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율이 줄고 있다”는 뉴스 뒤에 항상 따라 붙는 이야기가 있다. “어린 시절에 독서습관을 형성하는 것이 중요하다. 특히 부모님이 책 읽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항상 맞는 말도 아니다. 부모님은 책을 좋아하셨고, 항상 무언가를 읽고 계셨다. 반면에 나는 지지리도 책을 안 읽었다. 책보다는 비디오가 더 좋았다. 부모님이 책을 권해도 ‘나는 나의 길을 가겠다’는 자세로 B급 호러영화에 열광했다.
유도라 웰티의 『작가의 시작』 을 편집하며 회고록을 쓰고 싶다는 욕심이 들었다. 웰티가 삶을 서술하는 방식은 독특하다. 자신에게 일어난 사건을 시간순으로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어떤 순간들이 자신의 작품에 영향을 미쳤는지를 설명한다. 그것은 작품뿐만 아니라 웰티 자신의 정체성에 끼친 영향이기도 하다. 우리는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 자아를 형성한다. 특히 부모님의 영향은 절대적이다. 웰티 역시 부모님에게 받은 영향을 이야기하는데, 그중 하나가 책에 대한 사랑이다. 웰티는 책에 둘러싸여 어린 시절을 보냈고, 같은 책을 읽으며 부모님과 세계를 공유했다.
회고록을 써보고 싶다는 욕심이 든 것도 이런 내용들 덕분이다. 지금의 나를 만든 것이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책을 싫어했다고 했지만, 결국 독서가 취미가 되었고 지금은 책 만드는 일을 하고 있지 않은가? 당연히 어린 시절의 영향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부모님의 책장에 대한 기억을 더듬어보니, 프레드릭 브라운의 『썸씽 그린』이라는 책이 떠오른다. 부모님은 정말 별별 책을 다 모았고, 거기에는 SF소설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여름방학에 하릴없이 빈둥거리다 곰팡이 냄새 나는 『썸씽 그린』을 펼쳤다. 『공포 특급』 분위기가 나는 표지가 매력적이었다. 거기에는 황폐화된 지구에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녹색을 찾아 떠나는 남자의 이야기가 있었고, 자살하기 위해 유아론자를 창조하는 신의 이야기가 있었고, 세상에서 가장 짧은 SF소설(“지구의 마지막 남자가 어느 방 안에 혼자 앉아 있었다. 그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도 있었다. 뭐야, 책장에 이런 책이 꽂혀 있었어? 모범생처럼 보여서 멀리 하고 싶던 친구가 알고 보니 흑마술에 심취한 괴짜라는 걸 발견한 기분이었다. 처음으로 책장 안에 숨겨진 세계에 호기심이 생겼다. 온갖 기기묘묘한 이야기, 메시지, 캐릭터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무엇을 먼저 읽을지가 유일한 고민거리였다.
『썸씽 그린』이 인생의 책이었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건 아니다. 다른 사람들의 인생은 어떨지 모르지만, 나의 인생에는 결정적인 순간이 없었다. 가랑비에 옷 젖듯, 서서히 물들어가듯, 조금씩 그리고 천천히 인생의 방향이 결정되었다. 지금의 나를 만든 수많은 순간들 속에 『썸씽 그린』이라는 책과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품고 있던 부모님의 책장이 있다. 여름방학의 무료한 순간이 나비효과처럼 작용해 나를 여기로 데려온 것만 같다. 『작가의 시작』 을 홍보하며 기계처럼 써왔던 문장이 있다. “삶이 글을 완성하고, 글이 삶을 완성한다.” 삶은 글쓰기의 재료가 되지만, 글쓰기를 통해 삶의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기도 한다. 『썸씽 그린』이라는 책은 오랫동안 잊혀져 있었지만, 유도라 웰티의 꼼꼼한 회고 덕에 나 역시 지난 시간을 불러올 수 있었다. 쓰기뿐만 아니라 읽기도 삶을 완성하는 도구가 된다.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을 위해 그리 먼 곳까지 갈 필요는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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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시작유도라 웰티 저/신지현 역 | xbooks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난 친구 같은 기억이 소설에 어떻게 반영되었는지 이야기하고, 증조부모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가족사를 통해 자신의 자유로운 기질이 어디서 왔는지를 탐구한다.
홍민기(엑스북스 편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