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인이 좋아하는 곳은 우리도 좋아
베트남의 국민 소스 ‘늑맘’을 만드는 풍경
드디어 그런 날이 오고 말았다. 서울이 모스크바보다 더 추운 겨울 말이다. 그 여자와 나는 이번 겨울도 따듯한 남쪽 나라에 머물렀다. 보일러가 멈추거나, 세탁기가 돌지 않거나, 수도꼭지에서 물이 나오지 않는 경험을 사람들과 공유하지 못했다. SNS로 올라오는 역대급 추위 인증 샷을 보고 있으며 ‘나만 이리 좋은 곳에 있어도 되나’ 싶어서 내내 미안하다가도 호텔 수영장 선탠 베드에 누우면 이내 ‘역시 겨울에는 남국으로 여행 오는 게 최고군’ 하고 한국의 상황들을 잊곤 했다.
추운 날, 눈 내리는 동네를 여행하는 즐거움도 있지만 그래도 마음보다 몸이 향하는 곳은 따듯한 남국이다. 이런 생각을 나만 하는 게 아니었는지 우리가 찾은 겨울 여행지에는 늘 그들이 먼저 와 있었다. 한반도에 극한의 추위가 찾아올 때마다 비교당하는 러시아 사람들 말이다.
베트남의 바닷가 마을인 무이네는 바구니 모양의 전통 배, 까이뭄(Chai Mum) 위에서 물고기를 잡고 그 생선으로 베트남 특유의 맛을 내는 액젓 늑맘(Nuoc mam)으로 유명한 곳이다. 하지만 이제는 해변에 맞닿아 있는 좋은 땅들은 리조트가 차지하고 있고 사막 투어, 어촌 및 농장 방문 등 여행 상품으로 외지인들을 이곳으로 불러 모은다. 그 관광 산업의 큰 비중을 차지하는 나라가 있으니 바로 러시아다. 그걸 어떻게 아느냐고? 이 작은 바닷가 마을에는 러시아어로 된 간판이 태반이고, 식당에는 영어보다 러시아어로 된 메뉴판이 우선이다. 테이블 서른 개가 넘는 식당이 러시아 사람들로만 찰 때도 있고, 가게 종업원 중 한 명은 러시아어를 할 줄 안다면 무이네에서 러시아인의 영향력이 어느 정도인지 감이 잡힐까?
러시아 사람들이 많이 찾는 겨울 휴양지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해변이 있는 바닷가 마을일 것, 음주를 비롯한 밤 문화의 다양성이 보장될 것, 스쿠터로 움직일 수 있는 한적한 규모의 마을일 것 그리고 물가가 아주 저렴할 것. 세계를 여행하면서 경험한 바로, 이 네 가지 조건에 충족하면 여지없이 러시아 사람들의 겨울 휴양지가 된다. 터키의 안탈리아에서 요트를 타고 거품 파티를 즐기던 것도 그들이었고, 클럽 음악과 술을 찾아 인도 고아에 몰려들던 사람들도 러시아인이었다. 그리하여 물가도 싸고, 사람도 친절한 베트남 무이네가 그들의 겨울 휴양지로 새로 자리 잡았다.
이 선택에는 충분히 이유가 있다. 조금만 움직여도 완전히 다른 풍경을 즐길 수 있는 곳이 무이네이기 때문이다. 해변을 따라 늘어선 호텔과 리조트에 머물다가 로비를 나서면 시골 마을 풍경 위에 자리 잡은 식당에서 1,000원으로 맥주 한 병 시켜놓고 한적함을 즐길 수 있다. 그리고 베트남 음식이 좀 맛있는가! 길게 펼쳐진 해변에서 놀다가 사막에서 해가 뜨고 지는 풍경을 보려면 30분만 움직이면 된다. 우리는 밤낮없이 정보를 찾아보고 나서야 무이네를 왔는데, 그들은 어떻게 알고 이 작은 마을에 오는 것일까? 아무튼 우리의 수고가 무색할 정도로 러시아 개별 여행자는 물론이고 전세기를 타고 왔을 것 같은 대규모 투어 팀도 심심치 않게 만날 수 있다.
이런 다양함을 지닌 무이네이지만 거기에 머무는 동안 그 여자와 나는 다른 일로 정신이 없었는데….
호텔방, 우리만 좋나요?
