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읽어야 결국 잘 말할 수 있다. 읽는 데 도가 트면 말하기는 자연스럽게 체득된다. 스피치라는 거대한 신기루를 잡기 위해 너무나 많은 에너지를 낭비하고 있는 주위 사람들을 볼 때마다 우리는 달을 가리키면서 손가락을 보지 말라고 조언해왔다. 이제 여러분에게도 알려주고 싶다.(39쪽)
우리는 어떤 경우 ‘말을 잘한다’고 할까. 재치 있는 말? 청산유수 같은 말? 지식이 뚝뚝 묻어나는 어려운 말? 『내레이션의 힘』 을 쓴 성우 박형욱과 김석환은 말을 잘하려면 잘 읽는 것이 우선이라고 말한다. 과연 “읽는 데 도가 트면” 자연스럽게 말하기가 익숙해질까. 지난 4월 27일, 도곡동 마이북서점에서 진행된 『내레이션의 힘』 의 출간 기념 강연회에서는 책의 두 저자 박형욱과 김석환이 성우의 일과 성우의 비밀, 내레이션으로 시작하는 말하기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메시지보다는 메신저가 중요하다
KBS 성우 박형욱은 21년 동안 <무엇이든 물어보세요>의 내레이션과 <정도전>, <징비록>의 엔딩 내레이션, <우리말 겨루기>, <막돼먹은 영애씨>의 내레이션 등을 해온 베테랑 성우다. 그 밖에 지하철 안내 방송, 대영박물관 한국어 서비스 안내 멘트 목소리의 주인공이기도 한 박형욱은 “제가 그냥 ‘안녕하세요’라고 인사를 하면 모르지만 ‘지금 들어오는 열차는’이라고 하면 알아채신다(웃음)”며 우리 일상에 녹아 있는 성우들의 목소리에 대한 이야기를 간략하게 점검해 보았다. 박형욱은 “성우들이 우리 생활 요소, 요소에 침투해있다. 지하철, 비행기, 금융ARS 등 여러 곳에서 말을 하고 있다. 그런 우리가 왜 『내레이션의 힘』이라는 책을 쓰게 되었는지 강의를 통해 이해해주시기 바란다.”고 말하고 성우 김석환에게 마이크를 넘겼다.
성우 김석환은 KBS 라디오 <다큐멘터리 역사를 찾아서>의 진행자이자
“사람에게 가장 먼저 전달되는 것이 말의 내용일까요, 말의 톤일까요? 톤이 먼저 전달됩니다. 여러분이 가장 많이 착각하는 것이 이것이에요. 메신저가 중요할까요, 메시지가 중요할까요. 대부분은 메시지만 정확하고 진실하다면, 메시지가 논리적으로 완벽하다면 누구든지 설득할 수 있다고 아주 큰 착각을 해요. 그런데 메시지와 메신저 중 더 중요한 것을 굳이 선택한다면 메신저입니다.”
성우 김석환은 어떻게 전하느냐가 무엇을 전하느냐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무엇을 전하느냐는 화자의 삶이 반영될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한 사람의 말에는 약 100여 가지 정보가 담겨 있다고 해요. 전화 통화를 한다고 생각해보세요. 성별, 성격, 체형, 교육 수준, 건강 상태, 출신 지역 등을 대략 파악할 수 있을 겁니다. 보통 사람은 100여 가지의 정보 중에 10-15개를 파악합니다. 예민한 사람은 20-25개를 파악한다고 해요. 사람의 말 안에는 그 사람의 삶의 정보가 오롯이 들어 있습니다. 그것은 나이가 들수록 감출 수가 없어져요.”
우아하지 않은데 우아한 척, 선하지 않은데 선한 척을 하면 대중들은 그것이 거짓이라는 사실을 금방 알아차린다고 김석환은 말했다. 그래서 “성우들은 내 말 안에 어떤 정보를 담을 것인지 늘 고민한다.”는 것이다. “인간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 이 상황에서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어떻게 걸어가야 내 소리에 좋은 정보들을 쌓을 수 있을지” 고민하는 것이 좋은 목소리를 만드는 요소이다.
스피치보다는 내레이션이다
내 몸이라는 관악기 전문가로서의 성우는 소리의 공명점, 호흡 등에 대한 이해가 필수다. 성우가 보통 사람들과 목소리가 다르게 들리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김석환은 공명점에 따른 소리 변화와 아이의 목소리, 노인의 목소리가 어떻게 다른 특징을 갖는지 등을 살펴보고 말의 방향을 바꾸는 것만으로 좀 더 명확하게 소리를 전달할 수 있다는 점을 설명해주었다. “좋은 목소리 톤을 갖는 건 상대를 설득하는 데에 매우 중요한 요소”라면서 보통 사람들이 성우의 목소리를 가질 수 있는 간단한 방법을 직접 코칭해주기도 했다.
