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하림 “A지만 B가 있을 거야“
좋아하는 일본의 변비약 카피 중에 ‘이 정도로 안 나올 거면 엉덩이에 구멍 같은 건 필요 없지 않나’가 있어요. 그걸 보면서 이 사람 변비 걸려봤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마찬가지로 그런 이야기를 제대로 전달할 수 있으려면 나한테도 경험이 있어야 된다고 생각해요.
글ㆍ사진 신연선
2024.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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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표기식

 


‘TBWA’ 카피라이터, ‘무신사’ 마케터를 거쳐 현재 ‘29CM’의 헤드 카피라이터로 일하고 있는 오하림 작가는 문맹률이 이토록 낮은 나라에서 모든 사람들이 글쓰기를 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 매일 주고받는 카톡 메시지, 관심을 불러 일으키는 SNS 게시물, 그 밖에 다양한 업무 보고서까지 하루에도 몇 번씩 글쓰기를 하는 사람들에게 약간의 차별화된 단어 선택만으로도 한층 특별한 글을 쓸 수 있다는 점을 말하고자 했다. 『카피라이터의 일』은 11년 차 카피라이터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법을 보여주고, 그로부터 탄생하는 ‘한 끗’이 다른 문장을 소개하면서 “글이라는 도구”(42쪽)를 자유자재로 활용하는 팁을 알려준다. 사소한 차이를 알아채기, 단점을 장점으로 전환하기, 좋아하는 것을 최선을 다해서 알리기는 좋은 글뿐 아니라 좋은 삶의 태도를 만든다는 점을 보여준다. 

 

 

우리 모두 글을 쓰고 말하는 사람들 


부드럽게 말을 건네는 듯한 문장에 눈길이 가요. 어떤 고민으로부터 이러한 톤이 결정된 건가요? 

편집자 님과 엄청 고민을 했어요. 반말로 쓸지, 존댓말로 쓸지, 또 존댓말이라면 ‘습니다’체를 쓸지, ‘해요’체를 쓸지까지도 고민했는데요. 제가 ‘29CM’에 오면서 ‘해요’체를 많이 쓰고 있거든요. 그것이 조금 더 친밀하게 말을 전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게다가 『카피라이터의 일』이라는 겁 없는 제목으로(웃음) 시작을 했으니까요. ‘카피라이터란 이런 것이다’라는 말을 기대하는 분들께 조금 더 친절하게 다가가고 싶었고요. 그런 면에서 ‘해요’체가 역할을 잘 해주는 것 같아 결정했어요. 폰트를 정하는 것까지도 고심했는데요. 책의 폰트는 책의 목소리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런 식으로 전체적으로 편하게 다가가게 하기 위한 고민이 있었어요. 

 

겁 없는 제목이라는 말씀이 재미있어요. 그것은 어떤 독자를 상상하셨는지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할 것 같은데요. 구체적으로 상상한 사람이 있었을까요? 

사실 이 책은 제게 조금 도전적이었어요. 이 직업에 관심 있는 사람들만 읽으면 어떡하지, 하는 고민도 있었고요. 그러다 결국에는 최대한 담백하게 이 일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일단 카피라이터가 생각보다 다양한 일을 한다는 내용처럼 카피라이터에 대한 오해를 풀고 싶기도 했고요. 특별한 사람이 하는 게 아니라는 점도 말하고 싶었어요. 한국은 문맹률이 낮은 나라잖아요. 또 요즘은 글에 대한 관심도 많아지고 있으니까요. 목적 있는 글쓰기의 유용함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면 많은 분들이 일상에서도 충분히 활용할 수 있는 부분이 있을 거라 생각했어요. 우리 모두 글을 쓰고 말하는 사람들이잖아요. 모두에게 유용한 책이면 했어요. 

 

“이 책을 만나는 모든 이에게 글만이 줄 수 있는 감동과, 전략적 메시지로서의 글의 유용함과, 또 글이라는 막연함에 대한 고민과, 글이라는 도구를 계속 써나갈 내일에 대한 이야기를 전하고 싶습니다.”(11쪽)라고 하셨죠. 

