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을 먹고 나면 허물없이 찾아가 차 한 잔을 마시고 싶다고 말할 수 있는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 교과서에도 수록된 「지란지교를 꿈꾸며」의 첫 문장이다. 최근 『처음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를 출간한 한국인이 좋아하는 시인, 유안진 작가를 만났다.
이 책에서 선생님은 밤을 좋아하시고, 밤하늘을 보며 산책하는 걸 좋아한다고 하셨는데요, 특별한 이유가 있으신지 궁금합니다.
저는 본래 야행성입니다. 어려서부터 그래 왔어요. 고요와 어둠으로 가려지고 간추려진 평화로움과 단순한 밤 시간이 좋았어요. 밤이 되면 안 들리던 소리가 들리고 나 혼자만 깨어 누린다는 우쭐함과 황홀에 빠지곤 했어요. 체질이 그랬나 봐요. 아침에는 못 일어나고 낮에는 방해가 많아, 내가 사는 게 아니라 끌려 다니며 강요받는다고 느꼈어요. 밤 시간은 누구에게도 방해 주거나 받지 않아서 좋아요. 저도 낮 시간은 일상적으로 분주하여 나만의 시간을 내기가 어려우니까요. 그래서 통행금지가 있었던 옛날이 좋아요. 지금은 낮도 밤도 아닌 인공 빛과 소음으로 방해가 많아요.
이 책에서 손주분들이 우리말을 잘 몰라 귀여운 실수를 하는 부분이 기억에 남습니다. 가족들의 따뜻함을 느낌과 동시에 크게 웃게 된 부분인데요, 최근 가족에 대한 에피소드가 있었다면 전해 주실 수 있으신가요?
가족보다 더 편하고 좋은 관계는 없는 듯해요. 저희 세대는 온갖 내우외환 다 겪으며 정신없이 살았다 싶은데도, 살아 놓은 증거와 결과물이 없다 싶어요. 아들, 딸과 그들의 가족들만이 저의 삶의 흔적인 듯해요. 옛 어르신들 말씀 하나도 틀리지 않는다 알아지나 봐요.
아들네가 미국에 살아서, 손자 손녀가 한국말에 서툴러서 화를 냈더니, 열심히 가르쳤나 봐요. 한글 반에도 데려다주고 해서 지금은 곧잘 하는데, 그 이전에 쓴 글들이지요. 아직도 암송이랑 보고 쓰기는 잘해도, 성경과 기도문 등 읽는 속도가 느리고, 자기 생각을 한글로 쓰는 데는 힘들어해요. 나이가 어릴수록 더 그래요.
더구나 촌수 개념이 없어 웃기게 되지만, 저는 표정을 굳히면서, 무서운 할머니가 되어, 젓가락질 등 제 눈치 살피면서 해요. 손의 근육이 두뇌 근육과 직결되어서, 젓가락질 잘하는 게 두뇌 발달에 좋다고 강조하곤 해요. 제가 우리의 전통 여성-아동 민속을 연구하느라고, 도리도리 잼잼 곤지곤지 등의 전통 아동 놀이를 현대 발달 심리학자들의 이론을 들어 그 타당성을 입증해야 했거든요. 그런 과정에서 손의 기능이 두뇌 발달에 직결됨을 알게 되었어요. 그러나 손주들이 저를 찾아와 머무는 기간이 절대 부족해서, 제가 지도하고 강조할 기회도 적지요. 그러나 동요나 노래 등은 배우면 안 잊혀지는 것 같아, 성가에도 동요 곡조가 많았으면 해요.
선생님은 등단하신 후, 50여 년이 넘는 동안 수많은 작품을 쓰셨는데요, 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은 어떤 것인가요?
10원짜리 동전이 통용되던 때 「다보탑을 줍다」라는 시를 얻었어요. 공중전화에 10원짜리를 사용하던 시대였는데, 흘리고도 줍지 않는 걸 보고, ‘다보탑’이라고 국보라고 우기는 작품이었어요. 시 창작은 본래 보잘 것 없는 하찮은 것에서 소중함을 발견하거나, 또는 그런 가치와 의미를 부요하고 담아내는 것이거든요. 그것이 남다름과 우리 기억 뒤에 잊힌 소중한 것을 일깨워 주는 시의 역할이라고 봐요.
다들 ‘처음처럼, 처음같이’의 초심을 강조하면서도 곧잘 잊어버리곤 하는데, 저 역시 처음 시인되어서, 처음 직업, 직장을 가졌던, 처음 엄마가 되었던 등등의 처음 마음 자세를 곧잘 잊고 경거망동하지요. 그래서 쓴 「떡잎」이라는 초기의 시를 읽으면서, 그 처음을 회복하고자 해서 그 시에 애착이 가지요. 그래서 이번 책 제목이 『처음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가 되었는지도 모르겠어요. 첫 마음을 늘 기억하고 싶어서요.
