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한 살, 류머티즘이라는 병이 찾아왔다. 20대는 이 지독한 병을 고치기 위해 애를 쓰며 살았다. 하지만 ‘아픈 건 아픈 거고 청춘은 청춘’이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삶은 계속 됐다. 순간순간 즐거움도 있었다. 고통스러운 통증은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았지만 그래도 사는 게 좋았다. 그러던 어느 날, ‘꼭 나야아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고, 이후 병과 함께 사는 방법을 고민했다. 독서지도사로 열심히 일을 하며 살았고, 지금은 삶과 하나가 되는 공부를 하며 지낸다.
『아파서 살았다』 를 쓴 오창희는 스물한 살부터 지금까지, 40년의 시간 동안 자신을 따라온 류머티즘이라는 병을 마침내 긍정한다. 공부에 대해, 삶에 대해, 죽음에 대해, 아프지 않았다면 지금처럼 깊이 고민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오창희. ‘아프면서’가 아니라 ‘아파서’ 살았다는 말은 그러니까 꼭 사실이다. 그는 “꼭 어떤 질병을 앓는 사람만이 아니라 되풀이해서 나를 찾아오는 문제를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말 걸고 싶다고 말했다. 이것은 ‘저마다의 류머티즘’에 고민하는 사람들을 위한 책이다.
결국 어떻게 살까, 와 연결되는 문제
제목의 의미를 먼저 이야기해보고 싶어요. ‘아프면서’도 아니고, ‘아파도’도 아니고, ‘아파서’ 살았다, 거든요.
처음에는 당연히 아파서 힘들었죠. 스물한 살 때부터 병이 왔는데요. 십 년 정도는 거기서 벗어나려고 애를 많이 썼어요. 서른한 살 때 무릎 인공관절 수술을 했거든요. 그 전까지는 아예 서지를 못했었으니까요. 잠깐 전기 침대를 세워서 일 년 좀 못 되게 걸어 다닌 적이 있는데요. 다시 염증이 재발하고, 못 걷게 된 기간이 꽤 오래 돼요. 힘든 20대를 보냈죠. 그때는 당연히 아파서 힘들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어떤 약을 써도 안 나으니까요. 그런데 어느 순간 ‘꼭 나아야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진짜 순간적으로요. 이렇게 지내다가는 평생 그냥 병 낫는 노력만 하다가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때부터는 그냥 같이 살자, 같이 살면서 아픈 채로 뭔가를 해야지 이러다가는 평생 이 상태로 살겠다는 생각을 한 거예요. 그러면서 일을 열심히 했어요.
독서지도사 일을 시작하신 거였죠?
네, 사실 고민을 한 게 칠 년 쯤 되고요.(웃음) 일을 시작한 것은 서른아홉 살이었는데요. 그때부터 십 년 정도는 열심히 일을 했어요. 아프면서 살아도, 되더라고요. 그러다 다리가 부러져서 이 년 정도 다시 못 걷게 됐고요. 2008년 즈음이었는데 경제 위기였고, 제가 많이 불안했어요. 얼마쯤 돈을 벌어야 살 수 있나, 하면서요. 그때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보다 돈을 덜 쓰고 살아야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죠. 돈에 초점이 맞춰져있던 건데요. 돈에 있어 제일 부담이 되는 게 건강이었으니까 그렇다면 건강을 스스로 관리해봐야겠다는 생각을 한 거예요. 그런데요, 그때서야 의문이 들었어요. 지금까지 책도 읽고, 공부도 했는데 왜 이런 데 아무 도움이 안 되지? 하고요. 결국 공부와 삶이라는 게 따로 놀아서 그랬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우연히 ‘수유너머’를 알게 됐고, 제도권 바깥에서 소장학자들이 공부를 한다는 게 신선해서요. 그런 공부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그때부터 하게 됐어요.
‘감이당’에 오게 된 이유가 공부와 삶의 합일을 고민하면서였던 거군요?