생각하면 모두가 매일 카톡을 하고, 보고서를 작성하면서 글을 쓰고 있어요. 누군가에게 어떤 것을 전하기 위한 글, 목적 있는 글을 쓰고 있는 셈이죠. 저는 그 부분에서 다시 생각해보자는 제안을 하고 싶었어요. 조금만 바꾸면 좋은 메시지가 되기도 하고, 더 다정하게 들릴 수도 있거든요. 보고서를 쓸 때도 마찬가지예요. 약간만 다른 말, 살짝 귀에 걸리는 말을 쓰면 달라져요. 그런 내용은 모두에게 적용될 수 있을 거예요. 

한편으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매일 쇼핑하고, TV 광고를 보는데요. 그럴 때 저의 이야기를 들으면 광고도 재미있게 볼 수 있겠다 생각했어요. 만든 사람의 취지와 의도를 이해하면 늘 보던 것도 다르게 보이잖아요. 제가 독립출판을 한 적이 있거든요. 책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알게 되니까 서점에서 보이는 게 너무 다르더라고요. 다 소중하고(웃음) 종이를 어떤 걸 썼는지까지 보였어요. 특히 창작을 하는 사람들은 어떤 창작물을 보면 그 뒤에 있는 걸 궁금해하잖아요. 그러니까 저도 카피라이터의 일과 관련한 다양한 이야기들을 앞으로 꺼내고 싶었어요.

 

흔히 ‘카피라이터’라고 하면 반짝이는 아이디어, 영감 같은 것을 떠올리게 되는데요. 작가님은 “세상 모든 것들은 재료가 됩니다.”(49쪽)라고 했거든요. 아주 간명하면서도 어려운 말이에요.(웃음) 세상의 모든 것이 어떤 방식으로 카피라이터를 통과하면 마음을 건드리는 문장이 되는 걸까요?

카피라이팅은 아주 뚜렷한 목적이 있는 글쓰기예요. 우선 위에서 주문이 내려오죠. “재미있는 것 좀 써봐” 하고요. 언제 송출 예정이고, 어떤 모델을 쓰고 싶고,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내용이 내려오면 저희가 해석을 시작해요. ‘재미란 무엇인가’부터 말이에요. 뭐가 재미있는 것인지, 어떤 모델을 썼을 때 더 파급력이 있을지, 사람들이 우리한테 어떤 걸 기대하는지 생각하죠. 이 브랜드가 유행어를 쓰는 회사인지 아닌지 같은 세세한 부분까지 브랜드 입장에서 고민하면서 단어들을 거르고요. 동시에 구조를 잡아요. 강렬하게 터뜨릴 것인지 기억에 남는 말을 만들 것인지 장치적인 고민도 하죠. 그런 여러 과정을 통해서 재미있는 글이 나올 수 있게 다방면으로 고민하는 것 같아요. 

저는 기록을 엄청 하거든요. 메모장에도 하고, 캡처도 하고, 녹화도, 사진도 찍는 식이에요. 기억력이 너무 안 좋아서 시작한 것인데요. 그게 쌓이니까 굉장한 아카이브가 됐어요. 예를 들어 화장실 비데에 대한 카피를 쓴다고 하면요. 그 기록 자료를 찾아봐요. 화장실은, 배설하는 곳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피로를 씻어내는 곳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어요. 아니면 임신 소식을 가장 처음 아는 곳이라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거든요. 너무 다양하죠. 그러니까 그러한 주변의 것들을 모아놓고, 다시 들여다보면 도움이 많이 돼요. 표현을 따라한다기보다 생각의 방향을 보는 거예요. 그러면서 화장실이 소중한 공간일 수 있겠구나, 나라면 화장실이 어떤 방이어야 할까, 하는 식으로 생각을 이어 나가는 거예요. 

 

화장실을 ‘방’이라고 표현하니까 확실히 새로운 느낌이 드네요.  

실제로 ‘TBWA’ 선배님들이 쓴 카피가 있어요. 화장실은 아이디어가 태어나는 곳, 같은 이야기들을 착착 쌓아서 ‘욕실은 가장 아름다운 방이어야 합니다’라는 카피를 만들었거든요. 그런 것은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 속에서 태어났을 거라고 생각해요. 카피라이팅을 하려면 다양한 생각이 많이 필요하기 때문에 기록을 열심히 하죠. 

