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스플래쉬
아이 무릎에 상처가 늘어간다. 상처의 딱지가 떨어지기도 전에 새 딱지가 생긴다. 퇴근해서 “지안아 여기는 왜 다쳤니” 물으면 늘 “달리다가 넘어졌어” 답한다. 아이는 요즘 쉴 새 없이 뛰고 달린다. 내가 보고 있을 때도, 내가 옆에 없을 때도 달리고 달린다.
그러다 보니 넘어져 상처도 생긴다. 두 돌 즈음에는 달리는 데 능숙하지 않아서 넘어져도 상처랄 게 거의 생기지 않았다. 세 돌이 지난 지금은 자기 움직임을 주체하기 힘들 정도로 내달리다 보니 넘어지면 상처가 생긴다.
다행히 두려움을 남길 정도의 상처는 아니었다. 아니면 달릴 때 느끼는 쾌감이 넘어질 때의 두려움보다 훨씬 더 크거나. 아이는 상처 따위 아랑곳 않고 계속 내달린다. 어린이집 등하원을 시켜 주시는 할머니는 지안이가 너무 빨라 쫓아가기 힘들다고 하신다.
집 앞 고깃집에서 밥을 먹고 돌아오는 저녁엔 잠깐도 멈추지 않고 5분을 내내 달렸다. 주말의 삼청동 거리에서도 “아빠한테 잡히지 않을 거야!” 외치며 달렸다. 지나가는 차와 오토바이를 경계하랴 주변 사람들에게 폐 끼칠까 주의하랴 엄마 아빠는 정신이 없다. 내리막길에서도 다다닥 내달리는 아이를 보면 넘어질까 걱정도 된다. 그래도 연신 웃는 아이를 보니 즐겁다. 땀을 잔뜩 흘리고 헉헉 대면서도 아이의 표정은 너무 좋다. 잘 걷지 않고 너무 많이 안아 달라고 하는 건 아닐까 생각한 적도 있었는데 어느새 이렇게 컸다.
“넘어져서 아프진 않았어?” 물으면 “조금 아팠지만 괜찮아” 씩씩하게 답한다. 적혈구와 백혈구, 혈소판이 나오는 과학동화를 읽어줬더니 “혈소판이 딱지를 만들어 줬으니까 이제 곧 낫겠지”하기도. 몸이 자란 만큼 말도 늘어서 아빠가 책 읽으며 했던 말을 흉내 낸다. 그리고 흉내에 멈추지 않고 자기 말을 꽤 능숙하게 한다.
한 번씩 <바람이 분다> 놀이를 하면 깜작 깜짝 놀라곤 한다. <바람이 분다> 놀이는 가수 이소라의 노래 <바람이 분다>의 멜로디에 맞춰 하는 말 잇기 놀이다. 내가 먼저 “바람이 분다~” 하면 아이가 “꽃이 빨갛다~” 하는 식으로 눈에 보이거나 지금 느끼는 것을 말로 만드는 놀이다. 지안이가 좋아해서 이따금 하는데, 처음엔 내가 말한 후 아이가 답하기까지 약간의 시간 간격이 있었다. 요즘은 거의 곧바로 나온다. “자동차가 간다~”, “고양이가 있다~” 같은 말은 물론이고, 이제는 사이사이에 자기 의중을 전하기도 한다. “빵집이 있다~”, “식빵을 사자~”하는 식이다.
긴 문장도 곧잘 만들게 되었다. “기범이는 배가 아프고 열이 나서 오늘 어린이집에 못 왔어.”, “아빠, 운전은 꼭 필요할 때만 하세요. 미세먼지가 나와요”, “과자가 두 개 밖에 없으니까 나는 이거 먹을 게 엄마 아빠는 그거 나눠 드세요” 같은 말을 하니 이제 우리 사이에 제대로 된 대화가 된다. 정말 많이 컸다.
네 살이라는 나이는 이런 나이구나. 아이를 바라보며 내가 네 살이었을 때를 상상해보기도 한다. 어떤 말을 재잘대고 있었을까. 내 무릎에도 상처가 있었겠지. 부모님도 지금 내 마음 같았을까. 사람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다른 사람의 삶을 상상해 볼 수 있는 존재지만, 네 살이라는 나이는 다른 사람의 네 살을 보면서 자신의 네 살을 상상해야 한다.
