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피렌체. 미국에 본사를 둔 무기 공장의 폐쇄 결정이 내려진다. ‘마카로니 프로젝트’는 공장 폐쇄를 앞두고 이로 인한 직원들의 반발을 최소화하기 위해 운영진이 은밀하게 준비한 사전 작업의 이름이다. 이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된 각 부서의 팀장들은 죄책감과 안도감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한다. 비밀 유지 노력이 무색하게 프로젝트를 알게 된 누군가는 이 사실을 동료들에게 알리기보다 자신의 안위를 위해 회사와 거래를 한다. 하루 아침에 직장을 잃게 된 사람들에게 분노와 좌절, 놀람, 슬픔, 두려움은 매 순간 자리를 바꿔가며 덮쳐온다. 선한 사람들의 악행도, 어떤 결정이 의도치 않았던 또 다른 파장도 통제할 수 없는 것이기는 마찬가지였다. 과연 마카로니 프로젝트는 계획대로 진행될 것인가.
2012년 등단 이후 소설집 『암스테르담 가라지 세일 두 번째』 , 『망상,어語』 와 장편소설 『너도밤나무 바이러스』 , 『보편적 정신』 등을 펴낸 작가 김솔은 신작 『마카로니 프로젝트』 에서 공장 폐쇄라는 극단적인 상황에 버려진 사람들의 다양한 선택과 고민을 보여준다.
“인간이라는 것은 인간 자체로는 도저히 해석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이해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어느 상황, 어느 배경 속에 넣어봐야만 드러나는 것이고요.”라고 말하는 김솔 작가. “완성된 것, 영원한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세상과의 “관계 맺기”를 통해서만 인간을 좀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다는 작가는 관계와 구조 안에서의 인간이라는 문제에 천착한다. 우리 현실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마카로니 프로젝트』 는 이러한 작가의 고민이 밀도 높게 담겨 있는 소설이다.
거리감을 두고 시작하는 이유
‘마카로니 프로젝트’라는 제목에 여러 이야기가 있을 것 같아요.
특별한 의미는 아니에요. 소설이 이탈리아를 배경으로 하고요. 등장인물도 각기 다른 국가의 사람들이죠. 흔히 외국인들이 이탈리아에 관한 특징적인 것을 말할 때 가볍게 파스타와 피자, 마카로니 등을 떠올릴 거라 생각해서 지은 이름이에요. 이탈리아 사람들은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요.(웃음)
의외로 가벼운 작명이었네요?
그냥 외국인 입장에서 생각한 거죠. 한국에 대해 외국인들은 김치 같은 것을 떠올리지 않겠습니까. 만약 GM(미국 자동차 제조회사 제너럴모터스)이 이와 똑같은 프로젝트를 진행한다고 하면 ‘김치 프로젝트’처럼 연관성 없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 나라를 충분히 반영할 이름을 붙일 것 같았어요. 그래서 ‘마카로니 프로젝트’라는 이름을 지었습니다.
굳이 이탈리아를 배경으로 설정하신 이유는요?
똑같은 이야기를 제가 살고 있는 세상을 배경으로 하면 재미도 없겠지만요.(웃음) 서울에 대해, 제가 사는 곳의 이야기를 하면 사람들은 이야기자체보다는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바탕으로 곡해해서 읽을 것 같기도 했어요. 나름의 필터링을 할 것 같거든요. 사실 저도 이탈리아를 잘 모르지만, 이런 곳을 배경으로 이야기를 하면 읽는 분들도 일단 거리감을 두고 시작할 수 있을 것 같고요. 자기 이야기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쉽게 시작할 거라고 생각해요. 그러다가 그것이 실은 내 주변의 이야기라고 느끼게 될 거라는 생각으로 항상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등장인물도 외국인을 많이 쓰고요. 장소도 그렇죠. 이런 장치를 통해 진입장벽을 낮추고 싶은 마음이었어요.
다른 공간, 다른 인물을 쓰는 게 작가에게도 수월한 건가요?