 

말씀을 들으면 일련의 작업이 아주 순차적으로 잘 진행될 것 같지만, 실제로는 다르겠죠? 카피가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 속에서 나왔을 거라고도 하셨는데 굉장한 협업의 작업이기도 한 것 같고요. 

제가 다녔던 광고 회사는 보통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아트 디렉터, 카피라이터 등 네다섯 명으로 구성이 됐어요. 한 팀에 그림을 보는 사람과 글을 보는 사람이 있는 건데요. 저희는 딱히 경계를 두지 않았어요. 글 쓰는 사람도 그림을 찾아오고, 디자인을 하시는 분들도 글을 썼거든요. 최대한 회의실 안에서 화학적인 시너지가 날 수 있도록 다양하게 아이디어를 나눴고요. 결과적으로 카피라이터가 필터링을 하는 과정이었어요. 카피라이터 혼자 뚝딱 하는 일은 거의 없죠. 오히려 디자인 하시는 분들이 되게 살아 있는 글을 쓰시기도 했어요. 덕분에 거기에서 힌트도 많이 얻었어요. 협업은 굉장히 중요해요. 

 

사진 : 표기식

 

좋은 것을 알리는 마음


“시간이 허락하는 한 카피를 발로 쓰려고 합니다.”(65쪽)라는 문장도 얘기해보고 싶어요. 되어보기의 중요성을 말씀하신 부분이었어요. 

경험을 이길 수는 없는 것 같아요. 상상조차도 경험 안에서 가능하거든요. 저는 전단지에 혹해본 사람이 전단지도 잘 쓴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최대한 경험을 하려고 해요. 그러면 쓰는 게 확실히 다르더라고요. ‘리그 오브 레전드’와 관련한 카피를 써야 한 적이 있어요. 일단 썼는데 누가 봐도 게임을 모르는 사람이 쓴 것 같은 거예요. 저는 그걸 들키지 않는 게 직업적 소명이라고 생각했어요. 그 게임을 좋아하는 분들이 봤을 때 전혀 모르는 웬 직장인이 쓴 카피를 보면 얼마나 별로겠어요. 그래서 그 게임을 하는 친구와 PC방에 갔죠. 아이디는 어떻게 만드는지부터 시작해서 게임을 해봤는데, 달랐어요. 마지막 타격을 ‘막타’라고 한다거나 누가 플레이를 너무 잘하면 ‘누구 님이 미쳐 날 뛰고 있습니다’ 같은 알림이 뜬다거나 하는 부분이 눈에 띄더라고요. 덕분에 그런 내용을 카피에 넣을 수 있었어요. 고직 PC방 한 시간의 경험이 그렇게 달랐던 거죠. 

제가 좋아하는 일본의 변비약 카피 중에 ‘이 정도로 안 나올 거면 엉덩이에 구멍 같은 건 필요 없지 않나’가 있어요. 그걸 보면서 이 사람 변비 걸려봤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마찬가지로 그런 이야기를 제대로 전달할 수 있으려면 나한테도 경험이 있어야 된다고 생각하고요. 의자에 앉아서 사례만 찾고, 이미 있는 것 안에서 고민하기보다 어렵지 않은 경험 정도는 최대한 하려고 해요. 

 

업무 시간 외에도 일을 위해서 시간을 들이는 셈인데요. 그러는 와중에 사이드 작업도 계속 하고 있어요. 페이스북 페이지 ‘내가 광고회사 힘들다 그랬잖아’와 인스타그램 ‘도보마포’를 기획하고 운영했잖아요. 

‘내가 광고회사 힘들다 그랬잖아’는 정말로 힘들어서 만들었어요. 대나무숲처럼 쓰려고요.(웃음) 털어놓으니까 해소가 되더라고요. 사람들이 공감하니까 더 좋고요. 그렇게 회사 몰래 하다가 어느 순간 고백을 했거든요. 단 시간에 유명해지기도 했으니까요. 그때 놀랍게도 대표님이 너무 좋아하셨어요. 디지털 광고 대행사였는데 ‘디지털 툴을 이렇게 잘 활용하고, 반응을 이 정도로 잘 끌어내는 사람이 우리 회사 직원이다!’ 말씀하시더라고요. 그 말이 힘이 됐죠. 동시에 밖에서 하는 일이 결코 회사 업무와 상관없지 않다는 생각도 하게 됐어요. 밖에서 풀었으니까 다시 회사 일도 힘내서 할 수 있었고요. 

