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9년 초연된 헨릭 입센의 <인형의 집>. 주인공 노라가 자아를 찾기 위해 가정을 버리고 집을 나간다는 설정은 100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무대 위에서는 빈번하게 다뤄지는 주제지만) 실생활에서 쉽게 이뤄지는 일은 아닙니다. 그런데 그 노라가 스스로 박차고 나간 문을 15년 만에 돌아와 다시 두드린다면 어떨까요? 극작가 루카스 네이스가 2017년에 이어간 <인형의 집, Part 2> 의 내용이 몹시 궁금한 이유인데요. 연극 <인형의 집, Part 2> 가 4월 10일 LG아트센터 무대에 오릅니다. 특히 이번 작품에는 노라 역에 서이숙, 우미화, 토르발트 역에 손종학, 박호산 씨 등 오랜 세월 무대에서 다진 내공이 돋보이는 배우들이 대거 출연해 더욱 기대를 모으고 있는데요. 지난해 <엘렉트라> 이후 1년 만에 다시 무대에 서는 서이숙 씨를 연습이 시작되기 전 직접 만나봤습니다.
저한테 노라 역을 줬겠어요? 이렇게 큰데(웃음)? 저는 키도 크고 골격도 있는 편인데, 기존 노라의 이미지는 예쁘고 귀엽고 발랄하고 철없는 모습이거든요.
오랜 세월 무대에서 활동했던 만큼 일단 15년 전 노라, 그러니까 입센의 <인형의 집>을 연기한 적이 있는지 여쭤봤습니다. 이미지가 맞지 않았다는데, 그럼 <인형의 집, Part 2> 의 노라는 바뀐 걸까요?
15년이 지나서 달라진 노라인 만큼 고정관념에서도 벗어나 저를 캐스팅한 것 같아요. 내용은 명확해요. 이야기가 명확하면 좋은 대본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런데 너무 명확하니까 단편적으로 보일까봐 또 걱정이에요. 어려운 대본은 어떻게 이해하고 소화해서 관객들에게 내놓을까 고민이라면, 명확한 대본은 너무 쉬울까봐 걱정이죠.
마치 속편 같지만 작가는 다르잖아요. 노라의 상징성은 이어지나요?
이어진다고 생각해요. <인형의 집>에서는 여자가 자기의 권리를 찾기 위해 당당히 문을 열고 나가는데, 100년 전의 이야기거든요. 그 당시 여자가 남편과 세 아이를 두고 자신의 삶을 찾겠다며 집을 나간 것은 무척 파격적이었죠. ‘노라이즘’이라는 말이 만들어질 정도였는데, <인형의 집, Part 2> 에서는 그 문을 다시 열고 들어오는 거니까 그것 자체로 흥미롭죠. 들어온 목적을 해결하지 못해서 결국은 또 나가는데, 나가는 이유가 이 드라마의 핵심이에요. 이 여자가 부딪혀야 했던 벽들은 너무나 단단하거든요. 그 단단함을 관객이 납득할 수 있게 하고, 또 다른 인물들은 노라의 행동이 옳은지 반론을 제기하고, 이번 무대에서는 이런 논쟁을 보여주는 거예요.
시기적으로도 잘 맞다는 생각이 듭니다. 지난해 예술의전당에서 <인형의 집>이 공연됐는데, 앞서 미투운동이 확산되면서 양성평등에 관한 많은 담론이 이어졌고, 그로 인해 긍정적으로 달라진 부분이 있는가 하면 폐단도 있었잖아요. 그런 논쟁과도 비슷한 양상일 것 같아요.
그럴 수 있죠. 이 작품이 브로드웨이에서 인기가 많았다고 하는데 신기하더라고요. 보통 우리보다는 양성평등에 있어 진보적이고 앞서 있다고 생각하잖아요. 결국 이건 동서양의 문제가 아니라 남녀가 존재하고 결혼이라는 제도가 존재하는 한 계속해서 이어질 이야기 같아요. 100년 전의 이야기가 아직도 현실에 있잖아요. 그런데 작품이 너무 편파적으로 보이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브로드웨이에서는 페미니스트들이 이 작품을 비난했다고 하는데, 저는 여자의 입에서 나오는 이야기라 받아들이는 데 있어 공평하지 못할까봐 우려되는 부분이 있어요. 왜곡되게, 과하게 들리지 않았으면 좋겠거든요. 이 작품은 답도 없고, 옳고 그름도 없고, 서로 생각하고 모두 행복해지기 위한 논쟁이라고 생각해요.
연습실 분위기는 어떤가요? 무대에서 오래 활동했던 분들이잖아요.
재밌어요. 다들 나이도 있으니까 여유로움도 있고. 예전에는 죽기 살기로 열심히 하는 게 정답인 줄 알았는데, 그게 꼭 옳지는 않더라고요. 그래서 잘 집중해서 만들어 가고 있어요. 잘 통하고, 작품을 바라보는 눈도 비슷하니까 편해요. 생각이 다르고 해석이 다르면 그걸 설득해 가는 과정도 힘들거든요.
남편 토르발트 역에 손종학 씨와 박호산 씨가 더블 캐스팅됐는데, 많이 다를 것 같아요(웃음).