그렇습니다. 저와 제 주위의 이야기를 하는 것은 힘들어요. 사실 관계가 엮일 수도 있고요. 제3의 인물, 나와 전혀 관계없는 인물과 환경을 설정해놓고 이야기를 하는 게 덜 힘든 것 같아요. 결국 제가 알고 있는 것, 경험하고 있는 것은 저의 작은 환경 안에 있기 때문에 다 투영이 되게 마련이지만요. 이 방식을 사용하면 자유롭게 조합이 가능한 것 같더라고요. 개인적으로는, 2012년 등단을 했는데요. 회사에서 발령이 나서 4년 간 벨기에에서 근무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것도 도움이 됐어요. 한국에 있을 때보다는 시간도 있고, 야근도 줄고, 술 먹는 일도 줄어서 글에 대해 조금 더 집중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 작품도 그 시기에 쓰셨어요?
어느 기간 동안에 온 건 아니고요. 회사 생활을 하고, 외국 생활을 하다보니 이런 이야기를 계속 생각해왔고, 하나씩 에피소드를 모으다가 글이 됐어요. 3개월, 6개월 안에 쓰인 것 같진 않고요. 긴 시간을 두고 완성된 겁니다.
인간은 특별히 대단한 존재가 아니다
소설의 시작이 궁금했거든요. 오래 담고 있던 이야기라고 한다면 이 이야기를 통해 전하고 싶은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었는지도 함께 묻고 싶습니다.
한 인간이라는 것은 인간 자체로는 도저히 해석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이해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어느 상황, 어느 배경 속에 넣어봐야만 드러나는 것이고요. 그것이 또한 그 사람의 본성은 절대 아니라고 봅니다. 상호 관계를 통해서 반영되고, 왜곡되는 과정에서 그런 모습을 보이는 것이지 다른 상황에 놓일 때는 달라질 거라고 생각해요. 가령 회사에서는 나쁜 사람이 집에 가면 좋은 아빠일 수 있죠. 과연 그것이 양립할 수 있을 것인가, 묻는다면 저는 가능할 것 같거든요. 인간이란 특별히 대단한 존재가 아닌 것 같아요. 이 글을 쓸 때도 그랬습니다. 어떤 상황에 인간을 집어넣고 그 사람이 어떻게 반응할까, 를 지켜본 거예요. 이 사람의 윤리적인 판단, 개인적인 성향 보다는 말이죠. 나의 아버지라면, 나라면, 내 누이라면 특별한 죄책감 혹은 사명감을 가지고 어떤 일을 할 것 같진 않았어요. 늘 하던 일을 할 것 같거든요. 그런 이야기를 써보고 싶었습니다.
선의가 항상 선한 결과를 가져오지 않는다거나 어떤 선택이 어디까지 영향을 끼칠지 알 수 없다거나 하는 식의 철학적 고민이 많이 담겨 있어요. 무거운 질문을 던지고 있는데요.
질문만 있고요. 답은 없습니다. 어떤 분들은 답이 없는 것을 불친절하다고 말씀하시기도 하셔서 죄송스러운 마음도 있습니다.
혹시 내심으로 생각하고 있는 답은 없으세요?
없습니다. 답은 없고, 질문만 있어요. 사실 답이라는 것에도 의문이 있죠. 동화책도 보면 ‘잘 먹고 잘살았다’로 끝나는 경우가 있잖아요. 그건 결론이 아닌데 말이에요. 그저 한 에피소드가 끝난 것일 뿐인데 그게 ‘영원히 잘 먹고 잘살았다’가 되면 오히려 기만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항상 마지막은 열어두어야 하지 않나, 생각해요.
그렇다면 이런 종류의 질문은 어쩌다 하게 되신 거예요?
일단 대학에 들어가서 새로운 세상을 경험하다보니 내가 아무것도 아니고, 내가 알고 있던 세상이 무엇인지 모르겠어서 방황을 했어요. 그 돌파구를 찾아보자 했던 게 독서였고요. 독서가 지나니 글을 써보자, 해서 천천히 진행된 건데요. 결국은 제가 그렇게 살았기 때문이에요. 지금도 조직에 속해 있잖아요. 회사를 다니면서도 이런 고민들이 있어서 그에 대한 반대급부로써 기록하자는 생각으로 소설을 쓰게 되는 것 같습니다. 이런 말씀이 어떨지 모르겠지만 저도 제가 회사에서 어떤지,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는 잘 몰라요. 내가 하는 짓은 잘 안 보이고요. 남이 하는 것이 보이는 거죠. 직장에서, 가정에서 제가 무언가 하고는 있다고 생각하고 있고, 선의를 가지고 어떤 일을 할 수도 있는데요. 그것이 그렇게 전달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아는 세상은 그래요. 그런 의구심을 항상 가지고 있습니다.