첫 페이지를 홧김에 만들었다면 두 번째 페이지는 달랐는데요. 제가 합정 살거든요. 원래는 용산이나 논현, 잠실 같은 데 살다가 이사를 왔는데 동네의 표정이 달랐어요. 연령대도 다르고, 직장인보다는 돈은 없지만 꿈은 있는 사람들이 많고요. 그런 분위기나 에너지가 너무 좋더라고요. 또 이 동네 토박이 친구가 있어서 함께 로컬 카페 같은 곳을 다니다 보니까 더 좋아졌죠. 이건 사람들이 알아야 한다는 확신이 들었어요. 그래서 30년 넘게 이 동네에 산 사람이 추천하는 로컬 페이지, 꼭 가야 하는 곳을 만들었죠. 근데 동네가 상수, 망원, 합정, 연남, 연희, 동교, 서교 등 넓어서 걸어 다니기 힘들어요. 그래서 실패하지 않는 도보 루트를 만들어주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도보마포’가 된 이유예요. 그런 작업에 사람들이 반응하는 걸 보면서 재미를 느꼈던 것 같아요. 

 

힘들어서 힘들다고 얘기하던 데에서 이것이 왜 좋은지를 말하는 방향으로 바뀌었다는 점이 좋네요. 지금 하고 계신 ‘일본 광고’도 그런 거잖아요. 

이것은 완전히 기획한 거예요. 책을 내겠다 생각하고 시작했거든요. 아까 말씀드린 저의 아카이브 가운데 가장 많은 부분이 일본 광고 카피예요. 거의 18,000개 정도 있어요. 그걸 모아놓고 보니까 사람들도 이런 다양한 생각을 알면 재미있을 것 같은 거예요. 제 자료에는 텍스트만 있어서 원본을 계속 찾아봤거든요. 거기에 더해 그 카피라이터가 인터뷰한 기사를 찾아서 기획 의도를 함께 보니까 더 좋아졌어요. 그래서 그것들을 시간 날 때마다 올리기로 한 거예요. 

 

그건 어쩌면 나만의 보물상자 같은 걸 텐데요. 그 상자를 공개하는 거잖아요. 그런 면에서 망설임은 없었는지 궁금하네요. 

전혀 없었어요. 저는 좋은 게 있으면 다 공유하는 스타일이에요. 좋은 곳을 발견하고, 안 유명해졌으면 좋겠다 말하는 경우도 봤는데요. 그 말은 좋은 곳을 죽이는 말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카피라이터라는 직업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것도 이 일을 오래 하려면 이 직업의 위상이 올라가야 된다는 생각인 거거든요. 이 직업을 더 알고, 재미있는 직업이구나, 생각해야 전체의 수명이 늘어난다고 생각해요. 그런 의미에서 좋은 것을 공유하는 걸 진짜 좋아해요. 

약 7년 전부터 매년 제 생일에 문장을 엮어서 친구들한테 선물을 주고 있어요. 역시 시작은 같은 마음이었어요. 문장들을 모으고 나니까 나만 보기 아깝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걸 책으로 엮어서 선물하면 어떨까 싶었는데 마침 제 생일 즈음이었고요. 사실 지금의 내가 될 수 있었던 건 이 문장들과 내 옆에 있는 친구들의 평균이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그런 마음으로 친구들에게 나의 생일 선물을 주기로 한 거죠. 반응이 정말 좋았어요. 그래서 계속 했는데요. 할수록 좋은 일들이 많이 생겼어요. 이젠 멈출 수가 없죠. 그런 경험을 통해 좋은 게 있으면 숨기지 않고 나누는 게 나한테도 좋고, 주변한테도 좋은 거라는 걸 다시 한 번 확신하게 됐어요. 

 

사진 : 표기식

 

장점과 단점의 끝은 연결되어 있다


“이 일은 어떤 식으로든 알게 모르게 나의 생을 지탱하고 구원해주었다.”(9-10쪽)고 하셨잖아요. 그만큼 카피라이터의 일이 작가님의 삶과 긴밀하게 영향을 주고 받는 것이겠죠? 