공부가 뭘까, 라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감이당에 오게 된 이유는 집에서 제일 가깝고, 엘리베이터가 있어서였는데요.(웃음) 관심을 갖고 찾아봤더니 『동의보감』이나 역학 공부도 하더라고요. 이런 것을 공부하면 내 몸을 알고, 관리하는 데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죠. 공부를 하면서 생각한 것은 병을 관리한다는 것이 삶과 별개가 아니라는 것이었어요. 병을 어떻게 관리할까, 라는 게 결국 어떻게 살까, 와 연결되는 문제더라고요. 그 차원에서 접근하지 않으면 살면서 또 다른 장벽을 만날 수밖에 없는 거고요. 그러면서 이런 게 공부구나, 하는 것도 알게 됐어요.
이런 삶의 궤적이 ‘아파서’ 가능했다는 생각이신 건가요?
저는 노는 것도 좋아하고, 운동도 좋아하고, 친구들과 이야기하는 것도 되게 좋아해서요. 아마 아프지 않았다면 이런 고민은 하지 않았을 거예요. 류머티즘이 끝까지 저를 안 놓아주니까 거기서 길을 찾다가 공부라는 것을 하게 된 거죠. 인생 공부라고 할까요. 특히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 많이 느꼈는데요. 어머니는 공부는 안 하셨지만 삶에 중심이 딱 있으셨거든요. 그런 부분이 아픈 저에게도 큰 도움이 됐는데요. 나이가 많이 드시고, 몸에 힘이 빠지니까 어머니가 자꾸 마음이 다스려지지 않는다는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그걸 보면서 평소에 뭔가를 쌓아놓지 않으면, 체득시켜놓지 않으면 되게 힘들겠구나, 하는 생각을 정말 많이 하게 됐어요. 그전까지만 해도 공부는 선택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과정을 겪으면서는 공부란 누구나 해야 하는 거라고 생각하게 됐죠. 그런 생각을 하게 해준 것이 아픈 것이었기 때문에 ‘아파서 살았다’고 얘기를 한 거예요.
삶 안으로 ‘공부’와 ‘아픈 상태’를 끌어들여 왔다는 점이 굉장히 중요하게 들려요.
병과 함께 살기로 마음먹은 후에 일도 하고, 돈도 벌면서 자신감도 생겼었어요. 도중에 다리 골절상을 입었지만 다시 걸을 수 있게 됐고요. 스스로에게 만족했다고 할까요. 이 정도면 살 수 있겠다는 마음을 먹긴 했었는데요. 감이당 처음 와서 ‘마음 세미나’라는 걸 했거든요. 네 번 에세이를 쓰는데 마지막이 ‘일상의 힘’이라는 제목이었어요. 저의 글에 ‘이 정도면 됐어’라는 생각이 드러났었나 봐요. 고미숙 선생님이 ‘일상에 구원이 있는 건 맞는데 일상이 다 그런 건 아니다, 일상에 구원이 되는 순간이 있다’는 코멘트를 주셨어요. 그때는 그게 무슨 말인지 몰랐지만 계속 공부를 하면서 알게 된 거죠. 일상이 다 구원이 되는 건 아니고, 순간의 의미를 알아차릴 때 다시 길을 가는 거구나, 하고요. 이번에 책을 쓰면서도 그랬는데요. 지나온 일상이 재해석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서 공부는 마무리 되는 게 아니고 죽을 때까지 계속 되는 거구나, 라는 것을 알게 됐죠.
나의 삶을 중심에 놓고
병이 나은 후를 골몰하는 동안 “시나브로 내 삶이 증발해 버렸다.”(10쪽)라고 적으셨잖아요. 그러면서 자신의 삶을 ‘재해석’해냈어요. 그 자체로도 “저마다의 류머티즘을 안고 살아가는”(14쪽)사람들에게 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두 가지 면이 있는데요. 하나는 경험이었어요. 아픈 게 안 없어지니까요. 정말 낭떠러지에 다다르는 느낌이 들 때가 있었거든요. 아무리 해도 안 되고, 병에는 변화가 없고요. 이대로밖에는 안 되는 건가, 하면서 막다른 골목에 섰다고 느꼈을 때 질문이 어디선가 확 날아왔어요. 다른 하나가 공부이고요. 경험으로 삶의 마디를 넘는 방법도 있고, 공부를 하면서 거기에 비춰진 자신을 보면서 자신의 삶을 재해석하게 되는 게 있는 것 같아요. 나를 계속해서 막다른 골목에 일부러 몰아넣을 수는 없잖아요.(웃음) 그래서 공부가 반드시 필요한 것 같고요. 그 공부라는 것은 나의 삶을 중심에 놓고 하는 게 진짜 공부라는 생각을 해요.
