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리와는 거리가 멀었던 남편이 부엌으로 향했다. 암 투병중인 아내를 위해서다. 식욕도 소화력도 잃어가는 아내는 남편이 만든 음식만 겨우 입에 댈 뿐이다. ‘아내가 맛있게 먹을 수만 있다면...!’ 남편의 마음은 간절하지만 생각만큼 쉽지는 않다. 요리라고는 라면을 끓여본 것이 거의 전부였으니 무리도 아니다. 재료는 어떻게 고르고 손질해야 하는지, 어떤 순서로 조리해야 하는지, 도통 알 수가 없다. 인터넷에서 레시피를 찾아보지만 주방에 들어서는 순간 머릿속이 하얘진다. 그래서 기록을 시작했다. 페이스북에 조리 과정을 적어 내려갔다.
더없이 담백한 레시피일 뿐인데, 읽은 이들은 슬픔이 보인다 말했다. 이야기의 주인은 말을 아끼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전해져오는 무언가가 있었다. 사랑하는 이를 위해 밥을 짓는 마음, 그 시간이 언제까지 계속될지 알 수 없는 불안함 같은 것들이다. 가슴을 파고드는 그 기록들은 한 권의 책으로 엮여 세상에 나왔다. 제목은 『오늘은 좀 매울지도 몰라』 , 부제는 ‘떠나는 아내의 밥상을 차리는 남편의 부엌 일기’다. 서효인 시인의 말처럼 “침샘과 눈물샘이 동시에 젖는” 이야기다.
저자 강창래는 정혜인의 남편으로 35년을 살았다. 동네 친구로 만나 부부의 연을 맺은 두 사람은 출판계 ‘동지’이기도 했다. 아내는 출판사 알마의 대표였고, 남편 역시 오랫동안 출판 편집기획자로 일했다. 글 쓰는 인문학자로 『책의 정신』 , 『인문학으로 광고하다』 , 『유쾌한 창조』 , 『재능과 창의성이라는 유령을 찾아서』 등을 쓴 강창래는 올리버 색스의 『편두통』 을 옮긴 바 있다.
눈물이 나서 읽지 못했어요
『오늘은 좀 매울지도 몰라』 라는 제목이 긴 여운을 남깁니다. 직접 지으셨나요?
아닙니다. 책을 낼 생각으로 쓴 글이 아니다보니까 어떤 제목이 좋을지 생각도 못 해봤고요. 사람들에게 어떻게 읽힐 것인지 감도 잘 못 잡았었어요. 페이스북을 보고 편집자가 책으로 만들자고 제안을 했는데, 그때 저는 ‘이게 책이 될지 모르겠다’고 말했었어요. 누군가에게 들려주기 위해서 썼다기보다는 그냥 제 삶을 기록해두고 싶어서 썼던 글이었으니까요. 글을 쓰는 게 몸에 배어 있기도 했고, 글을 써야 내가 살아남겠다는 생각도 했었어요. 힘든 중에도 글을 쓰는 순간이 행복했거든요. 하고 싶은 말을 하지 못할 때였으니까요. 이전의 책들은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전달하기 위해서 쓴 거였지만, 이 책은 그렇지 않았어요. 책이라는 게 쓰고 나면 제 손을 떠나는 거지만, 이 책은 원래부터 제 손에 있지도 않았다는 생각도 들어요. 그래서 제목도 편집부에서 결정하게 했죠.
아내를 간병하면서 쓰신 기록인데, 다시 보면서 힘들지 않으셨어요?
힘들지요. 어쨌든 저도 편집자 출신이기 때문에 좋지 않은 문장을 못 보는 성질이고, 끊임없이 고쳐나가야 좋은 글이 된다고 생각하는데요. 이 책은 못 보겠더라고요. 책이 나올 때쯤 돼서 앞부분을 조금 보기는 했는데, 눈물이 나서 못 보겠더라고요.
문장이 아름답다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많아요.
그런 이야기들을 해주시는데, 개인적으로 글쓰기에 대해서 새로운 생각도 생긴 것 같아요.
이전에 쓰셨던 문장과는 달라진 것 같으세요?
