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만족스런 일상을 위해 라이프스타일 콘텐츠를 소비한다. 그런데 인테리어 잡지나 라이프스타일 전문가들이 절대로 하지 않는 말이 있다. 바로, 살림살이와 이웃의 존재다. 사진 속에는 예쁘고 멋진 공간이 수도 없이 많이 펼쳐지지만 그 속에 살림이나 이웃의 흔적이 드러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그 어떤 라이프스타일 콘텐츠에서도 아이들이 장난 치고 있는 장면 외엔 살림살이를 꺼내놓고 있다거나 이웃과의 험한 꼴을 봤다는 이야기를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다.
정리를 잘하고 청소를 잘하는 것과 별개로 사람이 살다보면 필연적으로 널 부러질 수밖에 없는 것들이 몇 가지가 있다. 빨래 건조대, 옷가지, 싱크대의 물기, 설거지 건조대에 쌓인 그릇, 욕실 수건, 온갖 세제와 청소 용품 등이 그런 것들인데, 아무리 리모델링을 하고 집을 꾸며도 이런 게 나오는 순간 모든 게 리셋이다. 당연히, 잡지 같은 데선 살림의 흔적이 싹 정리된 멀끔한 모습만 보여준다. 뻔한 연출인 것을 이제는 알 때가 됐지만 나처럼 갓 체크인한 호텔 방과 같이 정돈된 일상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이런 미장센을 보면서 매번 혹한다.
공간이 넓어서 드레스룸이나 건조기를 보유한 세탁실이 따로 있으면 그나마 다행이다. 그럼에도 습기와 통풍을 생각했을 때 모든 걸 눈앞에서 사라지게 어딘가 처박아둘 수는 없는 노릇이고, 옷감이나 그릇의 소재를 불문하고 무조건 건조기에 맡길 수도 없는 형편이 현실이다. 그래서 무섭게 발전 중인 라이프스타일 분야가 바로 수납인데, 문제는 아무리 누군가가 획기적인 아이디어를 내놓는다고 해도 완벽한 결론이 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육아나 웨딩업계처럼 늘 새로운 이야기와 콘셉트가 끊임없이 돌고 돌 뿐이다. 이게 살림의 본질이다.
이웃의 존재는 일상의 평온을 침해하는 더 큰 차원의 문제다. 안타깝게도 오늘날 이웃은 다정한 온기보다 평온한 일상에 심각한 위해를 지속적으로 가할 수 있는 불안 요소일 확률이 높은 게 현실이다. 고를 수도, 바꿀 수도 없이 철저하게 운에 맡길 수밖에 없는 환경인데, 우리처럼 층간 소음이 심각해도 괜찮은 건축법이 통용되는 데다 공동체 의식이 희박한 사회에서 나쁜 이웃을 만날 확률은 세스 로건이 당한 경우보다 훨씬 높다고 할 수 있겠다.
삶의 지혜가 부족해 거의 대부분의 경우 시행착오를 겪는 나는, 몇 해 전 모두가 꺼리는 낡은 구옥 빌라를 이리저리 고쳐서 나만의 일상 공간을 마련한 적이 있다. 그 당시는 리모델링, 셀프인테리어 등이 쿨한 문화로 대접받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현실과 잡지의 가장 큰 차이는 사진 한 방 찍고 끝나는 게 아니라 계속해서 그 공간에 살아야 한다는 점이었다. 진짜 라이프스타일은 인테리어의 완성, 그 후에 완성되었다. 좁은 공간은 삶의 흔적을 감추기 턱없이 부족했고, 동네에서 그 건물만이 유독 방치된(값이 싼) 이유도 그다지 멀리 있지 않았다.
