 계기가 됐음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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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종 1987신성호 저 | 중앙북스(books)
대한민국 민주화 역사의 정점이었던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한국의 민주화를 논할 때 박종철 사건을 빼놓을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출판사 제공
출판사에서 제공한 자료로 작성한 기사입니다. <채널예스>에만 보내주시는 자료를 토대로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