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와의 대화」
만취한 아빠 : 너는 인생이 뭐라고 생각하냐?
나 : 우연과 실수의 반복이요.
만취한 아빠 : 그럼, 인생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 뭐냐?
나 : 행복하다고 느끼는 거.
만취한 아빠 : …… 너 힘드냐?
나 : ……
만취한 아빠 : 힘들어?
나 : (잠시 생각) 요즘? 아니면 지금?
만취한 아빠 : 지금.
나 : ??
만취한 아빠 : 지금 나랑 마주 앉아 있는 게 힘들어?
나 : 내가? 아니요!
만취한 아빠 : 근데 왜 그렇게 말을 조심스럽게 해?
나 : 난 원래 이렇게 말하는데?
만취한 아빠 : 난 널 잘 모르겠다.
나 : (당황한) 그전엔 알았는데 요즘엔 잘 모르겠다는 뜻이에요, 애초부터 잘 모르겠다는 뜻이에요?
만취한 아빠 : 애초부터 널 잘 모르겠다.
나, 순간 울컥. 눈시울과 가슴이 뜨거워졌으나 언제나 그렇듯 전혀 티는 내지 않는다. 한참을 이런저런 질문과 답을 주고받다가 나, 결국 다시 질문했다.
나 : 근데, 아빠. 아까 나에 대해서 잘 모르겠다고 얘기했잖아……
만취한 아빠 : (두 눈을 크게 뜨며) 내가?!
나 : ……
만취한 아빠 : 내가?! 내가 그런 말을 했다고? 내가 왜?
아, 그냥 나도 취해버릴걸.
이경미 감독의 에세이 『잘돼가? 무엇이든』 에 실린 이야기였습니다.
<인터뷰 - 이경미 감독 편>
김하나 : 어느 날 보니까 저희 집 테이블 위에 『잘돼가? 무엇이든』 이 놓여있더라고요. 그때가 제가 읽어야 될 책들도 많고 굉장히 바쁠 때였는데, 이경미 감독님 책이라서 반가운 마음에 앞에 한두 장만 읽으려고 하다가 훅 다 읽었어요. 너무너무 재밌고 아주 신기했어요. 뭐라고 해야 할까요, 되게 묘한 글쓰기인 거예요. ‘시나리오 쓰기의 영향이 있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글쓰기에 대해서 다른 사람들의 소감은 어떤가요?
이경미 : 가장 많이 듣는 이야기는 ‘동네 언니랑 잡담을 나누는 기분이다, 수다를 떠는 기분이다’ 이런 이야기 많이 들어요.
김하나 : 너무 신기한 게 뜬금포가 갑자기 들어오는 거죠. 인생이 그렇듯이, 시간 순서로 뭔가 개입했다가 그 다음 일로 넘어가는데 그게 논리적이지 않은 거예요. 그 부분이 제일 신기했어요. 이를테면 이런 부분이 있었죠. “배가 고파서 큰 생선 한 마리를 통째 구워 다 먹었다. 필립 시모어 호프만이 세상을 떠나서 오늘은 내내 우울하다. 큰 생선 한 마리를 통째로 먹었다니 믿기 힘들겠지만.” 세 문장이 중구난방이잖아요(웃음). 한 편의 글을 읽어봤을 때 어떤 부분이 이유가 없이 들어갔는데 그게 들어감으로 인해서 뉘앙스가 달라지고 굉장히 강한 이미지가 남는 거죠. (감독님의) 영화도 조금 비슷한 것 같아요.
이경미 : 네, 맞아요. 제가 만든 영화가 많지는 않지만 영화를 본 사람들이 좋아하는 사람들은 좋아하고, 싫어하는 사람들은 ‘맥락을 쫓기가 어렵다, 중구난방이다’ 이런 이야기를 들어요. 그게 글쓰기도 마찬가지인 것 같은데요. 왜 그런가 생각해 보면, 일단은 제가 시나리오를 쓰는 사람이다 보니 대사를 쓰는 식으로 생각을 하는 것 같아요. ‘나랑 마주 앉아서 이야기를 들을 때 지루하지 않게 계속 듣는 기분으로 책을 읽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에서 대사를 쓰듯이 쓰기 때문에 그렇지 않은가 싶고요. 우리도 수다 떨 때 보면 이 이야기했다가 저 이야기했다가 ‘내가 무슨 이야기했었지?’ 할 때가 많잖아요. 그래서 그런 것도 있는 것 같고요. 영화도 그런 걸 보니 제가 일관되게 그런 것 같은데요.
김하나 : 일관되게 맥락이 없는(웃음).
이경미 : 네. 그런데 성격적으로 조금 지루한 걸 못 견뎌요. 그리고 스스로 진단하기에 제가 조금 스마트폰 중독이거든요. 뭔가 빨리빨리 넘어가고 선별해서 재밌는 걸 찾는 데 익숙해져서, 중언부언한다고 느끼기 시작하면 그냥 그만둬버려요. 그러다 보니까 영화를 만들 때도 글을 쓸 때도 제가 재밌다고 느끼다가 지루하게 느끼는 순간의 호흡으로 쓰게 되는 것 같아요.
