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한 제목이지만 책으로도 연극으로도 쉽지 않은 작품,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 가 명동예술극장 무대에 올랐습니다. 한국 공연 50주년을 맞아 기획된 국립극단 초청 공연인데요. 지난 1969년 임영웅 연출에 의해 한국에서 첫선을 보인 <고도를 기다리며> 는 이후 약 1500회 공연을 통해 22만 명의 관객과 만나왔습니다. 하지만 이 가운데 명쾌한 기분으로 공연장을 나선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요? ‘고도(Godot)’가 누구, 또는 무엇인가, 도대체 무엇을 얘기하는 작품일까, 나만 이해를 못하는 것인지... 수많은 의문부터 일말의 좌절감까지 안게 되는 공연인데요. 그렇다면 직접 대본을 읽고 무대에서 표현하는 배우들은 어떨까요? 1994년부터 1996년, 1997년, 1999년, 2000년, 2001년, 2015년, 그리고 2019년 <고도를 기다리며> 까지 에스트라공으로 무대에 서고 있는 안석환 씨를 공연 전 직접 만나봤습니다.
“몸을 많이 쓰는 작품이라서 공연이 끝나면 에너지 소모가 크죠. 공연이 완전히 끝나면 2박 3일 정도 앓는 경우가 있는데, 나이가 들어서 이번에는 더 앓지 않을까. 체력이 약해진 건 사실입니다. 예전에는 2시간 15분 안에 공연이 끝났는데, 지금은 2시간 30분이 좀 넘거든요. 내용이 늘어나서가 아니라 나이가 들어서 그 정도로 느리게 하는데도 힘이 듭니다.”
그러게요, 신체연기가 많은데 대본에 그렇게 적혀 있나요?
그런 것은 아닙니다. 1994년 처음 이 작품을 만났을 때 임 선생님의 당시 디렉션이 ‘토끼처럼 가벼웠으면 좋겠다’였어요. 어떻게 하면 토끼처럼 가볍게 보일 수 있을까 고민하다 통통 튀게 했는데, 지금은 나이 들어서 너구리처럼 보이지 않을까. 저와 더블인 박용수 형은 펭귄처럼 보이더라고요(웃음). 사실 30.5센티의 워커 끈을 풀고 그냥 돌아다니기도 힘들거든요. 그래서 부담을 덜 주기 위해 몸무게를 줄였죠. 연기자는 돈 주면 다 뺍니다(웃음).
94년에 처음 대본 받았을 때 기억하세요?
대학 때 2박 3일 걸려서 책을 읽었던 기억이 나네요. 대본을 받았을 때도 이해는 안 됐고, 사실 그때는 모르고 했습니다. 지금도 아는 게 없지만. 어떻게든 역할을 수행한다는 게 목표라서 시키는 대로 해내는 것이 초연 당시 마음이었던 것 같습니다.
대사를 외우기도 힘들 것 같아요.
굉장히 어렵죠. 기승전결도 없고, 보통 목적이 있어서 그 목적을 향해 가다가 그 목적이 이유가 돼서 리마인드하게 되는데, 이 대본은 모든 단락을 새롭게 외워야 하거든요. 대사량도 굉장히 많습니다. 중간에 빼먹어도, 대사가 틀려도 관객들은 잘 몰라요. 같이 공연하는 포조나 럭키도 잘 모릅니다. 우리도 럭키 대사 모르고요(웃음).
캐릭터라는 게 있을까 싶습니다만, 에스트라공(애칭 고고)은 어떻게 표현하세요?
어떻게 하라고 명시된 건 없습니다. 각자 알아서 하는 거죠. 제가 국내에서는 에스트라공을 가장 많이 연기한 것 같은데, 700회 정도 공연했으니까. 예전에는 주 13회 공연도 했거든요. 할 때마다 다르죠. 94년도에는 멋모르고 했고, 이후에는 코믹하게, 여성적으로 접근한 적도 있어요. 지금은 할아버지처럼 하고 있습니다. 디디(블라디미르의 애칭)를 연기하는 정동환, 이호성 선배도 각을 다 버렸거든요. 원래 임영웅 선생의 연출은 각이 있습니다만.
디디와 고고가 부부 같기도 합니다.
베케트 부부가 레지스탕스로 활동할 때 40일 동안 숨어 있던 적이 있는데, 서로 한 얘기 또 하고 싸우기도 했겠죠. 그게 기본이 돼서 쓴 작품이라고 합니다. 디디는 좀 남성적이고, 고고는 여성적이고, 보호자와 피보호자 같기도 하고. 디디는 형이상학적이고, 모자를 갖고 놀잖아요. 굉장히 지적이고. 반면 고고는 육체적인 얘기나 하고, 구두 갖고 놀잖아요. 형이하학적이라는 걸 상징하죠. 그렇게 다르고 대비되지만 헤어질 수 없고, 없어지길 바라면서도 안 보이면 찾고 그리워합니다.
