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자는, 예술가는, 기타 등등 하여간 이런 일(무슨 일?)은 싹 다 괴로운 것이야! 불면으로 밤을 꼴딱 새우고, 땅 밑으로 꺼질 듯 우울하고, 하는 일마다 뼈를 곱게 갈아 넣지! 전화기는 당연히 꺼놓는 거고, 마감을 앞두곤 잠적해야 제맛이지! 머리든 수염이든 털이란 털은 길게 기르고 1년에 몇 차례, 명절을 맞이해 대대적으로 몸을 씻지! 술?담배에 절었지! 그리고 그 고통 속에서 피눈물로 빚어낸 것만이 진정한 예술이지!
…네, 지금까지 여러분은 어떤 신화적인 이야기를 잠시 엿보셨습니다. 다양한 미디어가 합심해서 만들어낸, 별로 근사하지 않은 신화. 어머, 어디서 썩은 냄새가 나네…?
나는 일상을 알차고 차분하게 꾸려 나가는 게 좋다. 가능한 한 길게, 가능한 한 오래 잘 먹고 잘살고 싶다. 어떻게 하면 지속가능성을 지금보다 더 높일 수 있을지 궁리한다. 창작자의 고통이니 파괴니 자학이니 따위가 들어오면 좀 곤란해진다.
오늘 일이 좀 힘들었더라도 일단 여기까지, 라며 적당히 맺고 끊어줘야 오늘 밤도 꿀잠을 자고 다음 날 아침 개운하게 일어나 새로운 마음으로 일할 수 있다. 집에서 일하는 프리랜서지만 마음만은 자체 출근과 퇴근을 하며 출근 카드를 드르륵 찍는 것이다.
무슨 창작자가 그렇게 건전하냐고, 그래서야 너무 가벼운 작품이 나오는 것 아니냐고? 글쎄요, 72시간쯤 깨어 있는 상태로 다양한 향정신성 약물과 알코올성 음료, 담배를 끊임없이 삼키고 피우면 얼마나 대단한 작품이 나올지 궁금하다. 하지만 직접 해보고 싶진 않다. 혹시 해보신 분 계시면 효과가 어땠는지 알려주시면 좋겠습니다. 나는 나에게 잘해주고 싶다. 내 몸뚱이와 멘탈을 가능한 한 곱게 아껴 쓰고 싶다.
물론 일이란 건 만만치 않고, 때로는 곱게 자란 입에서 쌍욕이 나올 만큼 힘들다. 하지만 힘든 상황을 어떻게 풀어 나갈 것인가에 따라 얘기가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 다음 1과 2를 비교해보자.
1. 아악 힘들어! 이 일 끝나기만 해봐, 맛있는 거 먹을 거야!!!
2. 너무 힘들다… 이 길 끝엔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그저 암흑만이 나를 기다릴 뿐….
나는 단연 1번이다. 달콤한 보상을 눈앞에 대롱대롱 매달아놓고 달리는 쪽이 좋다. 작은 목표를 달성한 후 맛있게 홀랑 따먹고, 잠시 쉬고, 그다음 일을 한다. 2번 같은 식이라면 이 생활, 이거 오래 못한다. 일하면서까지 굳이 피를 볼 생각을 하면 곤란하다. 어차피 생리할 때마다 피는 실컷 본다.
스스로 응원하고, 분위기를 띄워야 한다. 으아 빡세다, 그렇지만 어서 해치우고 개운해지자, 라는 흐름으로 가야지 처음부터 고통… 암흑… 자기파괴… 크큭… 으로 접근하면 일의 수명이 훅 짧아지기 쉽습니다. 어릴 적부터 다양한 창구를 통해 접한 창작자, 예술가의 모습이란 으레 위에서 묘사한 대로였다. 엄청나게 극적인 생활환경, 온갖 고난과 역경,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흙 속에서 반짝이는 천재성을 지닌 인물! 이런 드라마틱한 스토리를 젖은 미역처럼 골고루 몸에 두르고 있어야 진정한 창작자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에 비하면 나는 너무 평탄하게 살았다. 평범한 가정에서 좋은 교육을 받으며 곱게 자랐고(그런데 ‘곱다’는 게 대체 뭘까?), 부모님께선 용돈도 부족하지 않게 주셨다. 일도 뭐 그냥 열심히 했고요… 라고 하면 이게 대체 무슨 드라마 주인공 감이 되겠습니까. 재미없죠.
그래서 흉내 내기로 했다. 내 주위에 어둠이 없다면 손을 쑥 뻗어 확 끌어오면 되는 것 아니겠는가. 첫 번째는 술과 담배. 그게 제일 쉽다. 그리고 합법이다(향정신성 약물은 곤란합니다 여러분). 술도 담배도 하나같이 맛대가리 없고 구역질이 치밀어, 혼자 있을 땐 하지 않다가 방청객이 있을 때만 열심히 마시고 뻐끔뻐끔 피웠다. 주량은 소주 네 병, 담배는 하루 두 갑이라고 거짓말했다. 봤냐, 내가 이렇게 퇴폐적이고 막 나간다고! 어때, 좀 예술가 같지?
그런데 한 해 한 해 나이를 먹고 다양한 일을 하며, 정말로 힘든 순간들을 만나게 되었을 때 비로소 알았다. 그때의 나는 참으로 멍청하고 한심한 짓을 했다는 걸. 고통은 흉내 낼 수 없으며 훈장도 아니다. 1초라도 빨리 벗어나야 한다. 평범하게 사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나이를 먹으며 알게 되었다. 그리고 자기 손톱 밑의 가시가 제일 아프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불행 배틀, 정말 할 짓이 아니다.
