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스플래쉬
“안나 씨, 얼굴색이 안 좋아 보여. 어디 많이 아픈 거 아니에요?”
대기실 소파에 앉아 책을 읽던 마르타 수녀가 다가와 걱정스런 얼굴로 조심스레 소곤거렸다. 눈썹을 잔뜩 찌푸린 채 모니터를 보며 처방전을 출력하던 김희정씨가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병원에서 쓰는 푸른색 일회용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괜찮아요 수녀님. 그냥 오늘 기침을 좀 더해서 그런가 봐요.”
마스크 위의 눈이 가늘게 웃고 있었다. 잔기침을 몇 차례 한 뒤 대기실을 훑어본 그녀가 난처한 말투로 수녀에게 말했다.
“오늘따라 늦게까지 환자가 많네요. 오래 기다리시게 해서 죄송해요 수녀님.”
마르타 수녀는 괜한 소리를 한다는 듯 손을 홰홰 저으며 앉아 있던 자리로 돌아갔다. 마르타 수녀 옆자리에는 열 살쯤 되어 보이는 여자 아이가 엄마와 함께 동화책을 보고 있었고, 반대편 소파에는 꽉 막힌 코를 킁킁대는 양복 차림의 젊은 남자(축농증에 걸린 것이 틀림없었다.)와 스마트폰 게임에 열중해 있는 남자 고등학생이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젊은 남자의 축농증과 고등학생의 설사, 그리고 여자 아이의 중이염과 엄마의 발톱 무좀에 대한 처방이 차례로 전달되는 동안 김희정씨는 데스크와 진료실을 부지런히 왕복했다. 처방전을 출력해 건네고 진료비 수납을 하는 손길은 평소와 같이 물 흐르듯 부드러웠지만 중간중간 기침이 나올 때마다 그녀의 얼굴은 찌푸려졌다. 기침 소리가 들릴 때면 마르타 수녀는 걱정스런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수녀님, 성경 필사는 잘 진행하고 계신가요?”
진료실 의자에 앉는 마르타 수녀에게 의사가 물었다. 그녀는 질문의 의미를 깨닫고 평온한 미소를 지으며 습관처럼 성호를 그었다.
“이 선생님 덕분이에요. 손 떨림이 나아졌으니 한동안 덮어두었던 노트를 아침마다 펼치고 있지요. 말씀을 그냥 읽으면 되지 굳이 쓸 필요까지 있냐고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렇지 않아요. 한 줄씩 천천히 쓰다 보면 그냥 지나쳤던 대목도 새로워서 다시 한 번 묵상을 하게 된답니다.”
“제 덕분일 리가 있나요. 다 위에 계신 분 뜻이죠.”
의사는 과장된 몸짓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그의 지나치게 공손한 말투와 어울리지 않는 행동은 모르는 사람이라면 빈정거리는 것처럼 느낄 수도 있었겠지만 수녀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매일 말씀의 씨를 뿌린다 해도 그것을 받아들이느냐 아니냐 하는 것은 각자에게 달린 문제예요. 모두가 그 말씀의 씨앗을 받아들여 영적인 충만함을 느낀다면 참으로 좋은 일이지만 세상은 그렇지 않아요. 공동체에는 언제나 반드시 밀과 가라지가 함께 자라나고 있게 마련이지요.”
멍한 표정으로 수녀의 말을 듣던 그가 너털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역시 수녀님께는 못 당하겠네요.”
“마태복음이에요. 이 선생님도 이제 다시 미사에 나오시는 게 어때요?”
유쾌하게 웃고 있던 그의 얼굴에 순간 어두운 표정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거의 동시에 진료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희정 씨, 가라지와 쭉정이의 구세주가 오셨군요.”
연극배우 같은 말투였다. 조심스레 문을 열던 김희정 씨는 준비 없이 갑작스레 무대로 떠밀려 나온 단역배우처럼 영문을 몰라 어리벙벙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그런 그녀를 보고 마르타 수녀도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웬일로 원장님 웃음 소리가 진료실 바깥까지 들리길래 궁금해서요. 이제 대기 환자도 다 정리되었고… 그나저나 이 문은 정말 손을 좀 봐야겠어요. 조용히 열려고 해도 그럴 수가 없네요.”
“이 선생님, 안나 씨한테 늘상 말로만 그럴 듯 하게 대접해주는 건 아니겠죠.”
“그럴 리가요. 이 병원은 제가 없어도 돌아갈 수 있겠지만 희정씨가 없으면 제대로 돌아가질 않아요. 저에게 욕을 퍼붓고 진료실을 나간 환자도 희정 씨를 거치면 금새 나긋나긋해지는 걸요.”
“그렇게 직원 고마운 줄 아는 원장이라면 직원 건강도 좀 챙겨야죠. 안나 씨가 한 달 넘게 기침하는 거 알고 있는지 모르겠네요.”
마르타 수녀의 퉁명스런 말에 그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감기 후에 기침이 좀 오래 가는구나 생각은 했는데, 벌써 한 달이나 된 줄은…”
“이거 봐요. 의사가 바로 곁에 있으면 뭐하나. 매일같이 얼굴을 보면서도 무심하기 짝이 없다니까.”