아마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이 아닐까 합니다. 무엇을 얘기하는 작품인가요(웃음)?
그렇죠. 내용도 없고, 할아버지들이 아까 했던 말 또 하고, 맨날 잊어버리고. 과연 고도란 뭘까. 어떤 사람은 죽음으로 해석하기도 하고, 희망이라고, 또 신이라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습니다만. 베케트도 이렇게 인터뷰했다고 해요. ‘내 작품을 상상해서 보지 마라. 그냥 즐기다 보면 집에 갈 때 생각이 날 거다.’라고.
<고도를 기다리며>, 무엇을 기다리는지도 명확히 알 수 없는 이 난해한 무대가
50년간 이어질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요?
안석환 씨의 생각을 영상으로 직접 확인해 보시죠!
이번 무대는 <고도를 기다리며> 50주년 기념 공연인데요. 배우 입장에서도 많은 생각이 들 것 같습니다.
일단 50주년 공연에 참여했다는 것만으로도 자부심을 갖습니다. 이런 멋진 작품에 참여했다는 것, 제 일생일대의 자랑이거든요. 누가 봐도 인정하는 굉장한 작품을 수행할 수 있는 연기자라는 점에서 자부심이 들고요. 또 한편으로는 산울림의 <고도를 기다리며>가 얼마나 갈지 의문이기도 합니다. 관객들에게 자양분이 될 좋은 고전이 자주 무대에 오르기를 바라는데, 흥행작 위주가 아니면 극단을 유지하기가 힘들거든요. 일반 극단에서 할 수 없는 일을 국립극단을 비롯해 국공립극단에서 해야 하지 않을까.
이 작품을 국내에 처음 소개한 임영웅 연출님은 어떤 분인가요?
임 선생님이요? 우리끼리 농담으로는 포조라고 합니다(웃음). 저희가 제자고, 저희도 나이가 들었으니까 할 수 있는 농담이죠. 굉장히 인간적이시고, 예전에는 무척 깐깐하셨어요. 90년대만 해도 쩌렁쩌렁 목소리가 울렸는데, 지금은 연로하고 편찮으셔서 건배 제의 한 마디 하시는 정도죠. 그런 모습을 보면 인생이 참...
배우도 나이가 들지만, 여전히 극을 끌어갈 수 있는 작품이 있다는 게 무대의 매력이지 않을까요. 드라마나 영화에서는 힘들잖아요.
드라마나 무대에서는 끌어본 적이 없습니다(웃음). 아직까지 무대를 이끌어가는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건 자랑거리죠. 고민이 있다면 과연 언제까지 그럴 수 있을까. 그렇지 않은 역할을 맡는 게 싫어서가 아니라 어느 순간 편안한 여생 같은 느낌이 들지 않을까. 그럴 바에는 안 서는 게 낫지 않을까 싶은데, 그런 느낌이 들기 전까지는 앞으로도 더 열심히 무대에 서고 싶습니다.
극단과 마찬가지로 연극배우가 경제적으로 가장 힘들다고 하잖아요. 물론 드라마를 하시지만, 꾸준히 연극 무대를 찾는 이유가 궁금합니다.
무대에 서는 게 가장 행복합니다. ‘왜 내가 연기를 했을까’를 생각하면 시작이 연극이거든요. 돈은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지만, 인생이라는 건 한 번뿐이니까 살고 싶은 대로, 내 생각을 지키며 살고 싶습니다. 나를 위해 얼마나 행복한 짓을 하는가가 더 중요한 잣대인 거죠. 그리고 시나리오는 대부분 생활상을 담아내지만, 희곡은 내 인생에 없던 부분, 내가 아직 안 살아봤던 곳을 향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미천한 나의 지적 수준을 조금이라도 더 다질 수 있는 기회를 주는 희곡을 읽을 때 행복합니다.
마지막으로 극 중 고도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 그리고 지금 안석환 씨에게 고도는 무엇인가요?
죽음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꽁꽁 묶여 있는 것에서 해방되는 것. 구두끈을 묶으려 할 때 싫다는 것은 묶여 있기 싫다는, 인간의 원초적인 자유 욕망이죠. 인간이 완벽한 자유를 언제 얻을까 생각하면 이 세상을 떠날 때가 아닐까. 개인적으로 한 해 한 해의 고도는 이미 접었다고 생각합니다. 남아 있는 나의 그릇은 얼마 만큼이고 얼마나 더 비워야할까를 생각할 때죠. 그저 어떤 면에서라도 좀 더 배려할 수 있는 사람이면 좋겠습니다.
윤하정
"공연 보느라 영화 볼 시간이 없다.."는 공연 칼럼니스트, 문화전문기자. 저서로는 <지금 당신의 무대는 어디입니까?>, 공연 소개하는 여자 윤하정의 <공연을 보러 떠나는 유럽> , 공연 소개하는 여자 윤하정의 <축제를 즐기러 떠나는 유럽>, 공연 소개하는 여자 윤하정의 <예술이 좋아 떠나는 유럽> 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