그런 부분이 있죠. 글을 쓰는 입장, 내용 같은 것들이 다 달랐으니까요. 글쟁이 입장에서 보면, 에세이를 어떻게 쓰는지 알게 되는 계기가 됐다고 할까요. 이게 참 묘한 것 같아요. 굳이 슬픔을 전달하고 싶지 않았는데도 사람들이 매우 슬퍼하고, 또 문장이 담담하고 아름답다고 이야기하잖아요. 편집자 말로는 문장이 잘 절제되어 있어서 그런 것 같다고 해요. 저희 안사람도 편집자였는데 그렇게 칭찬을 해줬어요. 늘 제 글에 대해서 독하게 비판만 하다가(웃음), 마지막 선물처럼 그렇게 칭찬을 해주고 갔죠.
굉장히 담백하게 쓰셨는데, 어떻게 그러실 수 있었는지 의아합니다. 감정을 토로하고 싶은 마음이 드셨을 것 같거든요?
그런 면이 있기는 했는데요. 당시에는 안사람을 보살펴주고 있었기 때문에 ‘내가 쓰러지면 안 된다’는 생각이 강했던 것 같아요. 긴장을 늦출 수 없는 상황이었고요. 그러다 보니까 고통과 슬픔 같은 것도 편하게 털어내지 않으려고 했을 거예요. 그렇게 하는 것도 무너지는 거라는 생각이 있었으니까요. 그런 요인들이 작용하지 않았을까 싶어요. 가끔 혼자 울 때도 있었죠. 너무 힘드니까. 슬퍼서 울기도 했겠지만,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었잖아요. 음식을 조금 먹을 수 있게 해주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어요. 답답하고 힘들었죠. 그런데 누구한테 이야기를 하겠어요. 이야기할 수 있는 데가 없지요. 그러면 서재에서 조금 울기도 하고 그랬어요.
절제된 문장이지만 행간에 마음이 다 담겨 있는 것 같아요. 독자들은 그걸 발견하고 슬퍼하고, 또 감동을 받는 것 같고요.
저로서는 그런 생각 없이 쓴 거죠. 당시에 제 상황이 그랬던 것 같아요. 감정적으로도 절제를 해야 했고, 어디 드러낼 수도 없는 상황이었죠. 그런데 레시피는 써놔야 될 것 같았고... 사실 레시피를 써야 하는 이유가 슬펐잖아요. 그러다 보니까 저절로 그렇게 느껴지는 것 같아요. 어떻게 보면 훈련된 결과일 수도 있어요. 『인문학으로 광고하다』 를 썼을 때 글이 좋다는 반응들이 있었는데, 그때 처음으로 저도 제 글이 마음에 든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어떻게 그럴 수 있었냐고 물어보면 잘 모르겠어요. 당시에 인터뷰를 하고 책을 쓰기까지 네 달밖에 안 걸렸는데, 내용에 푹 빠져 있었어요. 이번 책은 그보다 더 긴 시간이 걸렸을 수도 있죠. 훨씬 긴 세월 동안 글을 썼고, 책을 읽었고, 글쓰기 강의도 많이 했으니까요. 제가 생각하기에는 총체적으로 나온 결과물인 것 같아요. 글쓰기가 몸에 배어있지 않았으면 안 썼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고요.
겨우 3년만 했을 뿐이잖아요
당시에 글을 쓰시면서 위로를 얻기도 하신 것 같은데요. 요리는 어땠나요? 의무감으로 하시는 일 아니었나요?
아뇨. 결과적으로 저한테도 참 좋은 영향을 미친 것 같아요. 내가 뭘 좋아하는지 알게 되는 과정이기도 했던 것 같거든요. 사실 경상도에서 자란 남자다 보니까 어릴 때부터 부엌에 안 들어가는 사람이었거든요. 또 안사람이 음식을 굉장히 잘했어요. 제가 들어가 봐야 방해만 됐죠. 설거지는 가끔 했지만요. 그런데 안사람을 보살피면서, 힘든 과정을 겪기는 했지만, 음식을 제대로 만들 줄 알게 된 거예요. 그리고 내가 만든 음식을 먹는 사람들의 표정을 보는 게 참 좋더라고요. 특히 안사람이 ‘맛있네, 정말 잘 만들었다’고 말해주면 너무 좋은 거죠. 내가 무언가를 해줬을 때 사람들이 행복해 하는 얼굴을 보는 것, 그걸 내가 참 좋아한다는 걸 알게 됐어요. 그래서 요즘에는 좋아하는 사람들을 집으로 초대해서 요리를 해줘요. 지금은 그때보다 음식을 훨씬 더 잘하거든요(웃음).