우리가 가진 것이 많다면, 우리에게 밝은 면이 많다면 감사히 여기고 잘 써먹자. 고통 속의 창작자에게서 고통을 거둔다면 그는 행복한 창작자가 될 것이다. 고통이 바로 나의 자양분이지, 이게 바로 진정한 예술가의 길이지! 라는 건 결코 좋은 생각이 아니다. 현재 고통을 겪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하는 것뿐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미디어에서 멋대로 왜곡한 탓이 크다. 그놈의 고뇌하고 자학하는 불행한 예술가 캐릭터!
우리는 자신에게 너무 박하고 가혹하다. 뭐 그렇게 대단히 개성적이고 드라마틱한 하루하루를 보내지 않아도 된다. 별일 없이 심심하게 지내는 게 실은 꽤 어렵다. 별일 없기 위해서도 노력이 필요하다. 우리의 노력을 스스로 칭찬해주자.
꾸준히 일해서 먹고살기 위해서라도 고통에 중독되지 않아야 한다.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며 프리랜서도 마찬가지다. 원활한 커뮤니케이션과 적절한 리액션, 상호 간의 신용은 사회생활의 기본 중에서도 상기본이다. 그런데 나만의 세계, 나만의 고통에 잔뜩 취해 있는 프리랜서 창작자와 대체 불안해서 무슨 일을 하겠습니까. 한두 번 데이고 나면 계속 함께 일할 마음이 사라진다. 일만 그런가, 인간관계에도 문제가 발생한다. 당신의 자식(혹은 연인, 친구)인 내가 이렇게 고통스러운 창작을 한단 말입니다아아아! 라며 열 번 정도 진상을 부리고 나면 이게 누구 손해인지 금방 알 수 있다.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들,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면서까지 대체 뭔 놈의 대단한 창작 나부랭이를 한다는 것인가? 사죄의 의미로 아메리카노 기프티콘이라도 보내자.
한편, 업계의 선배격인 창작자가 슬그머니 나에게 고통을 종용할 때도 있다. 너는 너무 어려, 세상을 몰라, 좀 더 다양한 경험을 해봐야 해, 쿨해져야 한다 이거야 등등 레퍼토리는 다양하다. 이런 소리를 듣는다면 일단 경계하는 것이 좋다. 그가 어떤 삶을 살아왔으며 어떤 방식으로 일하는지에 너무 주목할 필요 없다. 그저 그의 방식일 뿐이다. 본인의 음침한 경험을 무기 삼아 상대방을 조종해 다양한 착취를 시도하는 경우가 많으며, 상당 부분 성적 착취로 이어진다. 나이 차이가 얼마나 나든, 업계에서의 위상 차이가 얼마나 나든, 상대방의 기를 죽이면서 관계를 시작하는 사람은 제대로 된 작자가 아니다. 조종이고 통제이며 세뇌인 것이다.
안녕하세요, 신예희입니다.
<신예희의 독립생활자>를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12회의 연재를 마무리하며 인사를 올립니다. 작년에 이어, 올해도 귀한 지면에서 연재할 수 있어 무척 기쁘고 행복합니다. 글을 쓰는 과정, 그에 어울리는 사진과 그림을 고르는 과정이 모두 즐거웠습니다. 다양한 장소에서 쓴 글은 곧 한 권의 책이 될 것입니다. 많은 분의 사랑을 받고 싶고, 많은 분의 마음을 어지럽히고 싶습니다. 저는 계속 행복하게 재미있게 살겠습니다. 맛있는 것 많이 먹으면서요. 모두 건강하세요.
신예희(작가)
홍익대학교 산업디자인학과를 졸업한 후 현재까지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사진을 찍는 프리랜서의 길을 걷고 있다. 재미난 일, 궁금한 일만 골라서 하다가 문득 고개를 들어보니 30대 후반의 나이가 되어버렸다는 그녀는 자유로운 여행을 즐기는 탓에 혼자서 시각과 후각의 기쁨을 찾아 주구장창 배낭여행만 하는 중이다. 큼직한 카메라와 편한 신발, 그리고 무엇보다 튼튼한 위장 하나 믿고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다 보니 어느새 40회에 가까운 외국여행을 했다. 여전히 구순기에서 벗어나지 못해 처음 보는 음식, 궁금한 음식은 일단 입에 넣고 보는 습성을 지녔다. ISO 9000 인증급의 방향치로서 동병상련자들을 모아 월방연(월드 방향치 연합회)을 설립하는 것이 소박한 꿈.
저서로는 『까칠한 여우들이 찾아낸 맛집 54』(조선일보 생활미디어), 『결혼 전에 하지 않으면 정말 억울한 서른여섯 가지』(이가서), 『2만원으로 와인 즐기기』(조선일보 생활미디어), 『배고프면 화나는 그녀, 여행을 떠나다』(시그마북스), 『여행자의 밥』(이덴슬리벨) 이 있다.
준하짱
2018.09.19
매회 재밌게 읽었었는데, 아쉬워요~
언젠가 책으로 나오면 그때 한꺼번에 읽어보고 싶네요~
프랑수아즈
2018.09.18
billly
2018.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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