살면서 한 번쯤 하는 생각이기도 하지만 작가님처럼 여기에 천착해서 쓰기까지 하는 데에는 더 큰 동력이 필요한 일이잖아요. 심지어 작가님은 공대 출신에, 오래 조직 생활을 해온 직장인이시니까 좀 더 다르게 느껴지거든요.
뭐랄까요. 자기 점검을 하려고 애쓰는 거죠. 나라면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할까, 하는 건데요. 이 이야기는 저한테 벌어질 수도 있고, 인지하지 못했지만 벌어졌을 수도 있는 일이에요. 이런 상황에서 나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생각을 해요. 하는데요, 제가 쓴 것과 저의 행동은 또 다를 테니까요. 그것이 항상 고민이고, 걱정입니다.(웃음)
항상 비극은 진행형
배경 요소도 그렇지만 등장인물도 각기 다른 국가의 사람들이라는 점이 특이할 만해요. 이로 인해 서로가 감정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데요. ‘다국적’이라는 설정에도 의도가 있었겠죠?
유럽에서 4년 정도 지내보니까요. 일단 공용어가 필요한데 영어가 다들 모국어가 아니기 때문에 어떻게든 자기 의견을 정확히 표현하려고 노력하거든요. 천천히 말하고, 쉬운 단어를 썼어요. 그런 배려가 없으면 어려움이 있죠. 처음 만나는 사이도 그렇잖아요. 그래서 인물 설정을 그렇게 했고요. 또 한 가지는 이 회사가 무기 회사인데요. 사실 이 회사가 없어지는 것이 직원들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한테는 좋은 소식일 수 있어요. 무기가 없어지는 거니까요. 희생자가 줄어들 수도 있고요. 하지만 여기 있는 사람들은 그런 고민을 할 여력도 없는데다가, 선량한 사람들도 많은데 그런 이들이 피해를 보는 거죠. 이것을 바깥에서 보면 나쁜 의도를 가진 무기 회사가 없어지는 거니까 좋게 볼 수도 있고, 하지만 한 지역 사회로 보면 아수라장이 되는 거죠. 그런 이야기도 하고 싶었어요.
그런 반면 시간 배경은 현재잖아요. 2017년인데요. 공간이나 인물과 달리 시간에는 거리를 두지 않은 이유가 뭔가요?
이런 일은 언제 일어날지 모르는 일이고요. 과거에도 일어났고, 오늘도 일어났고, 내일도 일어날 것 같아요. 시간에 대한 생각은 저도 못했었는데요. 퇴고하면서 생각을 하게 된 거예요. 과거에 일어났다 한들 현재 일어나는 상황을 막을 수 있었을까요? 과거의 경험과 노하우가 그다지 현재의 불행을 막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항상 비극은 진행형일 것 같거든요. 미래에도 마찬가지고요. 이 사건을 현재에 놓든 과거에 놓든 큰 차이는 없다고 생각했어요.
초고 때는 시간 배경이 달랐나요?
이 작품을 2016년 <문예중앙>에 일 년 간 연재했거든요. 그때 기준으로 하면 2015년이 현재였겠죠? 그것을 책으로 만들면서 2017년으로 바꿨는데요. 연도를 그냥 숫자만 바꿨습니다. 사실 이걸 쓸 때만 해도 한국GM 사태와는 아무 상관이 없었어요. 지금 상황이 그렇게 되면서 걱정을 좀 했죠. 한편으로는 씁쓸하고요. 그런 면이 부각되는 게 부담스럽고, 그렇습니다. 한국GM 사태에 대해 저한테 질문을 하시니까요. 저는 이렇게 질문을 던질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답을 저한테 구하시는 분들이 있는 것 같아서요. 저는 답에 대해서는 자신이 없고요. 깜냥도 안 돼요.
“비극은 진행형”이라는 말씀은 정말 진실입니다. GM 사태가 워낙 뜨겁긴 하지만 이런 일은 쌍용자동차 때도 있었고, 한진중공업 때도 있었죠.
