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언제부터 ‘쇼크(shock)’를 느꼈을까?
화약을 사용하는 소총이라는 개인화기가 주어지고 이를 효과적으로 운용하기 위한 제식훈련이 시작되면서 보병부대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방식의 전력을 갖게 된다. 바로, 적에게 ‘공포’를 느끼게 하는 전력이다. 이것은 폭약의 폭발력이나 총탄의 사정거리와는 비교될 수 없는 ‘심리적 전력’이다. 기계처럼 잘 훈련된, 절도 있는 동작으로 몰려오는 보병집단은 적에게 엄청난 공포를 심어주었다. 이러한 공포는 ‘쇼크(shock)’라는 단어로 개념화되었다.
오늘날 ‘쇼크’라는 단어는 주로 ‘정신적 평형을 해치는 갑작스러운 장애’를 지칭한다. 그러나 이 단어는 원래 군사적 용어였다. 쇼크의 독일어인 ‘Schock’의 의미는 ‘불확정적인 양, 대부분 사람들 무리나 병사들 무리를 나타내는 개념’이었다는 것이다(볼프강 쉬벨부쉬 저, 박진희 역, 『철도여행의 역사』 , 궁리출판, 1999년, 192쪽 이하). ‘무리’ 혹은 ‘집단’의 개념이 ‘갑작스러운 심리적, 신체적 장애’의 의미로 바뀌게 된 것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적 작업 결과다.
‘쇼크’의 개념은 보병의 제식훈련과 개인화기의 집중사격전술이 개발되었던 18세기부터 일상 용어로 존재하고 있었다. 잘 훈련된 병사들이 무리를 지어 먼 거리에서 다가오며 일제히 사격하는 ‘집중사격전략(Salventaktik)’이 개발되었을 때, 적들은 이전까지 느끼지 못한 공포를 겪게 되었던 것이다. ‘무리’가 ‘공포’로 바뀌는 순간이다. 적의 인명살상보다는 심리적 위협이 훨씬 더 효과적인 무기였던 것이다. 쇼크에 빠진 적들은 싸워보지도 못하고 스스로 무너졌다.
프로이트는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쇼크’를 자신의 ‘자극방어(reizschutz)’ 개념과 연결 지어 정신분석학적 개념으로 발전시켰다. 1920년에 발표된 『쾌락원리를 넘어서(Jenseits des Lustprinzips)』란 책에서 프로이트는 ‘자극방어’란 ‘위험상황을 미리 예측하고 준비하려는 심리적 상태’라고 정의한다. ‘쇼크’는 이 같은 심리적 예측과 준비를 뛰어넘는 외적 위협에 내던져져 어떤 심리적 방어도 작동하지 못한 결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개별 병사들이 칼이나 창으로 부딪히는 중세시대의 전투에서는 부상당하는 부위가 대부분 정해져 있었다. 그러나 개인화기가 개발되고, 병사들의 집단이 ‘전술단위체’가 되는 집중사격전략이 개발된 이후에 병사들이 당하는 부상은 이전과는 완전히 달랐다. 도대체 어느 부위를 어떻게 부상당할지 전혀 가늠되지 않는 것이다. ‘자극방어’가 전혀 작동할 수 없는 이 같은 상태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극대화되었다. 기관총, 비행기 폭격, 탱크, 독가스와 같은, 이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무기가 전쟁에 투입되기 시작했다. 전혀 예상할 수 없는 죽음과 부상의 공포로 병사들은 전투에 투입되기 전부터 ‘쇼크’로 무너져내렸다. 인류 역사상 그 어떤 전쟁에서도 경험할 수 없었던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병사들의 경험을 프로이트는 정신분석학적으로 ‘쇼크’라고 개념화한 것이다. 이후 ‘쇼크’ 개념은 ‘트라우마(Trauma)’와 같은 정신분석학적 개념으로 확장된다.