책을 쓰면서도 삶의 재해석이라는 측면에서 새롭게 발견한 것들이 있었나요?
있더라고요. 책을 쓰면서 지금과 그때가 만나잖아요. 여러 가지가 복합적으로 제 안에 들어와서 파편적으로 흩어져 있는데요. 글이라는 것을 쓰면서 쓸 때는 생각지도 않았던 것들이 정리가 되더라고요. 이것이 그것이었구나, 그것이 내게 힘이 됐었구나, 깨달았어요. 부모라는 존재에 대해 생각한 것도 글을 쓰면서였어요. 엄마가 힘이 되긴 했었는데 어떤 점이 힘이 됐는지 잘 몰랐거든요. 쓰면서 알게 된 게 많아요.
어머니에 대해 “두고두고 새롭게 읽을 더 없이 소중한 텍스트”(236쪽)라고 하셨죠.
타고난 기질도 대범하시고요. 삶에서 배운 경험을 많이 갖고 계신 분이셨어요. 중심이 있으셨고요. 매일을 규칙적으로 사셨죠. 저희는 방학이라고 늦게 일어나본 적도 없고요. 아침 식사 시간이 늦어본 적도 없어요. 부모님은 매일 같은 시간에 식사를 하고, 일정한 시간에 주무셨어요. 생활 자체가 담백했죠. 모든 물건에는 제 자리가 있어서 제가 휠체어를 타고 생활하는 데에도 편안했어요. 지나고 보니까 해가 뜨고 달이 뜨는 리듬에 따라 생활하셨던 부모님의 삶이 제게 큰 힘이 됐다는 생각이 들어요. 늘 규칙적으로 일상을 살아낸 것, 그것이 아마 제가 여기까지 오게 된 하나의 큰 힘이었다고 생각해요. 책을 쓰고 나서 다시 생각하게 된 부분이죠.
규칙적으로 일상을 보내는 것은 달리 말하면 성실함이기도 할 테니까요. 몸에 집중하기 위해 고통을 참으면서 ‘활원운동’을 하는 장면에서도 그런 면모를 엿볼 수 있었어요.
마무리를 안 하면 찝찝해요.(웃음) 활원운동을 할 때의 마음은 기억이 나요. 여름이었는데요. 도장 창문을 다 열어놓고 운동하는데 제가 너무 아파서 펑펑 울었거든요. 그랬더니 지도하시는 분이 창문을 다 닫았어요. 그런데 그렇게 울면서도 움직일 수는 없었어요. 움직이는 순간 지금까지 참았던 게 수포로 돌아간다는 생각 때문에요. 이것 이상 내게 적합한 운동은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포기할 수가 없었던 거죠. 이걸 포기하면 다른 무엇을 찾아야 하나, 이게 너무 암담했으니까요. 나중에 관련해서 활원운동 책을 읽었는데 몸이 스스로 움직여서 몸을 치유한다는 게 매력적이었거든요. 그런데 때로는 이런 생각도 해요. 제 첫 주치의 선생님이 해주신 말씀인데요. “이 세상에 꼭 해야 하는 것은 없다는 걸 명심하고 살아라.”라는 말이에요. 때로는 포기할 줄 아는 게 용기이기도 하다는 생각을 해요. 아마 제 상황에서 하신 말씀이겠죠. 다른 상황의 사람에게는 다르게 말씀하셨을 거예요.
아버지와의 ‘이상한 담판’을 벌이던 일화도 재미있었어요. 저자의 성격이 드러나기도 하고요. 솔직함이라는 면을 중요한 삶의 태도로 여기고 있잖아요.