갈수록 한 지역에서 결정이 되고, 해결 되는 게 아닌 것 같아요. 특히 전 세계적으로 분산 되어서 운영되는 회사들은 똑같은 구조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판단하는 쪽과 판단되는 쪽, 경영하는 쪽과 생산하는 쪽, 피해를 보는 쪽과 소비하는 쪽이 다 다를 수밖에 없거든요. 분명히 한쪽의 결과가 다른 쪽에 영향을 미칠 거고요. 어떤 쪽에는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도 있어요. 미국 본사는 공장 하나를 없앰으로써 이익을 가져갈 수 있지만 한쪽은 분명히 손해를 볼 거고요.
누구도 결과를 명확히 알 수 없는 그 구조의 복잡성에 대해서 많이 고민을 하고 계시잖아요. ‘나비효과’에 대한 언급도 두어 번 나오고요.
네, 그렇습니다.
섣불리 판단하기에는
소설 시작 부분에서 감정을 중요하게 다루고 있죠. 작품 전반에는 특히 분노의 감정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있는데요.
분노 같은 감정은 즉각적인 반응이고, 상황을 맞닥뜨린 사람들의 일차적인 반응일 것 같은데요. 분노 자체가 궁금한 건 아니었어요. 그 분노가 어떻게 개인별, 시간별로 수용이 되거나 배척되는지 하는 것들이 궁금했습니다. 감정이 진행되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를 앞부분에 넣은 이유도 그런 건데요. 어떤 상황에서 누군가는 바로 분노를 느끼고, 누군가는 회의하는 등 여러 양상이 있잖아요. 그렇다면 그것은 하나의 감정이 아니라 전이된 감정일 테죠. 다만 앞뒤가 있을 뿐이지 크기의 차이는 별로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고요. 구조가 있긴 하지만 그 안에서 운영하고, 결정하는 것은 사람이잖아요. 결국 도구 자체가 사람이에요. 결정하고, 결정을 실행하고, 피해를 보는 모두가 사람이기 때문에 합리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건 없는 것 같아요. 사람이 일을 하는 동안에는 어쩔 수 없이 감정이라는 게 따라올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고요. 이런 상황에서는 죄책감을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조직 운영 양태를 이야기할 때 보통은 합리성이나 과학성, 통계, 수치 등을 근거로 한다고 말하죠.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아요. 비합리도 굉장히 많고, 감정적인 이유도 분명히 존재해요. 소설이 바로 그 부분을 다루고 있는 거고요.
맞습니다, 합리성이라는 게 누구를 위한 합리성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데이터의 정합성, 합리성이 상부의 결정에 도움이 될 수는 있어도 그 이외의 것들에 그 합리성은 적용될 수 있는 게 아닌 것 같아요. 어떻게 보면 사람들을 방에 가둬놓고, 아수라장을 만들고, 거기서 빠져나오는 사람만 구제해주는, 그런 구조겠죠.
그 빠져나온 사람들에 대해서도 꼭 말해야 할 것 같아요. 그들을 쉽게 악마적으로 표현하게 되는데 소설은 그렇지 않아요. 다면성을 보여줍니다.
개인적으로는 조직이라는 것도 신뢰하지 않지만 이념 같은 것도 신뢰하지 않는 것 같고요. 심지어는 인간이라는 것도 그리 신뢰하지 않는 것 같아요. 인간 자체의 기본적인 선의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그들의 언어나 이런 것들은 시간이 지나면 바뀔 수 있고요. 그럼 점을 제 스스로도 냉소적으로 보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요. 그 언어가 최선이라는 것은 알겠지만 정말로 그런 의도와 목적을 가지고 그런 행동을 했다고는 생각하기가 힘들더라고요.
어떤 경우 좀 더 악역을 맡는 사람도 있다고 생각하신다는 의미인가요?
그렇겠죠. 네. 하지만 그 행동을 두둔하려는 건 아니고요. 인간은 누구나 어디에 놓으면 똑같은 짓을 할 거라는 냉소를 말씀드린 겁니다.