맛 평가에 있어서는 아내 분께서 엄격하셨던 것 같아요(웃음).
조금만 이상하게 만들면 안 먹었어요. 이걸 나 먹으라고 만든 거냐고 화도 내고 그랬거든요. 그래서 조금 울었던 적도 있어요(웃음). 나는 만들 줄 몰라서 그런 건데... 그래도 열심히 만들었다는 이유로 봐준 적이 없었어요. 제대로 만들면 정말 맛있다고, 먹고 싶었었는데 이제 살 것 같다고 했죠. 그런 이야기를 하는 순간에 누군들 행복하고 좋지 않겠어요. 그러다 보니까 시간 날 때마다 제대로 요리하는 방법을 연구하고 자꾸 익힌 거죠. 그러면 먹는 사람들이 행복해하고, 그걸 보는 내가 너무 좋으니까요. 만드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거나 그래서 힘들다는 생각은 별로 해본 적이 없어요. 아침에 7시쯤 일어나면 서너 시간 동안 부엌에 있으면서 준비하고 정리하고, 그러다 보면 오전이 다 지나가고, 그제야 다리가 아프다는 걸 느끼는 시간들을 보냈지만 저한테는 그 과정이 나쁘지 않았어요. 괴롭고 힘들다는 생각도 없었고, 의무니까 해야 된다는 생각도 안 들었어요.
간병하실 때는 많이 바쁘셨잖아요. 혼자 식사하실 때는 대충 때우기도 하셨고요. 요즘은 어떠세요?
잘 먹어요. 이제는 요리하는 데 익숙해져있고 재밌어요. 빠르고 쉽게 잘 만들 수 있는 실력이 생겼다고 할까요. 제가 콩나물국을 좋아하는데, 아침에도 10분이면 국 끓일 준비를 다 해요. 굉장히 익숙해진 거죠. 시간도 많이 안 걸리고 맛있게 만들 수 있으니까 굳이 안 해먹을 이유도 없어요. 요즘에는 몸이 조금 힘들어져서 잘 먹어야겠다는 생각도 들고요. 맛있는 거 잘 해 먹어요(웃음).
‘당신이 나를 돌봐줬으면 좋겠어’라는 부탁을 처음 받으셨을 때, 어떤 기분이 드셨어요?
그냥 해야 된다는 생각밖에 없었어요.
‘내가 어떻게 요리를 해?’라는 생각은 안 하셨어요?
잘 해야 될 텐데, 라는 생각이 없지는 않았죠. 그렇지만 선택의 여지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그냥 해야 된다는 생각이었죠. 안 사람이 못 먹거나 잘 먹지 않고 화내면 받아들이고 잘하려고 애를 썼고요. 또 금방 잘 했어요. 안사람이 그런 이야기를 했었어요. 내가 당신이 한 밥을 이렇게 오랫동안 먹을지 몰랐다, 게다가 맛있기까지 한 밥을.
3년 정도 간병을 하셨는데, 그동안 부부 사이에도 변화가 있었나요?
그렇기도 했죠. 사실은 암 선고 받기 전에 관계가 좋지 않았어요. 암 선고를 받고 제가 보살펴주기로 하고, 그 과정에서 안사람이 원하는 걸 해주고 싶었어요. 30년 동안 같이 산 사람이잖아요. 얼마나 긴 세월동안 해줘야 할지는 모르지만, 나밖에 해줄 사람이 없잖아요. 또 안사람이 저를 정말 좋아했어요. 제가 해야 하는 일이고, 안사람이 원하는 일이니까 하려고 했던 거죠. 애를 쓴 거예요. 최선을 다했다고 말하기에는 낯 뜨거운 면이 있고요. 잘하려고 애를 쓴 거죠.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잖아요.