“제가 보기에는 아부지가 큰오빠가 엄마한테 잘못하실 때가 있는데 사과하시는 걸 본 적이 없어요.”
“…….”
나는 아버지가 대답을 하실 때까지 기다렸다.
“나도 신이 아닌데 잘못을 하제.”(중략)
그날의 이상한 담판의 경험은 뜻하지 않게 그 이후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방식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상대에게 어떤 불만이 지속될 때, 그 사람이 다시는 안 볼 사람이 아니며, 그 불만이 도저히 혼자서는 삭여지지 않을 때, 결과가 어떻게 되든 일단 솔직하게 내 생각을 털어놓는다는 원칙을 갖게 된 것이다.(68-69쪽)
기질도 있는 것 같아요. 사주를 공부해보니까 제게 ‘금(金)’기운이 많아요. 정리하고, 쳐내는 기운인데요. 어릴 때는 집안 분위기가 엄격해서 그런 기질을 눌러뒀던 것 같아요. 그때는 속에 있는 말을 다 하고 그러진 못했는데요. 놀 때는 했던 것 같네요. 어릴 때 고무줄놀이를 하는데 남학생들이 친구의 고무줄을 끊으면 제가 가서 따지고 그랬어요.(웃음) 아버지와의 이상한 담판이 도움이 됐어요. 그 이후에도 부당하다고 생각이 들면 상사에게도 수정해달라고 말하고 그랬거든요. 말해야 한다는 걸 깨달은 거죠. 마음에 갖고 있으면 감정이 쌓여서 사람과의 관계가 제대로 안 되는 것 같아요. 지금도 말을 좀 하는 편이에요. 그러면 상대도 편하게 말을 하더라고요. 아버지도 그랬어요. 아마 가족 중에서 제가 아버지와 가장 편하게 말을 했을 거예요. 제가 더 편하게 아버지를 지적했죠.(웃음) 아버지를 통해서 인간관계에도 도움을 받은 것 같아요.
그 밖에도 가족의 도움이 없었다면 쉽지 않은 일이었을 거라는 생각이 많이 들더라고요. 부모님뿐 아니라 형제, 조카 등 많은 가족들이 등장하는데요.
진짜 가족들이 없었으면 어떻게 살고 있을지 잘 모르겠어요. 워낙 부모님이 중심을 잡고 살아가시니까 주변에 있는 사람들도 그럴 수 있었던 것 같은데요. 어릴 때는 모든 가족이 다 그렇다고 생각을 했어요. 그게 아니라는 걸 처음 느낀 건 부모님을 떠나 큰오빠가 가자는 서울의 병원에 입원했을 때였죠. 1983년이었는데요. 그때만 해도 간병인 제도가 없어서 가족들의 도움을 받아야 했어요. 결혼을 한 달 앞둔 셋째 올케 언니가 평일 낮 간병을 담당했고, 밤이 되면 오빠들이 번갈아서 왔어요. 주말에는 큰 올케 언니와 둘째 올케 언니가 왔고요. 저는 그때 팔다리에 추를 매달아놨기 때문에 움직이기가 힘들었거든요. 2인실이었는데 옆 침대에 계신 분들이 이런 오빠, 이런 올케들은 없다는 거예요.(웃음) 신문에 날 일이라는 말씀까지 하셔서 이게 대단한 일이라는 생각을 그때부터 하게 된 거죠.