“수녀님도 참. 많이 나아졌어요. 저 괜찮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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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가 더 말하려던 김희정 씨가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너무 급하게 말을 이으려던 게 화근이 된 모양이었다. 한번 터진 기침은 멈추질 않았다. 발개진 얼굴로 기침을 참아보려 애쓰는 그녀를 마르타 수녀가 측은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가만히 있지만 말고 제대로 진찰 좀 해봐요. 그렇잖아도 바람만 불어도 날아갈 것 같은 사람이 기침을 하느라 안색까지 안 좋으니 쓰러질까 걱정이네요.”
“희정 씨, 기침 말고 다른 증상은 없나요?”
가까스로 기침을 멈춘 그녀가 가슴에 오른손을 얹고 심호흡을 몇 번 했다.
“처음 시작할 땐 콧물하고 가래도 있었는데 지금은 나아졌고 기침만 해요. 목이 계속 간질간질한데 기침 때문인 것 같아요. 감기 때문이려니 생각했는데 낫질 않고 오래 가니 저도 좀 걱정이 되네요. 사실 한 달 반쯤 되었거든요.”
“감기 때문에 그렇게 오래 기침을 하진 않아요. 감기 이후에 기관지가 예민해져서 기침이 오래 가는 경우야 있긴 하지만… 여기 잠깐 앉아보겠어요?”
머뭇거리는 김희정 씨의 손을 마르타 수녀가 잡아 끌었다. 의사는 펜라이트로 그녀의 인후부를 살핀 뒤 청진기를 들어 그녀의 가슴에 조심스럽게 밀착시켰다. 그의 청진기는 오래 전 레지던트 수련을 시작할 때 구입한 것이라 했다. 당시에도 꽤 높은 가격의 고급 제품이었음을 증명하는 두툼한 연결 튜브는 손때가 묻어 반들거리는 윤기가 사라진 지 오래였다.
김희정 씨는 간호 실습을 시작할 때 샀던 오천 원짜리 청진기를 떠올렸다. 환자의 혈압을 재는 법을 배우던 때, 처음에는 상완 동맥에서 들어야 할 박동을 놓치기 일쑤였다. 수강생의 대부분은 김희정 씨보다 나이가 한참 어렸고, 뒤늦게 시작한 만큼 뒤쳐지지 않으려면 더 열심히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따로 연습을 하려고 구입한 청진기였다. 혈압을 측정하는데 익숙해진 다음에는 함께 실습을 도는 학생들끼리 서로 숨소리를 듣기도 했다. 청진기를 갖다 대자마자 간지럽다고 몸을 움츠리며 깔깔대는 통해 제대로 듣기까지는 항상 시간이 걸렸지만. 청진기 너머에서 전해지는 어린 그녀들의 숨소리는 새털처럼 가벼웠다.
청진을 하는 짧은 시간 동안 그녀는 자신의 숨소리가 그에게 어떻게 들릴까에 대해 생각했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가 평소보다 커진 박동 소리를 알아챌지도 몰랐다. 목이 간질간질 해지는 것이 다시 기침이 터져나올 듯한 기분이 들어 그녀는 주먹을 꽉 쥐었다. 그녀의 이마에 땀이 배어 나왔다.
“숨소리는 괜찮아요.”
진찰하는 모습을 초조하게 지켜보던 마르타 수녀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의사는 수녀를 힐끗 쳐다본 뒤 말을 이었다.
“희정 씨도 알겠지만 위산 역류도 기침을 일으킬 수 있어요.”
“신물이 올라오거나 가슴이 쓰리지도 않고 소화도 잘 되는 편인데, 위산 역류 때문일 수도 있을까요?”
“그런 증상이 없다고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어요. 다른 증상 없이 기침만 하는 경우도 있거든요. 평소에 알레르기는 없었던가요?”
“환절기에 비염이 있긴 해요. 요즘은 예전만큼 심하진 않지만.”
“비염이나 축농증이 있는 경우에 콧물이 목 뒤로 넘어가서 자극을 하는 것도 오랜 기침의 흔한 이유지요. 후비루라고 하는데, 희정 씨 기침의 원인일 가능성이 많겠네요. 부비동 촬영은 해보는 게 좋겠어요.”
“그럼 결핵이나 암 같은 건 아닌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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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타 수녀의 질문에 김희정씨는 참았던 기침을 몇 차례 내뱉었다. 마치 기침으로 나쁜 기운을 몰아내려는 듯이. 의사는 수녀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다행이에요. 통화를 할 때도 내내 기침을 해서 그동안 내가 얼마나 걱정을 했는지.”
환자가 없는 대기실은 조용했다. 자신의 처방전을 받은 마르타 수녀가 소파 아래에 놓아두었던 종이 가방을 김희정씨에게 건넸다.
“도라지하고 배를 달인 물이에요. 기침 감기가 오래갈 때 마시면 좋더라구요. 내가 직접 만든 거니까 꼭 챙겨 마셔요.”