따지고 보면 저는 겨우 2~3년 한 셈이고, 안사람은 저한테 30년 동안 밥을 해줬잖아요. 1/10 정도 되는 시간인데 뭐가 그렇게 길겠어요. 차이가 있다면, 아직도 사회적으로 여자가 밥을 하는 건 당연하고 남자가 하면 특별한 것처럼 이야기된다는 거죠. 게다가 저는 글로 썼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는 거고요. 따지고 보면 그게 그렇게 힘든 일일까 싶어요. 저는 30년 동안 밥을 받아먹었는데, 의리를 생각하더라도 어떻게 그걸 안 하겠어요.
곁에서 아드님이 큰 힘이 되어준 것 같아요.
옆에서 참 많이 도와줬어요. 제가 아들을 다시 보는 계기가 되기도 했죠. 사실 아이가 다 크고 나면 속 깊은 대화를 할 시간이 많지는 않잖아요. 엄마가 아플 때 아들이 어떻게 할지, 그건 겪어보지 않으면 모르는 거죠. 또 같이 간병을 하다 보니까 서로에 대한 이해도 조금 더 깊어졌어요. 아들이 있어서 든든하기도 했죠. 그 부분이 굉장히 컸어요. 아들이 없었으면 내가 끝까지 할 수 있었을까 싶기도 해요. 물론 끝까지 하기는 했겠지만 얼마나 힘들었을까 싶은 거예요.
죽음을 통해서 삶을 생각할 수 있기를
아내 분과는 동네 친구이셨다고요.
고등학교 때부터 한 동네에서 살았어요. 알고 지낸 세월이 40년인 거죠. 따지고 보면 인생의 전부라고 할 수 있는 시간이죠.
한 시기를 함께 보냈던 사람과 헤어지면, 내 삶에서 그 시간이 사라지는 것과 마찬가지잖아요.
뚝 떨어져 나가는 것 같죠. 마치 그 시간이 무덤으로 들어가는 느낌이죠.
그 사람하고만 공유할 수 있는 시간과 경험이 있고요.
그럼요. 정말로 우리는 친구처럼 살았기 때문에 그런 게 있죠. 그렇기 때문에 관계가 나빠졌다고 해도 서로에게 필요한 건 요구하기도 했고, 또 기꺼이 하기도 했던 거예요.
오랜 친구이자 부부였고, 출판계 일을 함께 하는 동지이기도 하셨죠. 정혜인이라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었다고 생각하세요?
79년부터 알고 지냈는데, 여자로 본 적도 없고 만나 적도 없었어요. 그냥 친구처럼 지냈죠. 그러다가 제가 제대를 하고 만났을 때 이 사람이 사는 모습을 보고 감동하게 된 계기가 있었어요. 안사람이 아트 타일 개발자로 일할 때 회사에서 정말 촉망 받는 직원이었어요. 월급도 상당했죠. 그런데 이 사람이 자기를 위해서는 아무것도 할 줄을 몰라요. 어릴 때부터 집안을 책임졌는데, 자기는 싼 신발을 사서 밑창이 떨어질 때까지 신어도 동생들은 금강제화 같은 곳에서 신발을 사서 신겼어요. 자기 건 아무것도 챙길 줄 모르는 사람이었어요. 처음 만났을 때 ‘어떻게 저런 사람이 있을 수 있을까’ 싶었죠. 저 사람이 원하는 걸 하면서 살게 해주고 싶다는 마음도 있었고요. 출판계 사람들도 다 알 거예요. 옆의 사람이 불편해 하면 자기가 못 견디는 사람이었어요. 그래서 늘 옆의 사람을 불편하지 않게 해주려고 애를 썼죠. 출판사를 협동조합으로 만들고 싶어 했던 이유도 그렇고요.
지켜보시면서 안타까운 마음도 드셨겠어요.