정말, 쉽지 않은 일이죠.(웃음)
저를 불쌍하게 생각하지 않았을까요.(웃음) 심지어 오빠들 집마다 다니면서 살았거든요. 큰 오빠 집에 제일 많이 살았고요. 둘째 오빠나 셋째 오빠 집에 일 년 정도 살았는데요. 그러면서 조카들과도 친해지고요. 둘째 오빠 집에서 살면서는 오빠보다 올케 언니와 더 친했어요. 여자라서 그런지 여자 입장이 이해가 되고요. 오빠한테 싫은 소리도 하고요.(웃음)
시절인연
말씀을 나눠보니 책에서 느낀 것보다 밝으셔서, 물론 매순간 그렇지는 않았겠지만 그래도 때때로의 일상을 편안하게, 잘 지내오셨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런데 옛날 사진을 보니까 되게 우울한 얼굴이더라고요. 그늘이 있어요.(웃음) 어렸을 때 엄마가 고랑에 가서 같이 죽자고 했던 적이 있었는데요. 그때는 가끔 울었던 것 같아요. 아버지가 제 눈치 보시던 기억도 나거든요. 하지만 이후에는 순간순간 좋아하는 것들을 하며 지냈던 것 같아요. 활동적인 걸 좋아해서 놀이도 하고, 좋아하는 조용필 노래를 들으면서 지내기도 하고요. 주로 라디오를 많이 들었는데요. TV는 한쪽으로 시선을 고정해야 하기 때문에 몸이 많이 아프거든요. 온 관절이 다 아프기 때문에 한 방향으로만 있기는 되게 힘들어요. 그래서 음악을 많이 들었죠. 한 채널에 고정해놓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가요부터 팝송, 동요, 가곡까지 모든 노래를 들었어요. 따라 부르기도 하고요. 게다가 늘 누가 찾아왔었어요. 그러다보니 시간이 잘 갔고요. 책을 볼 수 있게 되면서부터는 또 덜 심심했죠.
책에 엄청 몰입하던 시기가 있었던 것 같더라고요.
아프면서 책을 읽기 시작했어요. 답답하니까 길을 찾게 되더라고요. 다른 건 할 수 있는 것도 없었지만요. 책에서 뭔가를 찾아보려는 마음이 있었던 것 같아요. 대학원에 갔을 때 저의 독서를 정리해본 적이 있는데요. 시기마다 읽은 책 종류가 다르더라고요. 어떨 때는 수기를 읽었어요. 어떻게 병을 극복했는지 보는 거죠. 거기서 내가 나을 방법을 만나려고 무척 노력했어요. 하지만 나와 딱 맞는 조건이란 없잖아요. 거기에서 그 사람들의 태도 같은 걸 읽어서 도움이 되도록 했어야 하는데 그렇게까지는 안 된 거죠. 위인전을 한참 읽을 때는 이런 삶도 의미 있는 삶이구나, 깨달았고요. 명작을 읽을 때도 도움이 많이 됐죠. 그 모든 게 다 소일거리가 됐던 것 같아요.
요즘은 어떤 책 읽으세요?
요즘은 감이당에서 책을 읽죠. 금요일은 제가 ‘금요대중지성’을 하는데요. 주역과 불교 관련된 책을 읽어요. 니체 세미나를 하면서 니체를 읽고 있고요. 니체는 지금도 뭔지 모르지만요. 니체가 많이 아팠다는 것에 공감이 많이 가는데요. 니체를 읽으면 아프면서 치열하게 살아온 사람의 느낌이 좀 있어요. 머리로만 생각한 게 아니라는 느낌인데 정확하게 말로 표현하기는 어렵지만요. 니체는 몸에 대한 이야기도 많고, 그렇게 접근해서 세상을 보는 이야기도 많아서 그런 면이 재미있어요. 언젠가는 나도 니체처럼 아픈 몸을 통해 무언가를 볼 수 있으면 재미있겠다고 생각하지만, 아직은 뭐라고 한 마디도 말할 수 없죠.(웃음)
아프면서 살아간다는 깨달음이 더 일찍 왔더라면 어땠을까요? 생각해본 적 있으세요?