볼프강 쉬벨부쉬는 『철도여행의 역사』 에서 ‘쇼크’라는 단어의 기원이 ‘충돌하다(ZusammenstoBen)’ 라고 밝힌다. 쇼크를 유발하는 보병의 ‘일제사격전략’ 이전에 ‘기마충격전투(mounted shock combat)’가 이미 있었다는 것이다. 기마충격전투란 서양의 기사(騎士)를 주제로 한 영화에서 볼 수 있는 ‘마상창 시합’에서 나오는 전투 자세로 싸우는 방식을 뜻한다. 말 위의 병사가 창을 겨드랑이에 끼고 적에게 돌진하는 방식이다. 기병은 창의 방향을 적에게 정확히 겨누기만 하면 된다. 말이 달려오는 힘이 적에게 그대로 전달되기 때문에 인간의 힘에만 의존하는 공격과는 비교할 수 없는 파괴력을 갖는다. 동물의 힘이 무기가 되면서 기병의 파괴력은 엄청나게 증가했다. 이 같은 ‘기마충격전투’가 가능하려면 ‘등자(燈子, Stirrup)’라는 발걸이가 필수다.
프랑스의 소도시 베이뷰에 있는 ‘베이유 자수(Bayeux Tapestry)’. 11세기 중세 기사단의 전투 장면 속에서 ‘등자’에 발을 끼운 기사들이 창과 방패를 양손에 들고 전투하고 있다. 미국의 역사학자 린 화이트 주니어는 ‘등자’라는 아주 작은 발명품이 중세사회를 가능케 했다고 주장한다.
등자가 나타나기 전까지 기병은 그리 위협적인 존재가 아니었다. 등자 없이 말 위에서 몸의 균형을 유지하는 일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어릴 때부터 말을 타며 자란 유목민이 아니고서야 허벅지의 힘만으로 몸의 균형을 유지하며 칼과 창으로 적을 공격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적의 목을 치려고 칼을 힘껏 휘두르면 낙마하기가 일쑤였다. 창으로 적을 찔러도 그 창을 다시 뽑는 일은 불가능했다. 그냥 창을 버리고 앞으로 달려 나가야만 했다. 보병이 아래서 조금만 위협을 가해도 기병은 바로 무너졌다. 이 허점 많은 기병은 ‘등자’를 사용하면서부터 강력한 군대가 되었다.
몸의 균형을 발만으로도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게 되면서 기병의 두 손은 자유로워졌다. 창과 칼을 높은 위치에서 자유롭게 휘두를 수 있게 된 것이다. ‘사람의 힘’이 달려 나가는 ‘말의 힘’으로 대체되면서 보병은 기병의 공격을 감당할 수 없게 되었다. 보병들은 기병이 나타나면 바로 겁을 먹었다. 이 같은 ‘기마충격(mounted shock)’의 쇼크가 ‘무리를 이뤄 진격하는 병사들’에 의한 쇼크 이전에 이미 있었다는 것이다.
등자라는 아주 작은 도구에 역사적 의미를 제일 먼저 부여한 학자는 미국 역사학회의 회장을 역임했던 린 화이트 주니어(Lynn White Jr., 1907~1987)다(린 화이트 주니어 저, 강일휴 역, 『중세의 기술과 사회 변화(Medieval Technology and Social Change)』 , 지식의풍경, 2005). 그는 아예 등자로 인해 봉건제가 가능했다고 주장했다. ‘기마충격전투’가 가능해지면서 기병은 군대의 필수 조직이 되었다. 그러나 기병을 양성하고 유지하기 위해서는 보병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많은 돈이 필요했다. 또한 지속적인 훈련도 필요했다. 전문적 기병인 기사가 등장한 것이다. 영주는 기사에게 재산을 나눠주고, 그들로부터 군사적 보호를 받는 서약을 받았다.