“몸이라는 관악기를 가지고 좋은 목소리 톤을 갖고 있는 우리 성우들이 가장 잘하는 것이 뭘까요. 바로 말하기, 스피치, 내레이션입니다. 그런데 스피치에 대해서 조금 의문을 갖게 됐어요. 왜 스피치를 잘하고 싶은지 생각해보면 그렇습니다. 여러분은 친구와 대화하고 싶어서 스피치를 잘하고 싶으세요? 아니죠. 먹고 살려고, 예요. 사회가 원하니까요. 조직이 원하니까 스피치를 잘해야 하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제가 제안하는 건 이겁니다. 스피치 잘할 필요 없다. 우리에게는 내레이션이 필요하다.”
말이 갖는 영향력은 음악에 비할 바가 아니다. 더 직접적이고 더 강력하다.(중략) 말도 노래처럼 아는 만큼 보이고 들은 만큼 들린다. 그리고 그런 사람이 내레이터로서 훌륭한 내레이션을 할 수 있다. 비로소 ‘점’을 찍을 수 있는 것이다.(214쪽)
김석환은 “제대로 읽고 품어서 표현하는 말하기 예술”을 내레이션이라고 정의했다. 성우라는 직업이 있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듯 제대로 읽고 품어서 표현하는 것은 “경제적 가치가 생겨날 만큼 특별”한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그러니까 내레이션은 그냥 ‘낭독’이 아니다. 읽는 것(낭독)과 읽고 표현하는 것(내레이션)은 다른 일이라는 사실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내레이션은 권력자의 무기였습니다. 모세가 십계명을 선포할 때 어떻게 했을까요. 어떤 의지를 갖고 읽어내서 표현했을까요. 옛날부터 이것을 누가 잘하느냐에 따라 권력이 정해졌습니다. 모든 권력자들은 읽어서 선포했습니다. 고대 아테네의 모든 귀족과 권력가들이 반드시 배워야 할 것은 수사학이었잖아요. 현재를 볼까요. 대통령이 훌륭한 스피치를 할까요? 이 분들 앞에는 원고가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생각은 안 그렇죠. 스피치를 프리토킹이라고 생각하시는 거예요.”
아나운서의 시선 닿는 곳에 있는 프롬프터, 무대 앞에 놓인 그 프롬프터는 프리토킹보다 내레이션, 읽고 표현하는 일의 중요함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한다. 김석환은 “스피치라는 이상한 허상”을 지적하면서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것은 스피치 능력이 아니었고, 정리된 것을 설득력 있게 선포하는 것, 즉 내레이션이었다”고 말했다.
풍성하게 읽는 힘
그렇다면 내레이션을 잘하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읽는 훈련은 우선 국어에 대한 관심에서부터 시작한다. 우리는 ‘새 차’와 ‘세차’를 구분하지 않고 발음한다. 김석환은 “그런데 영어의 ‘r’과 ‘l’의 발음은 구분한다”는 점에 의문을 던지면서 왜 “‘새 차’와 ‘세차’를 구분하자고 하면 이상해하는지”되물었다.
“특별해지는 것은 별 것이 아닙니다. 남이 안 하는 것을 하면 특별해집니다. 저희 성우들이 그런 것처럼 말이죠. 때문에 국어에 대한 관심, 굉장히 중요합니다. 여기서 정말 중요한 것은 호흡입니다. 저희가 방송 때 항상 얘기하는 게 있어요. ‘너의 호흡 상태, 너의 감정 상태, 너의 눈빛을 청자는 카피한다’라는 말인데요. 내가 불안하면 듣는 사람도 불안해요. 또, 거기에 메시지를 품어야죠. 말이라는 건 하는 사람이 듣는 사람에게 전달해야겠다는 욕심이 있어야 해요.”
『내레이션의 힘』 에서 소개한 몇 가지 내레이션 솔루션을 들려준 김석환은 “말을 잘하기 위해서는 이 이상은 필요 없다”고 확신했다. 내레이션만으로 충분하다는 그는 “쓰인 글들을 풍성하게 읽는 힘을 기르면 된다. 아이에게 동화 읽어주는 부모처럼 말이다. 다양한 감정을 넣어 읽는 연습을 매일 5분만 하길 바란다.”고 ‘내레이션의 힘’을 강조하며 강연을 마쳤다.
-
내레이션의 힘박형욱, 김석환 저 | 예문아카이브
개인의 화술 역량을 키우는 데 정작 무엇이 필요한지 알게 되고, 청중의 마음을 움직이는 말하기가 어디에서 비롯되는지 깨닫게 되며, 평소 잘 들리지 않던 다른 사람들의 ‘말하기’가 들리게 된다.
신연선
읽고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