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구X리타] 야쿠자의 심장을 가진 여자 - 존엄을 위해 싸우는 마음에 대하여
구구와 리타가 소개하는 '이상하고 아름다운' 책.
글 : 구구 (노혜지)
2025.0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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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길 만원 지하철에 고단한 몸을 싣고 꾸벅꾸벅 졸고 있던 어느 날, 별안간 젊은 남자의 새된 목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남자는 곁에 앉은 여자를 향해 전후 맥락을 파악하기 어려운 비난조의 말들을 지껄였다. 가만히 듣고 있기 거북할 정도의 욕설에서는 불길한 악의가 느껴졌다. 얕은 탄성과 한숨 소리가 들려오는 걸 보아, 그 칸의 모두가 남자의 목소리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때부터 내 뇌는 여자를 구해주기 위한 가상의 시뮬레이션을 돌리느라 분주해졌다. 남자에게 지금 뭐 하는 거냐고 소리를 질러볼까? 단전에서 끌어올린 호통 한 번으로 지하철에 함께 탄 승객들의 지지를 받아 남자를 절벽 끝까지 몰아세울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남자가 남의 일에 뭔 참견이냐고 대꾸한다면 어떻게 대응하지? 그가 나를 물리적으로 제압하려 든다면 내게 승산이 있을까? 상상이 점차 극단으로 치닫을 무렵 가슴이 세차게 박동하기 시작했다. 남자는 여전히 여자를 향해 욕을 퍼붓고 있었다. 그 욕은 여자뿐 아니라 그 칸의 모든 사람들에게 폭격처럼 쏟아지는 중이었다. 나는 걷잡을 수 없는 분노에 휩싸였다. 이윽고 나는 비장한 얼굴을 하고 남자에게 돌진했다. 그 다음 벌어진 일은 내가 가정하지 않은 일이었다. 온몸의 무게를 실어 남자의 발을 세게 콱! 밟은 것이다. 남자는 단말마의 비명을 내질렀다. 남자의 비명과 동시에 현실로 돌아온 나는 도망치듯 지하철에서 내렸다. 심장은 여전히 빠르게 뛰고 있었다. 나는 스스로를 다독이며 생각했다. 그래, 난 야쿠자의 심장을 가진 여자야... 가정이나 망상 따위는 애초부터 필요없지... 잘했어... 잘한 거야... 그리고 이 사건은 훗날 내가 정신과를 밥 먹듯 들락거리며 꾸준한 상담을 받게 된 계기가 된다...

 

최초의 기억이 시작된 순간부터 난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을 몹시 두려워하면서도 동시에 무슨 일이 일어나기를 애타게 기다렸다. 내가 기다리는 건 범인(凡人)에게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수준의 사건이 아니었다. 목숨을 걸고라도 해내야만 하는 일, 공포와 두려움을 억누를수록 순수한 성공에 도달할 수 있는 일이어야만 했다. 그러다 우연히 야쿠자라는 존재를 알게 되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듯 오직 기세만으로 삶을 돌파하며 극단적인 신념과 파괴력을 가지고 살아가는 야쿠자의 삶은 내가 꼭 닮고 싶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어리고 평범한 여자애가 목숨까지 걸어야만 해결할 수 있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나는 야쿠자의 심장을 나약한 껍데기 안에 숨긴 채 두려움 대신 따분함을 억누르며 지루한 나날을 보냈다.

 

나는 패기 넘치던 10대를 거쳐 무기력해진 20대를 맞이했다. 내가 통과해 온 불행한 일들, 예컨대 가난, 강간, 섭식장애, 왕따, 친구의 죽음 같은 일들은 맞서야할 사건이 아닌 무기력한 상태로 나를 구성했다. 불행은 밤의 손님이 되어 평온한 일상을 거칠게 두드렸고, 어쩌다 잠잠한 날에는 몸을 잔뜩 웅크린 채 두려움과 알코올을 벗삼아 하루를 버텼다. 신체는 산산조각나버렸고, 작고 초라한 신체에 갇혀 있던 거대한 영혼은 구멍난 독에서 물 빠지듯 서서히, 그러나 완전히 빠져나가버린 것만 같았다. 