주군과 기사 간의 주종관계에 기초한 봉건제가 이렇게 등자라는 새로운 기술을 통해 등장했다는 린 화이트 주니어의 주장이다. 등자와 같은 특정 기술이 사회구조 변화의 결정적 요소가 된다는 린 화이트 주니어의 주장은 큰 논란을 낳았다. ‘기술결정론(technological determinism)’이라는 것이다. 등자가 아무리 혁명적 기술이라 할지라도, 기술만으로 사회변혁을 설명할 수는 없다는 비판이다. 기술과 사회변혁이 완벽한 인과관계로 설명될 수는 없지만, 깊은 상관관계를 갖는다는 점을 감안하면, 린 화이트 주니어의 등자와 봉건제에 관한 주장은 매우 통찰력 있다.
기차는 더 ‘쇼크’였다!
증기기관은 제임스 와트(James Watt, 1736~1819)가 1765년 발명했다. 열에너지가 운동에너지로 전환되기 시작한 것이다. ‘산업혁명(Industrial Revolution)’의 시작이다. 산업혁명이란 용어를 처음 사용한 이는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Arnold A. Toynbee, 1852~1883)다. 역사를 ‘도전과 응전’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해서 유명해진 아놀드 토인비(Arnold J. Toynbee, 1889~1975)는 그의 조카다. 조카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나름 유명했던 삼촌 토인비는 1884년에 출판된 『18세기 영국 산업혁명 강의(Lectures on the Industrial Revolution of the Eighteenth Century in England)』라는 책에서 ‘산업혁명’이란 용어를 처음 사용했다. 1760년부터 1830년 사이에 영국에서 일어난 근대경제 시스템으로의 급격한 역사적 전환 과정을 지칭한 것이다. 그러나 과연 이 같은 영국의 변화를 과연 ‘혁명’이라고 일컬을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전문가들 사이에 쉽게 합의가 이뤄지지 않는다.
산업혁명의 핵심은 기계의 등장이다. 1765년에 발명된 와트의 증기기관은 1825년 9월 27일, 영국 스톡턴(Stockton)-달링턴(Darlington) 구간에 세계 최초로 정식 철도가 운행되었다. 열차를 설계한 조지 스티븐슨(George Stephenson, 1781~1848)이 직접 운전한 로코모션 1호(Locomotion No.1)는 450명의 승객을 태우고 15킬로미터가 채 못 되는 구간을 달렸다. 시속 16킬로미터 정도의 속도였지만, 마지막 내리막길에서는 시속 24킬로미터까지 달렸다. 이후 1830년에는 리버풀(Liverpool)-맨체스터( Manchester) 사이의 56킬로미터 구간이 건설되어 기차가 공식적으로 승객들을 실어 나르기 시작했다. 제임스 와트의 증기기관 등장에서 최초의 철도 운행까지의 시간은 토인비가 설정한 영국의 산업혁명 시기와도 거의 일치한다.
영국 스톡턴-달링턴 구간에 설치된 세계 최초의 기차(1825년). 450명의 승객을 태우고 약 15킬로미터 구간을 시속 16킬로미터로 달렸다.
세계 최초의 기차는 스톡턴-달링턴 구간을 달렸지만, 리버풀-맨체스터 구간의 철도 운행은 산업혁명의 완성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리버풀은 이른바 ‘삼각무역(trafalgar trade)’의 중심 항구였다. 삼각무역이란 세 나라 사이의 무역을 뜻하지만, 구체적으로는 ‘노예무역’을 뜻한다. 영국의 상인들은 옷감이나 무기 등을 아프리카로 싣고 가서 노예와 교환한 후, 북미 대륙이나 서인도제도에 가서 노예를 팔아넘기고, 그 돈으로 그곳의 물품을 사서 영국으로 돌아왔다. 리버풀은 당시 영국의 이 같은 노예무역의 종착지였다.
리버풀 항구에는 설탕이나 차 등 영국 사회에 인기 있던 기호품들이 수입되었다. 목화도 그중 하나였다. 리버풀로 수입된 목화는 맨체스터와 같은 지역으로 옮겨졌다. 수력과 증기를 이용해 옷을 생산했던 맨체스터는 당시 면직 방직업의 중심지로 크게 발전했다. 맨체스터에서 만들어진 완제품은 다시 리버풀로 옮겨야 했다. 주로 운하를 이용했다. 그러나 당시 독점적으로 운영되었던 운하 이용료는 터무니없이 비쌌다. 기껏 생산한 면직물의 수익을 운하 운영자들에게 다 내주는 꼴이었다. 때마침 대안이 나타났다. 철도였다.