이런 풍경은 덤이다
『월간 채널예스』 2월 호에 눈길이 가는 기사가 있었다. '나에겐 너무 중요한 작업 공간' 꼭지이다. 에세이스트, 화가, 디자이너 등 5인의 작가가 작업 공간을 공개했다. 카페를 이용하는 임경선 작가를 제외하면 모두 집과 별개의 개인 작업실을 가지고 있다. 집이 작업실이자, 카페이자, 식당이자, 목욕탕이자, 수면실인 우리로서는 참으로 부럽다.
“언젠가 우리도 작업실을 가지게 될 거야? 그렇지? '그 남자'야?”
그건 그렇고, 글을 쓰는 일을 직업으로 삼은 이들이라면 만족도 면에서 최상위로 꼽을 만한 작업 공간이 있다. 사실 인터뷰한 작가들 중 한 명은 이 장소를 언급할지도 모른다는 기대가 있었지만 매우 특별한 공간이라 주저하지 않았나 싶다. 누군가 우리에게 '작업 공간으로 어디가 가장 만족스러웠나요?'라고 묻는다면 '호텔'이라고 말할 것이다. 2성급, 3성급 호텔이 아니다. 별이 많이 붙을수록, 무궁화가 많이 피어 있을수록 좋다.
작업실도 없는 주제에 웬 허세냐고? 네. 무이네라면 우리도 가능합니다. 이곳에서 일주일을 머무는 동안 『사랑한다면 왜』 의 마지막 교정을 보았다. 마지막 교정, 예민해질수록 보이지 않는 오타와 띄어쓰기를 찾는 숨바꼭질은 애를 태우고 내용 면에서도 실수한 건 없는지 신중을 기해야 한다. 인쇄 전까지 원고를 수정할 단 한 번의 기회, 이토록 중요한 마지막 교정을 그 남자와 나는 4성급 호텔에서 치렀다.
매일 아침, 입맛에 맞게 다양한 조식을 챙겨 먹고 교정에 몰두한다. 호텔방에서 일하는 사람이 우리 말고도 많은지 편안한 의자와 책상이 준비돼 있다. 상쾌한 에어컨 바람이 갑갑해질 즈음이면 점심도 먹을 겸 호텔 건너편 식당에서 밥을 먹고 돌아온다. 그 길에 수영장에서 선탠을 하거나 수영을 한다. 호텔방으로 돌아와 샤워를 하고 다시 책상 앞에 앉는다. 일주일 동안 우리가 무이네에서 했던 일의 전부다. 그것뿐인가? 자고 일어나면 누군가의 수고로 방과 욕실이 말끔히 치워져 있다. 그중 최고는 매일 바뀌는 이불 시트이다. (이불 시트 갈기는 내가 싫어하는 집안일 중 하나다.) 손 하나 까딱하지 않아도 말끔히 정리된 작업 공간이라니! 오로지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원고에만 집중하는 것이다.
작업 공간으로서 호텔 이용은 사실 무이네가 처음이 아니다. 독일 프랑크푸르트, 태국 방콕, 인도 델리에서도 큰맘(이전 여행지에서 심신이 탈 나 몸을 추슬러야 하거나 기가 막힌 운으로 저렴하게 예약한 경우) 먹고 입실한, 별이 치렁치렁한 호텔에서 원고 교정을 보았다. 그러니까 '호텔을 예약해야겠어. 왜냐하면 일을 해야 하니까'가 먼저가 아니라 호텔에 들어갔더니 편집자로부터 메일이 날아오는 식이었다. 공교롭게도 호텔만 갔다 하면 어떻게들 알고 일거리를 보내준다. 무이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편집자들에겐 공간을 초월하는 눈이라도 달린 것인가!
나는 요즘도 개인 작업실도 카페도 아닌 호텔방을 꿈꾼다. 한 달 정도 호텔방에 틀어박힌다면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만한 작품 하나는 쓸 것만 같은 착각이 든다. 그러나 그럴 일 없음이 얼마 전 드러났다. 일주일이나 호텔방에서 들여다본 새 책에 띄어쓰기 오류와 비문이 발견됐기 때문이다. 털썩, 중요한 건 공간이 아니었어. 인공 지능이 손봐주는 교정, 교열 기능이 시급해.
백종민/김은덕
두 사람은 늘 함께 하는 부부작가이다. 파리, 뉴욕, 런던, 도쿄, 타이베이 등 누구나 한 번쯤 꿈꾸는 도시를 찾아다니며 한 달씩 머무는 삶을 살고 있고 여행자인 듯, 생활자인 듯한 이야기를 담아 『한 달에 한 도시』 시리즈를 썼다. 끊임없이 글을 쓰면서 일상을 여행하듯이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