 

그러던 어느 날, 어린 시절 단짝친구를 우연히 마주쳤다. 친구는 내가 많이 변한 것 같다며 초등학생 때의 내게 들은 일화를 말해주었다. 당시 전교에서 가장 인기 있던 남학생과 짝꿍이 된 나는 책상 가운데에 커터칼로 선을 그으며 이렇게 말했다. 너나 나나 이 선 넘어갈 때마다 손가락 하나씩 자르는거야. 그 애는 놀라 울음을 터뜨렸고, 결국 이 일은 어른들 귀에까지 들어갔다. 그 일로 나는 무릎을 꿇은 채 두 시간 동안 손을 들고 있는 벌을 받았다. 힘에 부쳐 온몸을 바들바들 떨면서도 반성의 기미가 보이지 않자 엄마는 혀를 내두르며 밥이나 먹으라고 소리쳤다. 엄마는 밥상을 차리며 읊조렸다. ‘독한 년...’ 

 

친구의 이야기를 통해 잊고 있던 기억을 마주하자 다시금 몸 안에 뜨거운 피가 돌기 시작했다. 인기와 권위에 굴복하면 죽음뿐이라 생각하고 그 애를 못마땅해했던 그 시절의 내가 떠올랐다. 그러나 지금은 어떤가? 인기와 권위에 굴복하다 못해 그것을 욕망하느라 나 자신을 완전히 잃어버리지 않았는가. 야쿠자의 심장을 잃은 나는 내가 아니었다. 나는 심장을 되찾고 싶었다. 이후 나는 야쿠자에 관한 영화, 드라마, 책을 다시금 섭렵하기 시작했다. 마치 나의 본령이 처음부터 야쿠자의 세계에 있던 것처럼. 『무지개여 모독의 무지개여』를 만나게 된 것도 바로 그 무렵이다.


 

이 책의 주인공 ‘긴지’는 불우한 유년시절을 보낸 뒤 모진 풍파를 겪어온 다른 조직원들과 달리 평범한 가족과 ‘정상적인’ 삶을 영위하다 무료함을 느끼고 가출해 야쿠자가 된 인물이다. 그는 권위에 굴종하고 육체와 영혼을 후들거리게 만들만한 감동과 공포도 느껴보지 못한 채 “멋도 재미도 없는 생을 구질구질하게 마감하는” 평범한 존재들에 넌더리 친다. 

 

평생 반역을 일삼아온 그는 이류의 자리에 안주한 채 살고 있는 두목을 암살한다. 그러나 상황은 불리하게 돌아가고, 훗날을 도모하기 위해 그는 잠시 몸을 숨기기로 한다. 과거 자신을 따랐던 동생 마코토가 살고 있는 한적한 시골로 간 그는 평화로운 바다와 오염되지 않은 하늘의 푸른 빛 앞에서도 기세를 잃지 않는다. 자신이 머물게 될 전파탑과 힘을 겨루고, 새벽마다 찾아오는 저승사자도 자신의 죽음을 결정하는 건 네가 아니라며 호통치곤 내쫓는 식으로 그는 여전히 기세등등하다.

 

하루는 마코토가 긴지에게 ‘문신’을 새길 것을 제안한다. 문신이 더 큰 세상으로 형님을 인도하리란 이유에서다. 그렇게 ‘백주 대낮의 긴지’는 전설적인 명인 ‘조각룡’을 만나게 된다. 긴지는 조각룡과 문신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다 맑은 하늘에 선명한 모습을 드러낸 무지개를 보게 된다. 여러 색깔이 저마다의 목소리를 내며 고유하게 살아있는 모습을 보며, 그는 무지개를 등에 짊어지는 것이 곧 “흐트러지려는 의지를 초월한 자신, 원래 존재했어야 할 자신을 회복할 수 있다는 확신”을 만들어줄 것이라 기대한다. 다른 사람과 섞이지 않은 채 고유한 기백을 형형하게 빛낼 자신의 앞날을 기대하며 긴지는 조각룡에게 등을 맡긴다. 