김하나 : 그러면 대사 같은 걸 쓸 때 일필휘지로 쓰시나요, 아니면 많이 고민해서 쓰시나요?
이경미 : 엄청 많이 고민하고 되게 많이 고쳐요.
김하나 : 그러실 것 같아요. <채널예스>의 엄지혜 기자님이 인스타그램에 이 책을 올려놓으신 걸 보고 제가 댓글로 ‘최근에 제가 본 글 중에 가장 충격적인 글’이라고 썼었거든요. 이건 펜 가는 대로 쓴 글이 전혀 아니에요. 시나리오에서 읽을 때 뜬금없이 느껴질 수는 있지만 그게 계산돼 있는 대사들이라고 느껴졌거든요. 그래서 더더욱 신기했고요. 이런 글쓰기를 저는 처음 본 것 같아요.
이경미 : 아마 제가 전문 작가가 아니다 보니까 그렇게 나오는 것도 있는 것 같아요.
김하나 : 이건 ‘전문 작가들’이라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축복일 것 같아요. 우리가 글쓰기의 형식이나 틀 같은 게 있다고 생각하는 걸 정말 기분 좋게 깨주시는데요. <미쓰 홍당무>가 세상에 나왔을 때 이동진 평론가가 “우주로부터 날아온 코미디”라고 했었잖아요. 그 말이 딱인 것 같아요.
이경미 : 너무 기분 좋은 말들을 해주시네요(웃음).
김하나 : 저한테는 ‘우주로부터 날아온 글쓰기’ 같았거든요. 너무너무 신기했어요.
이경미 : 시나리오를 쓸 때도 그렇고 책을 쓸 때도 그렇고, 일관된 건 그게 아닐까 싶어요. 이것도 역시나 성격적인 건데, 시나리오를 쓸 때도 한 문장에서 준 정보를 다음 문장에서 또 주는 일이 없도록 쓰고 싶어 해요. 한 장면에서 다음 장면으로 넘어갈 때 정보가 반복되는 일이 없도록 효율적으로 콤팩트하게 하고 싶어 하는데요. 그래야 계속 텐션을 가지고 갈 수 있다고 믿고 있거든요. 그런 성격적인 부분이 에세이 쓸 때도 반영이 되는 것 같아요. 그래서 굉장히 문장을 많이 고치는데요. 읽는 사람들이 지루하지 않게, 계속 ‘이게 뭐지?’ 하고 궁금해 하면서 보다가, 직접적으로 메시지를 주지는 않지만 글이 끝났을 때 뭔가 뜻하지 않은 메시지가 다가오면 좋아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하면서 썼어요.
김하나 : 정말 그러네요. 뜻하지 않은 메시지가 다가오는 것. 뭔가를 전달해서 쥐어주려고 하지 않는 것 같은데, 읽는 사람에게 뭔가가 남는 거죠.
김하나 : <잘돼가? 무엇이든>, <미쓰 홍당무>, <비밀은 없다>, <아랫집> 네 편의 영화를 찍으셨는데요. 사람들이 ‘이경미월드’라고 부른단 말이죠. 그건 정말 놀라운 일 아닌가요? 극장에서 상업적 개봉을 했던 건 두 편의 장편 영화인데, 이미 그걸로 ‘이경미월드’라는 말에 사람들이 다 수긍할 정도가 된 거라면, 그 텐션과 새로움이 굉장한 거죠.
이경미 : 감사합니다.
김하나 : 이 책에 보면 이해영 감독이 이번 책을 두고 이렇게 말씀하셨더라고요. “노필터, 무보정의 이경미가 드러난 글”이라고요. 글 앞쪽에 보면 ‘원래 이런 이야기는 절대 안 하려고 했는데...’라고 하면서 다 하시잖아요(웃음). 고3 때 엑소시즘 사건이라든가, 할로윈에 불혹 넘긴 프리랜서 세 명이 모여가지고 술 취하고 배불러서 하는 찌질한 이야기라든가. 너무 찌질한데, 그걸 정말 효과적으로 찌질하게 드러내는 글쓰기를 하시잖아요(웃음). 너무 솔직하고 너무 웃긴 거예요. 여기에 대해서 ‘내 이야기를 너무 많이 해서, 내 영화에 대한 궁금증이 덜해지면 어떡하지?’ 하는 걱정도 드셨나요?
이경미 : 네. 책이 인쇄 들어가기 직전에야 겁이 나기 시작했어요. 그 전까지는 그냥 재밌게 썼고요. 주변에서 ‘너무 솔직하게 다 이야기하는 거 아니냐’라는 우려가 있어서 뺀 게 몇 개 있어요.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어, 왜 굳이 그걸 다 짊어지고 오픈해?’라는 걱정들이 있어서 뺀 게 있고요. 그런데 저는 그런 것들이 별로 창피하지 않았어요. 다른 사람들이 창피하다고 느끼는 부분과 제가 창피하다고 느끼는 부분이 다른 것 같아요.