두 사람이 스타일도 많이 다르고 접근하는 방법도 달라요. 호산 씨하고는 작품을 처음 해보는데 유연하고 재밌더라고요. 재기가 뛰어나다고 할까, 감각이 빨라요. 종학 씨는 딱 봐도 우직하고 정직한 스타일이잖아요. 무대 위의 모습도 비슷해요. 그래서 두 사람이 굉장히 다른 토르발트가 될 거예요.
20~30대 관객들은 서이숙 씨를 드라마 속 세고 강한 캐릭터로 많이 접했을 텐데요.
실제로 뵈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어찌된 사연인지 영상으로 직접 확인해 보시죠!
최근에는 공연의 경우 1년에 한 작품 정도 하시잖아요. 그만큼 작품 선택에 신중하실 텐데요.
공연은 일단 들어오는 대로, 시간이 맞으면 다 해요. 공연은 무조건 해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공연은 저에게 의무 같아요. 매체 연기를 하지만 여전히 연극배우라는 말이 편해요. 공연을 하면 연습까지 석 달은 항상 긴장된 상태라서 무척 피곤한데, 그 피곤함이 한편으로는 나를 단단하게 만들어주는 게 있어요. 드라마도 16부작이면 2~3달 촬영하지만, 내가 주인공이 아니라서 시간적으로 좀 여유가 있거든요. 그런데 무대는 주인공이 아니더라도 함께 연습하고 익혀야 좋은 작품이 나오기 때문에 모든 배우가 3개월 내내 긴장하죠. 그게 연극의 힘이라고 생각해요.
품이 많이 드는 연극이 출연료는 훨씬 낮다는데, 그런데도 무대를 찾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배우는 연기를 할 때 자존감도 높아지고 행복한데, 특히 무대 언어는 굉장히 많은 분석이 필요해요. 상징과 은유로 가득 찬 대본을 내가 분석하고 체화해서 무대에서 던졌을 대 관객들이 알아주시면 정말 행복하거든요. 오랜 연습을 곰삭혀서 2시간 동안 압축해서 펼쳐 보일 때의 재미가 무척 커요. 피나는 노력이 좋은 결실을 맺을 때 성취감도 느끼고, 배우의 위대함도 느끼고요.
30년이라는 오랜 시간을 배우라는 한 길을 걸어오셨어요.
예전에 장민호 선생님 연기를 보고 ‘내가 죽기 전에 저렇게 멋진 연기를 할 수 있다면 좋겠다’라는 배우로서 목표가 생겼어요. 그러니까 다른 길을 갈 수가 없죠. 조금 늦더라도 내 시대가 온다는 확신은 있었어요. 세상에 공짜는 없다고 생각하거든요. 시간을 투자한 만큼 분명히 돌아오는 게 있어요. 극단 미추에 20년간 있었는데, 다들 매체로 갈 때도 미추가 해산되기 전까지는 극단을 지켰어요. 뿌듯했죠(웃음). 그러면서 나한테도 점점 좋은 역할이 들어오고, 반면 좀 잘나갈 만하니까 몸이 아프더라고요. 지나고 나니까 인생이 재밌어요. 뭐 하나를 얻기까지 참 쉽지 않고, 스스로 질문과 의심도 많지만, 고통스러운 만큼 성취감으로 위로를 받는 게 배우라고 생각해요.
지금 배우로서 가장 고통스러운 점은 뭔가요?
새로움을 추구하고 싶은데 새로움이 없다는 것. 비슷한 역할을 하면서 소비되는 느낌이 들 때도 있고요. 새로운 모습으로 무대에 서고 싶은데, 이 몸과 목소리를 가지고 다른 인물을 만들어낸다는 게 불가능하다는 걸 아니까 괴로운 거예요. 그럼 내가 할 수 있는 건 대본을 깊게 파고들어서 대본이 하고자 하는 말이라도 정확하게 전달하자, 결국 연습량이 저를 위로해주죠. 지금도 그런 괴로움은 있어요. 또 더 좋은 배우가 되려면 좋은 인격도 가져야 하고, 세상을 따뜻하게 감싸 안을 수 있는 마음도 갖춰야 하고요.
이렇게 고민한 흔적들을 무대에서 또 화면으로 확인할 수 있겠죠?
네, <인형의 집, Part 2> 에서는 제 본연의 모습도 많이 나올 것 같아요. 기존의 센 이미지보다는 통통 튀는 모습도 있고, 제가 하고 싶은 얘기도 많이 나오고요. 또 드라마 <더 뱅커>, <호텔 델루나> 등에서도 좋은 배우들과 재밌게 연기했으니까 많이 봐주세요(웃음).
윤하정
"공연 보느라 영화 볼 시간이 없다.."는 공연 칼럼니스트, 문화전문기자. 저서로는 <지금 당신의 무대는 어디입니까?>, 공연 소개하는 여자 윤하정의 <공연을 보러 떠나는 유럽> , 공연 소개하는 여자 윤하정의 <축제를 즐기러 떠나는 유럽>, 공연 소개하는 여자 윤하정의 <예술이 좋아 떠나는 유럽> 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