“수녀님….”
종이 가방을 받아 든 김희정 씨가 말꼬리를 흐렸다. 그녀의 얼굴이 다시 발개졌다.
“가라지인 저한테 주실 선물은 없나요? 좀 서운한데요, 수녀님.”
“우리 주치의 선생님껜 그분의 사랑을 드리지요.”
수녀의 대답에 다시 멍한 표정을 짓는 그를 보며 김희정 씨는 웃을 수 밖에 없었다. 그녀는 젖은 눈꼬리를 닦아내며 수녀를 따라나섰다. 마침 기다리는 환자도 없고 해서, 수녀가 극구 말렸는데도 일 층까지는 배웅할 생각이었다. 두 사람은 나란히 계단을 내려와 건물 입구에 멈춰 섰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차갑기만 했던 밤공기는 이제 겨우 서늘한 정도였다. 마르타 수녀가 크게 심호흡을 한 번 했다.
“들어봤어요? 사람에겐 숨길 수 없는 세 가지가 있는데 그건 바로 기침, 가난, 그리고 사랑이래요.”
어디선가 들어본 말인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김희정 씨는 수녀가 왜 갑자기 이런 말을 꺼냈는지 알 수 없었다.
“가라지를 통해서 밀이 튼튼해지는 법이랍니다. 가라지가 없다면 어떻게 사랑을 연습할 수 있을까요. 사랑을 쏟아야 할 사람이 없다면 말이죠.”
수녀는 김희정 씨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다시 목구멍 안쪽이 간질간질한 기분을 느꼈다.
기침은 지속 기간에 따라 3주 미만의 급성(acute), 3~8주 정도의 아급성(subacute), 8주 이상의 만성(chronic) 기침으로 구분할 수 있다. 3주 미만의 급성 기침은 감기와 같은 상기도 감염이나 기관지염 등이 가장 흔한 원인이다. 반면에 8주 미만의 아급성 기침 중 가장 흔한 것은 감염 이후에 기도가 예민해져서 생기는 감염 후 기침(post infectious cough)이다. 이 경우 감기나 기관지염이 호전된 후 다른 증상 없이 기침이 지속되는 것이 전형적이며, 증상에 대한 치료를 하며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연스럽게 나아질 수 있다.
오랫동안 기침을 하게 되면 기침 자체만으로도 가슴 통증이 생기거나 밤에 깊은 잠을 못 자게 되는 등 일상생활에 지장을 줄 수 있다. 8주 이상 지속되는 만성 기침의 가장 흔한 원인 세 가지는 후비루(posterior nasal drip) 증후군, 위식도역류, 그리고 천식이다. 후비루 증후군은 코 안쪽의 분비물이 목 뒤로 넘어가면서 기도를 자극해 기침이 생기는 것으로, 주로 알레르기 비염이나 부비동염(축농증) 등으로 분비물이 많아질 때 생긴다. 필요한 경우 부비동 방사선 촬영이나 비강 내시경 검사 등으로 점막의 염증을 확인하는 것이 진단에 도움이 된다.
후비루 증후군 다음으로 흔한 만성 기침의 원인은 기관지 천식과 위식도역류이다. 천식의 전형적인 증상은 쌕쌕거리는 소리나 호흡 곤란이지만, 이러한 증상 없이 기침만 있는 경우를 기침형 천식이라 부른다. 위식도역류는 서구화된 식습관과 비만 인구의 증가로 인해 지속적으로 늘어나는 추세이며 그만큼 위식도역류로 인한 만성 기침도 흔히 볼 수 있다. 속쓰림이나 위산 역류 증상은 위식도역류가 기침의 원인임을 시사하며 위내시경을 통해 식도 점막의 염증을 확인하는 것이 확실한 진단에 도움을 준다. 하지만 이런 증상이나 식도 염증이 없는 경우도 많아 진단이 쉽지 않다.
만성 기침의 원인을 찾기 어려운 이유는 흔한 원인 질환들 모두가 다른 증상이나 소견 없이 기침 증상만을 나타내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 개별 질환에 대한 치료를 먼저 해본 뒤 그 반응에 따라 단계적으로 진단을 할 수도 있다. 천식에 대한 흡입제나 위식도역류에 대한 위산 억제제를 처방하고 반응에 따라 다른 검사나 치료로 넘어갈지를 결정하는 것이다. 물론 환자 입장에서는 오랫동안 기침을 하는 것도 괴로운데 속시원한 진단이 바로 나오지 않으면 답답함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곧바로 치료를 중단하거나 다른 병원을 찾아가는 것은 오히려 손해일 수 있다. 그간의 진단을 위한 과정을 다시 반복해야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오승원의 반딧불의원’을 읽어주신 독자 분들께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오승원(서울대병원 강남센터 가정의학과 교수)
가정의학과 의사입니다. 만성 질환 예방과 건강 증진에 대해 관심이 많습니다. 환자를 만나고 그들과 나누었던 이야기를 기록합니다. 에세이 <반딧불 의원>을 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