리버풀-맨체스터 구간의 철도 공사는 당시의 축적된 과학기술이 총동원되었다. 두 도시 사이에 철도를 연결하기 위해 ‘생키 부룩(Sankey Brook)’ 계곡을 지나는 60개 이상의 다리를 설치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맨체스터 외곽에는 26평방킬로미터에 달하는 엄청난 늪지대가 있었다. ‘챗 모스(Chat Moss)’라 불리는 이 늪지대를 통과하기 위해 끝이 보이지 않는 일직선의 긴 둑을 쌓고, 그 위에 선로를 설치했다. 도시 아래로 터널을 뚫기도 했다. 리버풀 지하로 2,030미터에 이르는 ‘와핑 터널(wapping tunnel)’을 뚫었다. 세계 최초의 도시 지하터널이 이렇게 탄생한 것이다.
리버풀과 맨체스터 사이의 ‘생키 부룩’ 계곡을 지나는 고가 철도.
리버풀과 맨체스터 사이의 ‘챗 모스’ 늪지대를 관통하는 철로. 토마스 베리(T.T. Bury) 그림(1831).
리버풀 지하를 관통하는 ‘와핑 터널’ 공사 장면. 토마스 베리(T.T. Bury) 그림(1833).
터널을 뚫고, 늪지대에는 둑을 쌓고, 계곡에는 다리를 놓아 철도를 만들었다는 점은 산업혁명의 본질을 아주 분명하게 보여준다. ‘직선’이다! 자연 상태에서 직선을 발견하기란 매우 어렵다. 직선은 인간의 것이다. 철도가 산업혁명의 상징이 되는 이유는 바로 직선이기 때문이다. 철도는 기술적으로 결코 ‘곡선’일 수가 없다. 철도는 곡선이라는 자연의 저항을 뚫고 달려야 했다. 우선 바닥의 곡선, 즉 요철로 평탄치 않은 지형을 평평하게 해야만 했다.
철도의 방향 또한 직선이어야만 했다. 철도에서 곡선의 방향은 곧 ‘선로 이탈’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3차원의 공간을 2차원으로 표현했던 원근법의 회화처럼, 철도는 3차원의 공간을 직선이라는 2차원으로 축소했다. 끝없이 이어지는 철도의 평행선이 ‘원근법적 소실점’의 대표적 사례가 되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직선은 인간문명이 이뤄낸 가장 위대한 성과였다. 동물의 힘에 의지했던 과거의 동력은 ‘매끈함, 견고함, 평탄함, 직선’이라는 네 가지 특징을 가진 기계동력으로 대체되었다.
직선이 인간문명의 본질임을 가장 분명히 지적한 이는 오스트리아의 화가이자 건축가인 프리덴슈라이히 훈데르트바서(Friedensreich Hundertwasser, 1928~2000)였다. 물론 그는 직선을 아주 혐오했다. 그는 1958년에 발표한 ‘곰팡이선언문(Verschimmelungsmanifest)’에서 ‘직각’과 ‘직선’의 근대 합리주의와 기능주의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훈데르트바서의 기능주의 비판은 빈이라는 근대 건축과 예술의 실험실을 배경으로 한다.