그러던 1989년 봄, 병원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중이었다. 택시가 동작대교를 지나고 있었다. 갑자기 머리를 스치는 생각! 건강해지는 것, 그 자체가 인생의 목표가 될 수 있나? 과연 다시 아프기 이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아니, 꼭 그래야 하나? 그렇지 않으면 내 인생은 아무 의미가 없나? 지금 이 상태로 병과 함께 살아가면 안 되나?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 순간, 무언가 막혔던 것이 뻥 뚫리는 것 같았다. 그래, 지금 이 상태로 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 사는 길을 찾아보자.(97쪽)
공부하면서 알게 된 것은 다 때가 있다는 것이에요. ‘시절인연’이라고 하는데요. 여러 가지가 맞아 떨어져야 깨달음 하나가 오는 것이지 내가 뭘 어떻게 한다고 해서 되는 건 아니더라고요. 그때 책을 더 읽고, 공부를 했다고 알게 됐을까요? 아닐 거란 생각이 들어요. 병을 고치려고 십 년 동안 애를 쓰다가 인공 관절 수술을 하면서 ‘계속 이렇게 수술을 하면서 살아야 해?’라는 생각에 허탈해졌는데요. 그 막막함 앞에서 뭔가가 딱 왔던 거죠. 이걸 삶으로 확장시켜보면 하나의 고민이 있을 때 그걸 끝까지 밀어붙여야지만 거기서 다른 길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고요. 우리는 조금 고민하다가 말잖아요. 힘드니까요. 샛길로 빠질 수도 있고, 거기서 다른 걸 만날 수도 있긴 한데요. 어떤 점에서는 하나의 고민이나 질문이 있을 때 그걸 끝까지 밀고 갔을 때 전환이 오지 않나 생각은 들어요. 그것을 저는 운이 좋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웃음) 절대 떼려야 뗄 수 없는 류머티즘을 만난 거고요.
운이 좋다고 해야 할까요.
행운이라고 말하면 너무 과한 거고요. 그나마 아파서 삶이 뭐지, 죽음이 뭐지, 이런 걸 생각하게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은 해요. 대학과 대학원을 다니면서 제가 정말 생각이 깊지 않은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됐거든요.(웃음) 아프지 않았다면 생각 깊지 않게, 즐겁게 살다가 죽음에 임박해서야 ‘이게 아닌데’(웃음)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싶어요. 왜냐하면 40대, 일을 열심히 하면서 아프긴 했지만 어느 정도 성취를 거두고 내 나름의 삶을 일궈간다고 했던 그 시절에 잠깐만 틈이 나면 ‘이게 아닌데’라는 생각이 너무 자주 올라왔거든요. 사실 그게 되게 힘들었어요. 그게 뭔지 끝까지 잡고 가보고 싶은데, 질문을 이어가고 싶은데 해야 하는 일이 있으니까 놓고, 놓고 했었어요. 그러다가 다리가 부러져서 집에 있을 때 그걸 해보게 된 거예요. 그 끝에 내 몸을 내가 몰랐다는 깨달음이 왔던 거고요. 그런 걸 보면 내 안에서 질문이 나올 때는 그걸 잡고 가보는 게 정말 중요한 것 같아요.
특별히 어떤 분들이 이 책을 읽었으면 하세요?
책을 쓰면서 이것들이 아프지 않았더라도 겪을 고민이었겠구나, 생각하게 됐어요. 류머티즘을 안은 채 겪었다는 게 달랐을 뿐이지 나만 특별히 겪은 거라고 생각할 게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요. ‘저마다의 류머티즘’이라는 것도 그런 의미인데요. 이 책은 반드시 류머티즘일 필요도 없고요. 더 나아가서 꼭 어떤 질병을 앓는 사람만이 아니라 되풀이해서 나를 찾아오는 문제를 고민하는 분들이 읽으면 좋을 것 같아요. 그런 문제를 어떻게 만날 것이며 그것과 어떻게 함께 살아갈 것인가, 고민하는 태도에 초점이 있는 책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거든요. 고민을 떨칠 수는 없지만 고민과 어떻게 만날 것인가, 할 때는 다르게 만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것이 결국은 제가 공부를 삶으로 가져온 이유이기도 하니까요. 또한 그건 결국 어떻게 살 것인가, 동시에 어떻게 죽을 것인가, 라는 질문과도 연결된 문제라고 봐요. 죽음에 임박해서 ‘이게 아닌데’라고 하고 싶지 않은 분들에게 권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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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서 살았다오창희 저 | 북드라망
아파서 살았노라고. 공부와 책읽기를 손에서 놓지 않은 저자의 타고난 명랑함과 지성, 그리고 가늠할 길 없는 어머님의 사랑이 엮어 낸 특별한 류머티즘 동행기가 펼쳐진다.
신연선
읽고 씁니다.
rldud22
2018.03.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