아무리 진창인 곳에서도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지켜내려는 노력도 보였거든요. 냉소인지 잘 모르겠어요.(웃음)
말씀드렸듯 모든 인간에게 선의는 있다고 봅니다. 심지어 악당들한테도 자상함과 선함, 인간성은 분명히 있다고 보거든요. 하지만 인간이 언행을 할 때 그런 본성이 작용하느냐를 보면 그렇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에요. 어떤 상황에 들어갔을 때 똑같은 사람이지만 누구는 이렇게 반응하고, 누구는 저렇게 반응하잖아요. 똑같은 피해자이면서도 어떤 사람은 가해자 코스프레를 하고, 어떤 사람은 피해자로 남아요. 이런 복잡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모든 상황을 보고, 결과가 나오지 않는 이상 섣불리 판단하기에는 무리가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가졌던 게 저의 냉소고요. 분명히 인간은 다른 것보다는 위대할 겁니다. 그런 사람들이 존재했고요. 다수는 아니지만 말이죠. 있을 거라 생각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다수가 그렇지는 않아서요. 저는 경계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쪽이에요.
인사팀장 ‘니코’의 일화가 참 슬펐어요. 해고자가 딸을 데리고 찾아와 사과하는 장면인데요. 상황에 버려진 존재들에 대한 연민도 느껴지고, 니코가 느끼는 복잡한 심정도 오래 마음에 남았어요.
니코는 자신의 딸과 같은 또래의 소녀까지 차마 물리칠 순 없어서 머뭇거리면서 유리창을 내렸다.
“아빠가 영어를 못해요. 그래서 제가 대신 사과하러 왔어요. 지난번 공장에서 아저씨 바지에 페인트를 묻힌 일에 대해 정말 사과하고 싶대요, 아빠가.”
(중략)
하지만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아무리 자신이 최선을 다하더라도 오로지 자신의 가족을 위해 수백여 명의 동료들을 절망시켰다는 비난으로부터 해방될 수 없다는 사실을. 그래서 아까 그 남자는 인사팀장의 바지에 페인트를 묻히고도 사과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자신이 해고된다고 생각했고, 정식으로 사과한다면 다시 기회가 생겨날지도 모른다고 기대하는 것이었다.(105-107쪽)
남자는 아무리 생각해도 니코의 바지에 페인트를 묻혔다는 것 외에는 잘못한 게 없거든요. 진짜로 그랬을 겁니다, 아마. 하지만 그 남자를 살릴 수 있는 방법은 아무 데도 없는 거죠.
인간을 조감도로 봐야
이 작품을 쓰면서 가장 고심한 것은 뭔가요?
감정 쪽으로 너무 깊이 들어갈게 될까봐 걱정했어요. 그래서 5장이 탄생한 건데요. 원래는 진짜 원고지 2매 정도로만 써서 5장을 넘길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좀 더 내용을 넣은 거예요. 작품을 쓸 때 슬픔과 분노, 같은 감정에 매몰되다 보면 슬픔 속에서도 움직이고 있는, 살아 있는 인간에 대한 이야기를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그런 면을 의도적으로 줄이려는 생각을 했었죠. 그렇지만 혹시라도 제가 이 슬픔이나 분노를 사탕과 같이 받아들이는 것처럼 오해 받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사실적인 것들을 끼워 넣은 거예요. 5장의 ‘최종본’은 그런 생각으로 최근에 쓰여진 겁니다.
고인이 된 작가의 논픽션처럼 구성이 되어 있는 이유가 그것이었군요.
네, 심지어 작가조차도 이 땅에 살고 있지 않다는 설정으로 독자들로 하여금 ‘우리 이야기가 아니니까 한 번 읽어보자’라고 생각할 수 있도록 이야기를 드리고 싶었고요. 후에는 결국 ‘그 이야기가 우리 이야기다’라는 쪽으로 돌아오길 기대해서 작가마저도 죽은 것으로 설정하고 싶었습니다.
어떤 점에서는 작품 속 상황보다 한국 사회가 더 나쁘다는 생각도 들어요.
더 심하다고 봅니다. 우선 사회 보장 수준이 잘 갖춰져 있지 않고요. 그보다 더 심각한 것은 사회뿐만 아니라 회사도 마찬가지로 어디에도 제대로 된 프로세스라는 게 없다는 겁니다. 퇴직을 한 사람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서 재취업을 하게 된다든지, 취업을 하면 어떤 과정을 거친다든지 한다는 것들이 공무원 사회조차도 없는 것 같아요. 심지어 어떤 동아리에도 프로세스가 없죠. 결국 인간이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이 어마어마해진다는 이야기거든요. 한 사람의 결정이 전부예요. 거침이 없고, 검증이 없죠. 대기업 총수가 한 번 결정을 하면 아무도 반발을 못하고요. 결정을 검증하는 프로세스가 어디에도 없고,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도 모르고, 사회적 합의도 없어요. 사회적 보장 장치도 없는데 말이에요. 한국 사회는 양적으로만 팽창했지, 질적 팽창이 없다보니까 어느 지역, 어느 사회나 그런 면이 결핍된 거죠.