언젠가 봉준호 감독님이 영화인을 꿈꾸는 사람을 대상으로 한 강연 중에, 영화를 만들 때 어떤 생각을 하느냐고 묻자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나는 관객을 모른다, 모르니까 나를 위해서 만든다, 라고요. 관객을 모르니까 나를 만족시킬 수 있는 최상의 것들을 만들어내기 위해 노력한다, 나도 거기서 구원을 받는다, 라는 이야기였는데요. 저는 회사도 그렇다고 생각해요. 회사는 힘든 게 기본값이죠. 원래 그런 곳이지만 나를 키워줬고, 나도 회사를 위해 헌신했고, 그 과정 속에서 만난 소중한 동료들이 있잖아요. 그러면서 같이 성장해왔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회사를 너무 싫고 짜증 난다고만 생각하면 끝도 없는 것 같아요. 그냥 그 부분을 인정하는 대신 월급이나 동료처럼 거기서 얻은 것을 생각하면서 마음을 내려놓는 연습이 필요한데요. 저는 그 과정에서 확실히 일이 나를 지탱해 준 부분이 있다는 걸 알게 됐어요. 

 

번아웃도 고백했잖아요. 좋아하는 일을 계속 좋아하려면 좀 덜 좋아하는 연습이 필요하다고도 하셨는데요. 

일단 적당히 좋아하는 건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해요. 좋아하면 다들 끝까지 좋아하잖아요. 그래서 문제죠. 마음의 100%를 써버리니까요. 좋아하는 걸 끝까지 좋아하는 걸 한 번쯤 해보는 건 필요한 것 같은데요. 그게 반복되면 소진은 피할 수 없어요. 생각보다 빨리 소진이 되거든요. 다시 힘을 쓰려면 새로운 것이 들어와야 하는데 회사와 집만 오가면 들어오는 게 없으니 번아웃이 당연히 올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마음을 적당히 쓸 필요가 있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 거예요. 

TBWA에 다닐 때 유병욱 CD님은 ‘평판과 식판’이라는 것으로 일을 구분하셨어요. 평판을 위해서 열심히 해야 되는 일과 우리를 먹여 살리는 일을 구분한 거죠. 덕분에 강약 조절을 배우게 됐어요. 단순히 하기 싫은 일, 너무 많은 일이 아니게 되더라고요. 우리를 먹여 살려주는 것도 엄청 중요하고 숭고한 일이잖아요. 그런 경험을 하면서 마음을 많이 써야 되는 것과 덜 써야 되는 것이 있다는 걸 알았고요. 이후부터는 연습을 하면서, 너무 힘들 때는 동료를 믿으면서 일하게 됐어요. 힘들 땐 힘들다고 얘기하면서요. 

 

동료에 대한 신뢰이기도 한 것 같아요. 일과 나만 있는 게 아니고 동료도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면 혼자 심한 번아웃에 빠지지는 않게 될 것 같고요. 

첫 회사에 다닐 때, 팀장님과 저뿐이었어요. 모든 행정 처리나 일정 조정을 다 제가 했죠. 와중에 아이디어도 생각해야 했고요. 너무 부담스러웠어요. 그러다 TBWA로 옮겼는데요. 여전히 그 불안이 너무 심해서요. 녹음실에 가는 택시 안에서 카드를 쥐고 있을 정도였어요. 결제를 내가 해야 하니까요. 그런 것들을 제 사수가 눈치챈 거예요. 한 번은 혼났어요. 나를 못 믿는 거냐고 하시더라고요. 그때 선배나 동료들이 있다는 걸 처음 알게 됐어요. 믿어야겠다, 내가 이러는 게 능사는 아니다, 어떻게 보면 되게 거만한 거였다, 하고요. 이것이 상대를 신뢰하지 않는 행동으로 비칠 수 있잖아요. 동료를 믿는 연습이 필요하다는 것을 그때 알았어요. 

 

그럼에도 번아웃은 다시 오죠. 그럴 때 작가님은 어떻게 하세요? 

