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재미를 느꼈던 때는 언제부터였나요?
아홉 살 때 『말괄량이 쌍둥이의 비밀』 (에니드 블라이튼)이라는 책을 선물 받았을 때부터입니다. 지경사의 소녀명랑소설시리즈 중 한 권이었는데 그 뒤로 서점과 도서관을 들락거리며 그 시리즈를 거의 다 읽었습니다. 그러다가 계몽사 세계명작전집, 위인전집, 백과사전 등 재미와는 상관없이 책장에 꽂혀있는 모든 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지금도 다른 사람의 집에 놀러 가면 그 집 책장에 있는 모든 책의 제목을 다 읽고 나서야 자리에 앉습니다.
책 읽는 시간은 작가님께 왜 소중한가요?
원하는 책을 마음껏 읽고 싶고 산책을 충분히 하고 싶다는 것 외에 다른 욕망이 없는 편입니다. 파산선고를 받아도 도서관회원증만 있으면 그다지 절망하지 않을 것 같다고 늘 생각합니다. 책을 읽다 보면 저 자신의 어리석음과 무지를 깨닫게 되는 순간이 있는데 그게 독서의 가장 큰 쾌감인 것 같습니다. 물론 책이 그 어리석음을 극복하고 보다 나은 인간이 되는 것을 보장해주지는 못하지만요. 그리고 책을 읽으면 제가 살아온 시간에 주름이 생기면서 더 깊은 시공간을 사는 듯한 착각이 듭니다. 길게 사는 건 장담 못 해도 밀도 있게 살 수 있도록 책이 조금은 도와주는 것 같습니다.
요즘 작가님의 관심사는 무엇이며 그 관심사와 관계하여 읽을 계획인 책이 있나요?
『뉴로트라이브』 (스티브 실버만)라는 자폐증의 역사에 관한 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그림으로 생각한다』 (템플 그랜딘)라는 자폐인이 쓴 자서전을 읽고 그 주제에 관심을 두게 되었습니다. 감각기관을 통해 들어오는 정보량이 다르고 처리속도도 다르기 때문에 외부에 반응하는 방식도 다를 수 있다는 것을 그 책을 읽고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로 관심이 생겨서 비슷한 주제의 책이 나오면 가능한 한 다 읽어보려 합니다.
최근작 『산책을 듣는 시간』 과 관련하여, 독자들에게 하고 싶으신 말씀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산책을 듣는 시간』 을 쓸 때는 수화에 관한 책을 찾아 읽었습니다. 『목소리를 보았네(올리버 색스)』 , 『반짝이는 박수 소리(리아 헤이거 코헨)』 , 『색맹의 섬(올리버 색스)』 , 『부모와 다른 아이들(앤드류 솔로몬)』 을 많이 참고했는데 혹시 관심이 생기신다면 함께 읽어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관련 있는 주제의 책들을 연달아 읽거나, 한 작가의 다른 책들을 연달아 읽는 것, 한 책을 주기적으로 반복해서 읽는 것. 모두 책을 더 재미있게 즐기는 방법인 것 같습니다.
명사의 추천
보이지 않는 도시들
이탈로 칼비노 저/이현경 역 | 민음사
도시에 관한 책은 결국 관계에 대한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허무맹랑한 꿈을 적은 일기 같은 이 이야기들은 정교하게 연결되어 있는데 행간 사이사이로 끝없이 다른 이야기가 만들어져서 이 책이 거대한 하나의 도시처럼 느껴집니다. 저한테는 시집이자 철학책이자 경전이자 역사책처럼 느껴지는 소설책입니다.
존 버거의 글로 쓴 사진
존 버거 저 | 열화당
시선이 태도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이 책을 읽고 배웠습니다. 다른 책들을 좋아한다면 존 버거의 책들은 감히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는데, 그건 제가 존중과 담백한 다정함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칼잡이들의 이야기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저 | 민음사
보르헤스 전집은 20세기의 보물입니다. 그 어떤 시집보다, 시론보다, 보르헤스 전집을 통해서 시적인 것에 대해서 더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주기율표
프리모 레비 저/이현경 역 | 돌베개
마치 실험하듯이 불필요한 것을 제거하고 꼭 필요한 것만 정확한 자리에 놓듯 글을 쓰기 때문에 과학자들이 쓴 에세이를 좋아합니다. 주기율표상의 원소 하나하나가 한 챕터인 이 책은 지극히 개인적인 회고록이지만 온 세상을 다 품고 있는 하나의 조각 같기도 합니다.
당신 인생의 이야기
테드 창 저/김상훈 역 | 엘리
테드 창이 이 책을 쓰지 않았다면 세상에 이런 책이 있을 수도 있다는 걸 상상도 못 했고, 제가 이런 책을 읽고 싶었다는 것도 몰랐겠죠. 저한테는 새로운 세계 하나를 열어준 작가입니다. 좋아하는 작가가 생기면 전작을 모두 사는 편인데, 과작하는 작가라 아쉽습니다. 테드 창이 쓴 책을 모두 사느라 가산을 탕진하는 날이 오면 좋겠습니다.
소수의 음악
고중숙 역 | 승산
인간이 소수의 규칙성을 알아내려고 노력해온 역사는 그 자체만으로도 흥미진진한 모험담입니다. 이 책은 소수가 더 큰 세상을 여는 비밀 키라고 주장하는데 이제까지 알고 지내온 세상보다 더 큰 세상이 나름의 조화로운 규칙을 가지고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상상이 즐겁습니다.
채널예스
채널예스는 예스24에서 운영하는 콘텐츠 플랫폼입니다. 책을 둘러싼 다양한 이야기를 만나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