솔직히 작품을 읽으면서 ‘그래도 한국보다는 낫네?’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거든요. 적어도 회사가 해고와 공장 폐쇄 과정에서 애를 쓰기는 하잖아요. 직원의 처우나 정신적인 대비책도 고민하고 말이죠.
같은 일을 했지만 비정규직이라는 이유로 수백 명이 문자로 해고 통보를 받은 일이 있는데 법적으로는 아무 문제가 없죠. 그런 장치들이 없고, 장치를 고민하는 사람들도 없어요. 과정을 검증하는 사람들은 없고, 시작과 끝만 보는 거예요.
상황에 따라 한 인간도 다른 모습이 된다고 한다면 인간에게 조직이라는 것이 얼마나 큰 영향을 주는지, 그것과 어떻게 관계해야 하는지 깊이 고민해야 할 것 같아요.
인간이 혼자 존재하는 경우란 거의 없을 거예요. 수도승조차도 규율, 공통의 목적, 이해관계가 반드시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혼자 잠시 존재할 때만이, 고독해질 때만이 순수해질 것 같거든요. 그렇다면 관계 맺기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이 할 수 있는 이야기와 역할이 결정된다고 생각하고요. 아무리 좋은 뜻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도 조직에 들어가서 역할을 맡게 되면 그것은 그 사람의 생계나 생각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것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무리 좋아서 무슨 일을 하더라도 말이에요.
오히려 조직이나 관계를 떠난 인간이란 불가능하다고 말씀하시는 것 같아요.
그렇기 때문에 작품에서 자꾸만 배경과 관계 같은 것들이 눈에 밟히는 거고요. 한 인간의 내면으로 들어가는 것이 그 인간을 이해하는 방법은 아닐 것 같거든요. 밖으로 나와서 자꾸 조감도로 봐야 그 인간을 이해할 수 있지, 안으로 들어가면 오히려 길을 더 잃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앞으로 꼭 해보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들려주세요.
계속 질문을 던지는 건데요. 결국은 방심하지 않게 하고 싶어요. 가령 자선단체에 있는 사람들이 오늘은 자선활동을 하고 있지만 다른 곳에서는 다른 짓을 하고 있을 것 같거든요. 방심하지 않으려면 자기 갱신이 되어야 하죠. 그렇지 않은 건 인간이 가진 오만 같아요. 뭔가 완성된 것, 영원한 것이 존재한다는 생각. 저는 그런 건 없을 것 같아요. 그런 게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필요악이라는 게 생겨날 거란 생각이 들어서요. 자꾸 그런 식의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저의 이야기이고, 저의 누이와 아버지의 이야기이지만 그 이야기가 결국 우리들의 공통된 이야기라는 것을 알게 되는 이야기 말이에요. 그렇게 해서 발목을 잡고, 태클을 걸고, 못 가도록 싶은 마음이 있어요.
오만이라는 것, 자기 갱신의 필요성이라는 것, 이것이 특히 지금 같은 때에 더 중요하게 들리네요.
사람들은 오해하는 거예요. 그 힘, 그 권력이 자기한테서 나온다고 생각하는 건데요. 실은 거기에 잠깐 배경을 두고 실력을 행사할 수 있을 뿐이에요. 그런 고민을 자꾸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요. 괴로운 질문이지만 계속 던지고 있습니다. 변화는 쉽지 않잖아요. 모든 사람들이 변화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실제 변화하는 사람은 많지 않아요. 저도 그렇고요. 이것은 저에게도 중요한 질문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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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카로니 프로젝트김솔 저 | 문학동네
자본주의의 세계에서 회사란 무엇인지, 이 세계에서 온전하고 현명하게 살아가는 길이 무엇인지를 윤리가 아닌 생존의 영역에서 날카롭게 묻는다.
신연선
읽고 씁니다.
북버드
2018.03.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