 

그런데 무지개를 새기기 시작한 이후부터 긴지의 본령은 흔들리기 시작한다. 근원 악 그 자체였던 사내가 주변 인물들의 죽음을 통해 자기 자신을 돌아보게 된 것이다. 그는 밤마다 자신을 죽음으로 인도하려던 저승사자가 실은 자기 자신이었단 걸 알게 된다. 그가 품어온 자유에의 욕망은 결국 자기파괴의 충동과 닿아 있었다. 조각룡이 무지개를 새긴 뒤 한 말처럼, 무지개는 사라지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무지개에게는 영속적인 운명이 허락되지 않는다. 여기에 생각이 미치자 천하를 호령할듯 서슬퍼렇던 긴지가 몸을 떨며 죽음을 두려워한다. 무지개를 새기기로 결심한 건 누구보다 사라지기를 원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가 내뿜던 살벌한 악의 기운도, 모두를 앞질러 살인을 저질러온 것도 모두 자신을 지키기 위한 여정이었던걸까? 그의 삶은 죽음을 두려워하며 도망쳐온 여정 그 자체였던 걸까? 작가는 결론을 내지 않은 채 긴지의 최후를 보여준다.

 

긴지의 최후를 바라보며, 나는 내가 폭력의 가장자리에서 일생 나 자신을 시험하며 살아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기다려온 극단적인 사건들은 사라지길 원하면서도 동시에 살아있기 위해 발버둥친 몸짓이었다는 진실을 깨달았다. 나는 오랫동안 '야쿠자의 심장'을 힘, 배짱, 무모함 같은 단어로 환원해왔고, 긴지가 그랬듯 그것을 방패처럼 온몸에 두른 채 살았다. 어떤 신념은 목숨을 바쳐야만 가능한 것처럼 비장하게 굴었고, 죽음으로 내달릴 수 있는 무모함만이 나를 구원하리라 믿었다. 몸을 내던지는 삶이야말로 가치있는 삶이라 여기면서 말이다. 하지만 내가 그토록 갈망했던 심장은 ‘나를 존중하지 않는 세계에 끝끝내 굴복하지 않겠다는 의지’였다. 그건 타인을 찌르기 위한 칼이 아니라, 나 자신을 지키기 위한 벽이었다. 그 선을 넘지 말라고, 그 선을 넘으면 나도 더는 나일 수 없다고 말하는 비장한 마음이었다.

 

긴지가 등에 새긴 무지개의 일곱 번째 색은 보라색이 아닌, 두려움처럼 짙은 먹색이었다. 생의 끝에서, 형형한 빛을 발산하던 여섯 빛깔은 혼탁한 먹색의 침범으로 본래의 빛을 잃는다. 내 등에 새겨진 무지개는 지금 어떤 빛깔을 하고 있을까? 지금은 ‘나’를 되찾고 싶다는 마음으로 가상의 문신을 새기고 있다는 사실만 겨우 알 뿐이다. 무지개는 아직 선 하나만 겨우 채워져있을수도, 아직 흐릿할지도 모른다. 분명한 건 마루야마 겐지가 말했듯, “인간인 동시에 인간을 초월한 시선으로 외계를 바라보”고, “더이상 낮아질 수 없을 만큼 낮은 시선도 함께 지니며” “비극적이면서 동시에 희극적인” 모순투성이의 삶을 살아가고 싶다는 점이다. 그렇게 야쿠자의 심장은 나의 심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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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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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5.30

구구님의 경험들과 긴지의 이야기가 포개지며 책이 정말 궁금해졌어요. 결의와 조심스러움, 두려움 같은 것들이 한데 모여 야쿠자의 심장이 되는 것 같아요. 책 꼭 읽어볼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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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nlsk26

2025.05.28

폭력이 아닌 나를 제대로 존재하기 위해 꺼내든 뜨거운 심장… 나도 그런 심장을 갖고 싶다! 뜨거운 글 너무 재밌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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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두팔

2025.05.27

이 글을 읽으니 몸 안에 뜨거운 피가 돌기 시작하네요.... 야쿠자의 심장을 가진 여자들 렛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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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구 (노혜지)

2017년부터 독서모임 공동체 ‘들불’을 운영해온 모임장. 들불이라는 이름은 2019년 모임 구성원들과 ‘함께’ 만들었다. 2020년부터 도서 큐레이션 레터 ‘들불레터’를 발행 중이며 동료와 함께 『작업자의 사전』(2024, 유유히)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