청소를 하면 좀 비워지는 것 같아요. 정신과 의사들도 가장 쉬운 것부터, 예를 들면 이불 정리부터 하라고 하는데요. 주변을 정갈하고 깨끗하게 하면 확실히 달라져요. 사람이 공간에 영향을 많이 받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도망치거나 청소하는 식으로 물리적인 노력을 해요. 가령 냉장고 청소를 하고 나면 너무 좋잖아요. 원래는 차가운 쓰레기통이었다가(웃음) 청소를 하고 나면 기분이 달라요. 마음 가짐도 청소가 되는 것 같고요. 사실 저도 그걸 믿지 않았는데요. 해보니까 알게 되더라고요. 

 

사진 : 표기식

 

소심한 성격이 궁리로 연결되고, 그것이 기록으로 연결되면서 카피라이터의 장점으로 발현되었다고도 했어요. 구체적으로 어떤 경험이 있었는지 듣고 싶어요. 

제가 팀장님 서포트를 되게 잘해요.(웃음) 소심한 게 예민한 것과도 이어지는데요. 예민하면 누군가가 불편하다는 걸 빨리 알아채요. 저는 팀장님과 회의가 있으면 5분 정도 일찍 회의실에 가서 방의 온도나 주변 소음, 냄새 같은 것들을 체크하는 스타일이었어요. 아무래도 이쪽 사람들은 예민한 부분이 있으니까, 그 사람의 100%를 끌어내려면 환경도 중요하다 생각했고 좋은 환경을 조성하고 싶은 마음이었죠. 또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나 새로운 걸 볼 때 속으로 장점과 단점을 계속 생각해봐요. 그런 것이 새 브랜드를 맞을 때도 도움이 됐어요. 또 소심하니까 최대한 고민을 하고, 그걸 잊지 않으려면 글로 정리하게 됐는데요. 글로 정리하면 정제된 것들이 나오잖아요. 그렇게 저도 모르게 훈련을 많이 했던 것 같아요. 저의 결핍이라고 생각했던 소심함 때문에 했던 많은 것들이 이 일에는 장점이 되더라고요. 

김이나 작사가가 장점과 단점은 끝과 끝이 연결돼 있다는 말을 했는데요. 어떤 사람은 예민하지만 그 끝에 섬세함이 있잖아요. 그러니까 한 가지 면으로만 자신을 평가하면 포장지를 반쯤 뜯는 것 밖에 되지 않는다, 그렇게 살면 아깝다고 했던 이야기가 기억에 남았어요. 장점과 단점에 대한 생각을 다시 하게 됐죠. 지금은 나 소심한 거 맞아, 하지만 나는 이런 걸 보는 눈이 있지, 그렇게 생각하려고 해요. 

 

반대로 카피라이터의 일이 작가님 개인의 성향이나 기질에 끼친 영향도 있을 것 같아요. 좋은 점을 잘 발견하는 능력이 이 일의 가장 큰 장점이라고 쓴 부분도 떠오르네요. 

확실히 좋은 것들을 찾아내는 능력이 많이 생겼어요. 곳곳에 있거든요. 어떤 사람은 신경질적이지만 그에게도 좋은 점이 있어요. 그래서 A지만 B가 있을 거야, 하고 마인드를 세팅하려고 하죠. 예를 들어 국내 여행은 풍경이 새롭지는 않지만 비용은 저렴하다든가 하는 식으로요. 굳이 좋은 점을 찾아내는 거예요. 제가 엄청나게 긍정적인 사람은 아니지만요. 그런 생각이 습관적으로 나오는 것 같아요. 

 

지금 작가님을 가장 설레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소문 내고 싶지는 않았는데요. 작사 학원을 다니고 있어요. 카피라이터가 할 수 있는 일이 또 있지 않을까 하다가 찾아보게 된 건데요. 학원을 다니면서 똑같은 것을 보지만 다른 재료로 쓸 수 있는 것이 있다는 걸 알게 됐어요. 작사는 발음 디자인이거든요. 보통 데모곡이 외국어로 와서 그 발음을 한국어로 바꾸는 작업을 하는데요. 완전히 새로운 영역이더라고요. 사실 노래 가사를 보면 뻔하잖아요. 좋아하고 사랑한다는 내용이에요. 그렇지만 학원에 다니고 나서는 그렇게 안 보여요. 너무 대단해 보이죠. 이 안에도 드라마가 있거든요. 드라마 한 편을 쓰는 거예요. 그래서 수업 받는 게 너무 재미있어요. 

 

 

*촬영 장소 : 로컬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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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연선

읽고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