공동건물에 살면서 내부만 고친다고 안락한 일상이 보장될 리가 만무하다. 겨울이 지나자 실내 흡연이 일본보다 관대하다는 걸 알게 됐고, 종량제가 시행된 지 30년째를 바라보지만 쓰레기 배출은 맨하튼의 주민들과 다를 바 없이 자유분방했다. 현관문 밖의 모든 시설물에 철저히 무관심했다. 그래서 처음엔 성산동에서도 과거 베를린처럼 스쾃(squat) 운동이 펼쳐지는 줄 알았다. 지금은 여러 난관을 거치고 반상회를 조직해 서로간의 반목과 불신을 그나마 누그러뜨리고, 보수 공사를 마무리하고 환경 미관에 대한 합의를 어느 정도 이뤘다. 여기까지 오는 데 2년이 걸렸다.
이런 터프한 현실에서 평온한 일상과 현실 살림의 조화를 이루는 데 도움이 되는 몇 가지 아이템과 출구전략이 있다. 앞서 언급한 반상회와 같은 커뮤니티는 의외로 오지랖에 대한 불편함보다 나만의 평온한 일상을 지킬 수 있는 방어체제가 된다. 물론 많은 노력과 인내와 때로는 불심도 필요하다. 따라서 요즘 유행하는 소확행에 맞게 더 작은 단위의 노력으로 현실과 이상의 절충을 볼 수 있는 방법을 소개하고자 한다.
그중 가장 간결하고 실용적인 솔루션이 바로 예쁜 빨래 건조대의 구입이다. 인테리어를 망치는 첫 번째 주범이 널어놓은 빨래고 두 번째가 육아관련 용품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흔하게 쓰는 생필품 마트에서 파는 플라스틱과 가는 알루미늄으로 만들어진 빨래 건조대는 실용성은 좋지만 심미적인 가치까지 따지면 가성비가 결코 좋다고 할 수 없다.
그래서 요즘은 라이프스타일 전문 매장이나 디자이너들이 한 차원 높아진 소재와 디자인으로 만든 빨래 건조대를 내놓고 있다. 대표적인 상품이 나무로 만든 빨래 건조대들이다. 사실 유럽에서 오래전부터 쓰던 가장 고전적인 빨래 건조대인데 다시금 새롭게 각광받고 있다. 어디 치워놓지 않더라도 집 안 소품으로 보이는 데 큰 무리가 없고, 무엇보다 나무 소재가 주는 안온함과 여유가 거실에다 빨래를 널어놓았을 시 삶의 무게가 느껴지는 듯한 축 처진 분위기를 잡아준다. 그래서 요즘 일상 용품의 메카인 일본 도쿄에 가보면 나카메구로나 아오야마 같은 훌륭한 동네의 생활용품점, 라이프스타일 쇼윈도에서 심심찮게 멋진 빨래 건조대를 만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여러 회사들과 목수들이 빨래 건조대 사업에 본격 뛰어들고 있어서 최저가에만 집착하지 않는다면 오픈마켓에서도 드넓게 펼쳐진 새로운 빨래 세상을 만날 수 있다.
공간이 너무나 부족한 원룸 같은 경우는 일명 자바라 스타일의 빨래 건조대를 활용하면 심미적인 가치와 효율적 수납의 묘를 극대화할 수 있다. 다만, 구조 상 이불 빨래나 니트 소재 등 무거운 빨래를 많이 걸어 놓기엔 아쉬운 점이 있으니 이 점을 이해해야만 한다.
옷은 우리를 즐겁고 멋지게 만들지만 집 안에서만큼은 여유롭고 세련된 일상 풍경을 해치는 대표적인 짐이다. 이런 이율배반적인 상황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집 안의 모든 옷걸이를 한 가지 디자인과 소재로 통일한다.(실제 나무면 가장 좋다) 세탁소 옷걸이와 비닐 커버가 옷방에 걸려 있는 게 최악이다. 유사시를 대비해 두어 개를 제외하고는 그대로 세탁소에 벗겨두고 오는 게 물자 절약을 위해서나 일상의 행복을 위해서나 두루두루 훌륭해지는 생활의 팁이다. 물론, 최선의 방안은 모든 방 안에 드레스룸이 딸린 집을 구하는 거다.
김교석(칼럼니스트)
푸른숲 출판사의 벤치워머. 어쩌다가 『아무튼, 계속』을 썼다.
kailise
2019.02.11
shinsia82
2018.06.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