성인군자 같은 면모가 많은 사람이죠. 자기 것은 너무 못 챙기고, 남의 것은 어떻게든 챙겨주려고 하고. 인간적으로 굉장히 존경스러운 사람이었어요. 제가 농담 비슷하게 진담으로 하는 말이 있는데, 성인군자처럼 살아가는 사람하고 같이 사는 건 참 힘들어요(웃음). 그런 의미에서는 많이 힘들었어요. 그렇지만 어떤 사람인지 아니까 인간으로서 존경하는 마음은 끝까지 사라지지 않았어요. 제가 안사람을 보살펴준 것도, 인간적인 존경심이 없었다면 쉽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런 면에서 보면 미워할 수 없는 사람이죠. 그래서 출판계에서도 다들 참 좋아했죠. 일에 있어서는 단호했지만, 대체적으로 다들 좋아했어요. 이 사람이 성격이 그렇다 보니까 문병 오는 것도 싫어했을 거예요. 상대방도 불편할 거고, 당사자도 조금이라도 부담스러운 면이 있으니까, 그런 상황을 안 만들고 싶었던 거죠.
간병하시는 동안 ‘카르페 디엠’, ‘이 순간을 즐기자’는 생각을 자주 하셨던 것 같아요.
그렇죠. 거의 주문에 가까웠죠. 제가 늘 소개하는 낱말 중 하나가 ‘콜래트럴 뷰티(collateral beauty)’예요. 부수적인 아름다움이라는 뜻인데, 굉장히 슬픈 상황이지만 그 속에 한줄기 빛이나 기쁨 같은 것들이 늘 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슬픔에만 빠져 있지 말고 그것들을 찾고 느끼고 누리라는 거죠. 시간이 지나고 보니까, 저도 그러려고 애를 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안사람이 호스피스 병동에 마지막으로 두 달 동안 있었는데, 떠나기 전에 저한테 참 위로가 되는 이야기를 해줬어요. 저랑 함께했던 그 3년이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는 거예요. 사실은 참 아이러니한 거죠. 서로가 더 건강하고 더 뭔가를 잘할 수 있었을 때보다 그 시간이 훨씬 더 행복했다고 하니까요. 사실 이전의 30년도 행복하게 살려고 애를 썼던 세월일 텐데, 암 선고를 받고 행복해졌다는 게 참... 아이러니하죠.
떠나는 순간까지도 많은 걸 남겨주셨네요.
그러니까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돌이켜 보면 간병하는 동안 얻은 것도 참 많죠. 힘들지 않았던 건 아니지만, 어떻게든 그 세월을 잘 견뎌내고 즐겁고 행복한 순간들을 만들려고 애를 쓴 거잖아요. 만약에 제가 그렇게 안 했으면 평생 마음에 무거운 짐을 지고 있었을 텐데, 그렇다고 마음의 짐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안 한 것과 비교하면 가벼운 편이죠. 저는 그냥 해야 할 일을 했을 따름인데 많은 사람들이 응원해주고, 칭찬해주는 것도 부수적으로 얻은 것들이죠. 따지고 보면 제가 얻은 게 더 많은 거잖아요. 의도한 건 아니지만 이렇게 책도 내게 됐고요. 어차피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면 잘 넘긴 셈이라고 생각되기도 해요. 안 그랬으면 좋았겠지만,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나는 고통의 시간에 드물게 찾아주는 지극히 짧은 기쁨을 남겨두려 썼지만 독자는 오히려 슬픔을 읽는다”고도 하셨어요.
저한테 그 시절은 스냅 사진처럼 꼭 남겨두고 싶었던 순간들이었던 거예요. 그런데 많은 분들이 제 바람대로 읽어주시는 것 같아요. 책을 읽고서 슬펐지만, 살아있는 동안 조금 더 사랑하고 행복해져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말씀하시더라고요. 저한테는 그보다 더 좋은 이야기가 없죠. 죽음 자체를 생각하기보다는 죽음을 통해서 삶을 생각하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에요. 그냥 그럭저럭 살지 말고,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이고요. 그렇게 읽어주시는 것 같아서 글쟁이로서는 참 기쁜 일이에요. 의도하지 않았지만 다 담기게 됐고, 의도한 것 이상으로 받아들여주시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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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좀 매울지도 몰라강창래 저 | 루페
그나마 입에 대는 거라곤 남편이 마음을 다해 만든 요리뿐. 고통과 아픔 대신, 음식으로 만들어내는 짧은 기쁨의 순간을 붙잡아두기 위해 쓴 남편의 부엌 일기이다.
임나리
그저 우리 사는 이야기면 족합니다.
kally77
2018.05.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