또 유학 시절 흑인 노예들의 메시아였던 링컨 대통령의 얼굴이 새겨진 최하 단위의 백동전을 보고 느낀 바가 컸어요. 그걸로 시를 써 보려고 애썼는데, 안 되더라고요. 한참 후에, 다들 흘리고도 줍지 않는 하찮은 10원짜리의 소중함, 우리가 언제부터 잘살았다고 10원짜리를 우습게 여기나 반성하면서, 번쩍거리는 삶보다는 10짜리 정도로 무시당하지만 소중한 국보인 다보탑이 되어야 한다는, 뭐 그런 겸허와 낮은 듯이 사는 지순함이 곧 다보탑이 새겨진 10원짜리처럼 사는 게 아닌가 하여, 「다보탑을 줍다」를 썼지요.
또 온 국민이 전쟁의 폐허를 딛고 일으켜 세운 우리나라가 처해진, 국가적 외환위기 때는, 저도 극도의 참담함과 허무감에 빠졌어요. 그때 너무 허장성세로 살았다는 성찰에서 쓴 『세한도 가는 길』등이 좋은 평가도 받아, 타의로 대표작이라고 하지만, 현재까지의 그럴 뿐, 제가 자천할 만한, 진정한 대표작은 아직 못 썼어요. 앞으로 반드시 써야 할 책임과 의무가 시인됨의 소의이지요.
이 책에는 가톨릭 신자로서 쓴 글도 여러 편 수록되어 있는데요. 세례를 받게 되신 계기가 있나요?
첫 세례는 고 3때 개신교 학교를 다닌 덕분에 전교생들과 수요 예배를 드린 그 자리에서 미국 선교사로부터 집단으로 받았어요. 그 감동으로 신구약 성경을 다 읽게 되었어요. 물론 미션 스쿨이어서 부분적으로는 성경 공부 시간도 있었고, 감동적이라고 여기 많은 부분은 암송도 했지요. 그러나 가톨릭 세례는, 제가 하도 성경을 자주 읽고, 성경 속의 얘기와, 현재 처한 중동 지역 역사나 서양 문화 서양사와 관련 지은 얘기와 해석을 자주 하니까. 또 직장인 서강대학교에서 마주치거나 함께 출장 다니던 신부님들에게 감동된 남편이, 저 몰래 교리 공부를 하고는 제게 같이 세례를 받자고 했어요. 그땐 화를 냈지만, 기도해 본다고 맘먹게 되더라고요.
내가 개종을 안 해주면 종교를 안 갖겠다는 남편의 말이 무척 맘에 걸렸어요. 과연 개종인가? 하는 질문도 하게 되고, 동일한 하느님과 동일한 예수님을 조금 다른 방식으로 섬기는 게 개종은 아니다 싶기도 하구요. 그런데, 기도해 본다고 스스로 약속한 그 기간에, 안방도 내 집이고 건넛방도 내 집이듯이, 교회도 성당도 하느님의 집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또 남편을 불신자로 방치하는 게 과연 사랑인가? 그러면서도 누구에게 전도하고 기부하는 행위가 과연 사랑인가? 하는 의문도 들면서, 이런저런 이유 등이 세례로 간추려졌어요.
그러면서 대모 요청이 자주 들어와서 견진성사까지 받게 되고, 견진을 받아야 대모가 될 수 있거든요. 대모가 되는 건 힘들어요. 죽기까지 대녀들을 위해 기도해야 하니까요. 그러면서 가톨릭의 장점들이 발견되고, 그 포용의 품과 깊이와 높이가 좋아졌고, 무엇보다도 배타적, 공격적, 강요적이 아닌 점이 좋았어요.
최근 취업난, 집값 상승 등으로 이 땅의 청년들이 살아가기 힘든 시대라고 하는데, 그분들에게 한 말씀 해 주실 수 있을까요?
제가 살아온 시대도 본질상으로는 지금과 마찬가지 아니었나 해요. 내 집에서 살 수 있으리라곤 꿈도 못 꾸었거든요. 그렇게 안개 속 같은 앞날을, 보이는 데까지만 걸어 나아가기로 했어요. 안개 속에서는 한 발자국 정도만 보이거든요. 거기까지 가면 또 한 걸음 정도만 보이곤 해요. 그렇게 살았어요. 체력도 재능도 실력도 두뇌도 다 모자랐지만 그렇게 공짜 유학도 하게 되었고, 유학 때도 자동차 운전하며 살 줄은 꿈도 못 꾸어 운전면허도 안 땄어요. 그런데 살다 보니 집도 자동차도 갖게 되었어요.