20세기 초반, 오스트리아의 빈은 모더니티가 가장 적극적으로 실험된 곳이었다. 독일식 ‘아르누보(Art Nouveau)’였던 ‘유겐트슈틸(Jugendstil)’이 식물의 곡선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장식을 추구했을 때, 이를 가장 격렬하게 비판한 이는 아돌프 로스(Adolf Loos, 1870~1933)였다. 체코슬로바키아 출신으로 빈에서 건축가로 활동하던 로스는 모든 종류의 장식을 배제한 건축을 추구했다. 건축가로서보다도 건축비평, 예술비평으로 더 유명했다. 특히 ‘장식은 범죄다(Ornament und Verbrechen)’라는 그의 주장은 당시 빈을 대표하던 예술가 집단이었던 ‘제체시온(Secession)’을 통째로 거부하는 것이었다. 그 후로 로스의 주장은 르꼬르뷔지에나 그로피우스의 바우하우스가 추구했던 기능주의 건축과 만나면서 모더니즘 예술의 토대가 된다. 요즘 유행하는 ‘미니멀리즘’은 바로 이 기능주의적, 비장식적 예술의 흐름을 계승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오스트리아 빈의 중심가에 있는 로스하우스. 주변의 다른 건축물과 확연히 구별되는 아주 단순한 형태의 건물이다. 이 건물을 설계한 아돌프 로스는 ‘장식은 범죄’라고까지 주장했다.
훈데르트바서는 바로 이 기능주의 건축과 모더니즘 예술을 직선이라며 비판한 것이다. 유겐트스틸과 제체시온의 전통으로 회귀하자는 주장이기도 하다. 그는 ‘직선은 무신론적이며 비도덕적이다(Die gerade Linie ist gottlos und unmoralisch)’라고 비판하며 그 대안으로 신이 창조한 ‘착한 곡선(guten Kurve)’에 기초한 장식을 강조했다. 그는 아예 ‘창문 권리(Fensterrecht)’를 주장하기도 했다. ‘모든 사람은 자신의 집을 둥그렇게 장식하고, 창문에 기대어 손이 닿는 범위에서 창문 주변의 벽을 마음대로 색칠할 수 있는 권리’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날에도 빈에서는 집의 임대차계약서에 훈데르트바서의 창문 권리를 넣는 곳이 있다.
오스트리아 빈의 훈데르트바서 하우스. 아돌프 로스와는 정반대로 그는 ‘직선이야말로 비도덕적’이라고 주장했다. 집의 거주자는 자신의 마음대로 창문 주변을 장식할 수 있어야 한다는 ‘창문 권리’를 주장했다.
도로는 직선이어야 하고 평평해야 한다는 근대공학의 원리를 아주 이상적으로 구현한 철도는 도로에 대한 기존 관념도 바꾸었다. 이전의 도로는 강이 있으면 강을 따라 구불구불하게 달렸다. 산이 있으면 비탈을 피해 한참을 돌아서 올라갔다. 그러나 직선의 철도가 나타나면서 도로도 직선으로 뚫리기 시작했다. ‘고속도로’다. 고속도로가 처음 생긴 곳은 독일이다. 1932년 8월 쾰른과 본 사이를 연결하는 도로였다. 당시에는 ‘횡단도로 없는 자동차길(kreuzungsfreie Kraftfahr-StraBe)’이라 불렀다. 사람들은 이 긴 단어대신 ‘아우토반(Autobahn)’이란 단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아우토반은 철도를 뜻하는 ‘아이젠반(Eisenbahn)’에서 나왔다. 철도처럼 도로도 평평하고 직선으로 만들겠다는 이야기다. 이 같은 철도와 도로의 직선이 사람들에게 공포와 쇼크가 된 것은 철도가 근대 전쟁의 매우 효과적인 무기가 되면서부터다. 1866년,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사이의 쾨니히그래츠(Koniggratz) 전투다.
1943년의 독일 아우토반. 직선의 ‘철도(Eisenbahn)’는 근대 도로의 전형이 되었다. 과거 곡선이던 도로는 이제 철도처럼 직선으로 건설되었다. ‘직선’은 인간의 창조물이다.
김정운 (문화심리학자)
문화심리학자이자 '나름 화가'. <가끔은 격하게 외로워야 한다> <에디톨로지> <남자의 물건> <나는 아내와의 결혼을 후회한다> 등 다수의 베스트셀러를 집필했다. 현재 전남 여수에서 저작 활동에 몰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