김하나 : 갑자기 <미쓰 홍당무>의 ‘양미숙’이 생각나네요(웃음).
이경미 : 네(웃음). 그래서 되게 자유롭게 썼는데, 인쇄 들어가기 하루 전에 갑자기 굉장히 겁이 나더라고요. ‘나는 영화를 계속 만드는 게 내 목표인데, 내 책을 읽은 사람들이 이경미를 이제 지루해한다거나 아니면 내가 만든 영화를 보고 ‘이경미가 원래 이런 사람이 아닌데, 왜 이래?’라는 식으로 내가 어떻게 프레이밍돼서 다음 영화에 방해가 되면 어떡하지?’ 하고 겁이 나기는 했는데, 늦었었어요. 인쇄 전날이라서 너무 뒷북이었어요.
김하나 : 그런 걱정은 전혀 안 하셔도 될 것 같아요. 영화도 더 재밌어지고요. 영화 때문에 책도 정말 재밌게 읽었어요.
김하나 : <채널예스>에 칼럼 연재하실 때도 독자들과 출판계 분들의 반응이 뜨거웠어요. 지금 책도 반응이 아주 좋은데, 호흡이 되게 다를 것 같아요. 영화가 극장에 걸려 있는 기간도 점점 조여드는 느낌이 들 테고, 손익분기점을 넘길지 어떨지 실시간으로 느껴지잖아요. 개봉하고 바로 성패가 갈리는 것 같고. 그런데 책은 안 그렇죠?
이경미 : 맞아요. 영화는 개봉하는 순간, 정확히 말하면 개봉일 전날 예매율을 가지고 대강 결과가 나와요.
김하나 : 아, 출구조사 같은 거네요?
이경미 : 네, 그런 거예요. 사전 출구조사처럼 개봉 전날 연락이 와요. 그래서 선고를 받고 전장에 나가는 거죠(웃음). 전장에 나간다는 것은 무대인사하고 인터뷰하고 그런 건데...
김하나 : 그런데 <미쓰 홍당무> 같은 경우에는 입봉작이었잖아요. 예매율도 전혀 다를 테고.
이경미 : 네. <미쓰 홍당무>가 10년 전 영화인데, 그때는 시스템이 지금과 많이 달랐어요. 그래서 그때는 개봉일을 조금 즐겼던 것 같아요. ‘이제 무슨 일이 펼쳐질까’ 이런 기분으로 즐겼는데요. <비밀은 없다>를 8년 만에 만들었는데 그때는 개봉 전날 연락이 오더라고요. 몇 만 명이 들지.
김하나 : 몇 만 명이라고 하던가요?
이경미 : 지금 24만이 들었는데, 24만보다 많았어요.
김하나 : 아, 그래요?
이경미 : 네. 그래서 ‘손익분기점을 넘기기 어려울 지도 모르겠다’는 이야기가 있었지만, 이렇게까지는 예상을 못했어요. 그래서 (개봉 전날) 대강 나오기 때문에 표정관리를 하면서 인터뷰를 해야 되는 거죠(웃음). ‘혹시 기적이 일어나지는 않을까’ 하면서 예매율을 보면서, 극장 종영을 할 때까지 피를 말리는 시간들이죠. 극장 종영을 하면 그때 스코어가 확정되고, IPTV로 시청한 건 감독 스코어에 들어가지 않으니까 중요하죠. 그런데 책은 그런 게 없이 절판할 때까지 사람들이 본다고 생각하니까 되게 마음이 편하고요. 영화는 오픈한 날부터 일주일, 그러니까 두 번의 주말이 지나는 동안에 관객이 얼마가 드느냐에 따라서 앞으로 계속 가느냐 아니면 사라지느냐의 기로에 서 있다면 책은 그런 게 아니니까요. 되게 마음 편하더라고요.
김하나 : 마음이 편하지만 그래도 반응이 좋으면 좋을 텐데, 반응이 좋잖아요. 그래서 기분 좋으신가요?
이경미 : 기분 당연히 좋죠. 제가 제일 좋은 반응은 ‘이경미가 누구인지 몰랐는데 책을 읽고 영화를 찾아봤다’는 이야기가 제일 좋아요(웃음). 그러면 너무 고맙죠. ‘한 명이라도 더 봐주면 얼마나 좋을까’ 이러면서(웃음).
*오디오클립 바로듣기 https://audioclip.naver.com/channels/391/clips/85
김하나(작가)
브랜딩, 카피라이팅, 네이밍, 브랜드 스토리, 광고, 퍼블리싱까지 종횡무진 활약중이다. 『힘 빼기의 기술』,『15도』,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등을 썼고 예스24 팟캐스트 <책읽아웃>을 진행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