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이브에 생일을 맞았던 친구가 있다. 제때 축하하고 싶었는데 시간이 없었다. ‘아, 선물 사야지!’ 하고 연말에 회사 근처 서점에서 사둔 LP, ‘맞다. 편지!’ 연초에 잠을 자려다가 일어나서 써둔 편지, 그런 것들이 봉투에 담겨 서랍 속에 들어 있었다. 선물꾸러미를 꺼내 들고 친구네 집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횡단보도에서 신호를 기다리다가 휴대폰 지도를 켰다. 그의 집과 우리 집에 핀을 지정하고 거리를 측정해봤다. 1.5킬로미터. 도보로 22분이 예상되는 거리다. 나는 걸음이 빠른 편이니 20분이 채 걸리지 않을 거다. 언젠가 친구와 내가 그리 바쁘지 않았을 때, 그러니까 비슷한 일을 하면서 자주 보던 시절에는 여러 번 오가던 길이다. 다니는 회사가 바뀌고 전보다 만나는 일이 적어지면서 이 방향으로 걷는 일도 자연스레 줄었다. 지도를 쥐고 있는 손이 금방 차가워졌다. 지도를 끄고 주머니에 휴대폰을 넣으며 손가락 끝을 움켜쥐었다. 귀에 꽂은 헤드폰에서는 소설을 읽어주는 팟캐스트가 나오고 있었다. 언젠가 소설을 읽어주는 팟캐스트가 있다고 들었을 때 친구와 “사람들이 책을 읽지 않고 들어야 할 정도로 바쁜가?” 얘기했던 일이 생각났다. 목소리 좋은 아나운서가 읽어주는 오늘의 소설은 『모모』 였다.
친구 집은 언덕 위에 있다. 처음 이 집에 놀러 갈 때, 놀랐다. 경사가 가파르다고 듣긴 했지만 이렇게 높을 줄은 몰랐다. 그 집에 간 횟수가 양손으로 셀 수 없게 되었을 때도 언덕길은 익숙해지지 않았다. 매번 처음 가보는 사람처럼 헉헉 되며 “와, 왜 이렇게 높은 곳에 있어?” 말하곤 했다. 마을버스가 다니긴 하는데, 버스를 지켜보면 그도 힘겹게 오른다고 느껴질 정도다. 나라면 절대 얻지 않았을 집이다. 이런 식의 장소에 매일 한 번 이상씩 올라갈 생각을 하면 아득해진다. 친구의 집은 높은 언덕을 오르는 고통만큼 좋은 집이다. 아무리 좋아도 살고 싶지는 않았고 자주 이 집에 가는 쪽을 좋아해 왔다. 고향 집에서 가져온 반찬을 나눠주러 가기도 했고, 친구와 놀고 헤어질 때는 일부러 우리 집을 지나쳐 그 집 쪽으로 더 걸어가기도 했다.
언덕을 다 올랐을 무렵에 전화를 걸었다. “뭐해? 나 너희 집에 올라가고 있는데.” 친구는 거친 숨소리만 듣고도 이미 내가 그 집에 가까워졌다는 것을 알았을지도 모른다. 문을 두드리자 친구가 나왔다. 그녀의 친구들이 집 안에 있었다. 가볍게 인사를 하고 가져온 봉투를 내밀었다. 늦은 생일 선물이라 말하자, 웃었다. 오랜만이다. 기대하지 않은 일을 맞이할 때, 무방비로 변하는 친구의 얼굴. 처음에 우리가 가까워지던 때, 이 웃음을 보고 기뻤던 일이 떠올랐다. 대체로 무표정한 얼굴이 웃음으로 변하는 순간을 발견한 적이 있었고, 그걸 자꾸 보고 싶어서 이것저것 건네기도 하고 재미있는 일을 궁리했었다. 집에 들어오라는 말을 만류하고 다시 언덕을 내려왔다. 넓고 평평한 길로 나올 때까지 웃는 얼굴을 생각했다. 이 길을 오르는 게 뭐라고 이렇게 미뤄왔을까. 내리막길이라 그런지 모든 게 쉽게 느껴졌다. 나는 정말 바빴던 걸까. 듣던 소설을 다시 재생시켰다.
집에 도착해서 새로 산 잠옷을 꺼내 입었다. 며칠 전에 커다란 쇼핑몰에서 산 비싼 것이다. 평일에 잠을 잘 시간이 부족해서 주말에 밀린 잠을 자곤 한다. 자다 보면 저녁이 되어 있을 때가 있다. 그렇게 일어나 거울을 봤을 때, 구멍이 나거나 얼룩진 잠옷이 보이면 어쩐지 서럽다. 이번에 새로 산 파자마 바지 가격은 14만 9천 원이다. 그 가격이면 사지 못했을 것 같고 세일을 해서 4만 얼마이기에 한 번 사봤다. 잠잘 때 입는 옷을 4만 얼마 주고 사본 것은 처음이었다. 사는 게 바빠지는 일을 막을 수 있을까. 혼자가 되고 마는 일에서 도망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카드를 긁었었다. 보드라운 잠옷을 입고 따뜻한 이불 안에 들어갔다.
이제 모모는 깨닫게 되었다. 이 세상에는 다른 사람과 나눌 수 없으면, 그것을 소유함으로써 파멸에 이르는 그런 보물이 있다는 사실을.
- 미하엘 엔데 『모모』 중에서 (29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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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모미하엘 엔데 저 | 비룡소
어른들에게는 또 그 나름의 감동으로 읽히는 아주 특별한 동화이다. 시간은 삶이고 삶은 우리 마음 속에 깃들어 있다는 메시지가 마음 한 구석에 자리잡고 나면 삶이 보다 더 풍족해진다.
박선아(비주얼 에디터)
산문집 『20킬로그램의 삶』과 서간집 『어떤 이름에게』를 만들었다. 회사에서 비주얼 에디터로 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