보이는 한 발자국씩만 나아가세요. 단번에 천금을 꿈꾸지 말고. 단번의 성공은 재앙이에요. 로또 사지 말고, 할 수 있는 만큼만 정직과 진실로 실력을 키워 나가다 보면 감사도 다행도 천만다행에도 이르게 된다고. 신문과 방송 등의 보이는 것들에 현혹되지 말라고, 할 수 있는 만큼만 노력하시라고, 중요한 것은 내 손 내 몸으로 이룩한 것이 진짜 내 것이고, 횡재는 재앙으로 결과 된다고요. 가족과 친구와 직장 동료 등 사람이 중요하다고. 사람이 재원이라고 여기는 인간 중심으로 신뢰 쌓고 의논하고 체험에서 지혜 얻고 공정, 공평한 신을 믿고.
계획 중이신 작품이 있으신가요?
계획대로 안 되는 것이 창작이 아닌가 해요. 그래서 좋은 글만 쓰면 된다고. 누가 읽어도 감동적인 몇 마디. 수다 떨지 않고, 읽으면서 지루하거나 짜증 나지 않는 글이면 된다고, 최선의 노력을 하는 게 중요하지, 남이 피를 짜서 쓴 글을 비위에 안 맞는다고 매도하거나, 내 글만이 최고라고 우기는 건 시인 작가다운 진실도 자존심이 아니라고. 남들이 알아 주건 말건 나의 최선이면 된다고. 내 힘 이상은 내 몫이 아니라 하늘의 몫이라고 말입니다.
살아와 보니, 평범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무수히 깨달으면서, 평범의 진실성, 평범 속에 감춰진 비범함의 발견 등은, 평범에 머리 숙일 때 마주치는, 통시대적이고 범인간적인 진실이라고 봐요. 기괴하거나 기인적인 일화를 만들어 내기 좋아하고, 그런 특이함과 특별함을 추구?탐익하는 사회적 풍조를 경계해야 한다고, 저는 특별하게 태어나지도 특별한 재능이나 생김도 못 가졌고 성장 환경도 그러지 못했으니까, 그런 기괴하거나 기행적인 특이성이 싫어요. 인간사회에서 희귀적 가치는 있을지 모르나, 범인간적이진 못하니까요. 억지로 그런 특이함을 만들어 내는 것도 저는 좋아하지 않아요. 기인들이 인간 사회에 기여하는 바는 범인들보다 모자란다고, 다만 희귀성은 조금 약간만의 양념 정도로 필요하다고, 누구나 공감하는 진실이 우리 사회를 건강하게 한다고 봐요. 범재인 내 자식들이 기괴함을 위장?가장해서 사회의 양념 정도가 되기보다는 평범하고, 진솔하게 살아서 인간 사회에 기여하기를 더 바라니까요.
올해 목표가 있으시다면 말씀해 주시겠어요?
바로 위에서 말씀드린 바대로, 인간적인 진실이 보편적인 진실이라고, 따라서 약점이든 실수, 실패나 인간적인 저의 진실이, 허위 가장 등의 인간적인 실패, 실수 등의 약점이, 독자들의 그런 비슷한 점들과 닿아 있다는 생각으로, 글쓰기에 함부로가 아니되 겁먹지도 말자고, 좋은 작품 쓰려고 더 노력할 수 있었으면 바라는 정도입니다. 학문이건 시 작품이건, 좋은 작품이 노력만으로 얻어지는 지는 잘 모르지만, ‘천재는 노력하는 자를 못 이긴다’는 말이 있거든요. 노력이 천재를 만들지 않나 싶은데, 나잇값 하느라고 골골하다 보니 노력도 못하기 일쑤입니다. ‘할 수 있는 데까지’를 늘 소망하지요. 시시하고 별 볼 일 없습니다. 이런 게 저의 저다움이어서 죄송합니다. 모든 분들께 모든 것들에게 늘 죄송하고 미안합니다.
지면상 싣지 못한 유안진 작가의 추가 인터뷰 내용을
가톨릭출판사 블로그 (http://blog.naver.com/catholicbuk)에서 만나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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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유안진 저 | 가톨릭출판사
저자가 평생 동안 사색하고 통찰한 내용들이 저자 특유의 독창적인 표현과 유려한 문체로 담겨 있다.
출판사 제공
출판사에서 제공한 자료로 작성한 기사입니다. <채널예스>에만 보내주시는 자료를 토대로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