물론 아이는 아직 한참 더 자라야 한다. 기저귀를 거의 떼긴 했지만 응가는 꼭 기저귀를 차고 한다. 자다가 이불에 지도도 그린다. 몸을 들어 앉혀주지 않으면 그네를 탈 수 없다. 혼자 밥을 먹으라 하면 옷에 묻히고 바닥에 흘린다. 어떤 날은 밥은 안 먹고 우유만 먹겠다고 떼를 쓰기도 한다.
반말과 존댓말은 기준 없이 뒤섞인다. “엄마 아빠한테는 높임말을 써야 해” 했더니, “엄마 아빠, 높임말이 아니라 로켓말이예요” 하며 곧 죽어도 높임말이 아니고 로켓말이라고 우긴다. 처음 ‘높임말’이란 단어를 들었을 때 ‘로켓말’이라고 저장되었나 보다. 그렇게 들릴 수도 있는 발음인 것 같긴 하다.
아이는 많은 것에 능숙해졌지만 능숙해진 것들조차도 아직 어설프다. 그저 어느새 이만큼 자랐구나 대견할 뿐, 손이 갈 일도 가르칠 것도 아직 많다. 당연하다. 하지만 분명히 아이는 새로운 단계로 진입했다. 부모의 보살핌을 받고, 부모의 가르침을 흡수하던 최초의 단계는 이제 지나왔다. 말을 얼마나 잘하느냐, 몸을 얼마나 잘 놀리느냐를 떠나서, 나는 아이의 이 말을 듣고 하나의 단계가 지나갔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깐만”, “조금만 있다가”, “말하고 싶지 않아”
처음의 아이는 부모에게 모든 걸 맡겼다. 몸을 가누지 못하고 우는 것 외에는 의사 표현을 할 수 없는 시절은 물론이고 어느 정도 커서도 그랬다. 산책을 하면 산책을 가고, 목욕을 시키면 목욕을 하고, 밥을 주면 밥을 먹었다.
그러다 돌이 꽤 지나고 나서부터는 거절의 행위들이 분명해지기 시작했다. 밥을 먹일 때 고개를 확실히 홱 돌린다든지, 한참 놀다가 “이제 자야 돼” 할 때 “싫어 싫어” 한다든지, “이 닦아야지” 하면 악을 쓰듯 울고 고집을 부리며 버티는 경우가 생겼다. 이 역시 아이의 내면이 성장하고 있으며 독립적인 존재감에 발산하기 시작하는 징표였지만, 여전히 아이의 반응은 부모의 action에 대한 re-action이었다. 수긍하거나 거절하거나 둘 중 하나였다. 아이는 부모의 요구에 반응은 했지만 자신의 의사를 보다 상세히 제시하는 존재는 아니었다.
지금은 다르다. “이제 잘 시간이야”하면 “잠깐만, 책 좀 읽고”라 답하고, “약 먹어야지”하면 “조금만 있다가 먹을게요” 한다. 어린이집 알림장에 친구랑 다퉜다는 얘기가 있어서 “지안아, 오늘 친구랑 왜 다퉜니?” 물어봤는데 묵묵부답이라 여러 번 계속 물어봤더니 “말하고 싶지 않아”라 말한다. 부모의 요구에 수긍하거나 거절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사를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부모와 협상하고 조율하며 심지어 행동을 중단시키기도 한다.
이런 모습이 점차 잦아지니 아이가 내 옆의 한 사람이라는 실감이 새삼 든다. 보살핀다는 명목으로 좌우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대화하고 합의하며 인생을 함께 걸어갈 동료라는 느낌이 솟아나기 시작했다. 우리는 여전히 끌어안고 볼을 비비고 목말을 태우며 자주 찰싹 붙어있지만 서로의 ‘거리’를 점차 의식하게 될 것이다. 앞으로도 아이를 보살피고 가르치는 것이 부모의 역할이겠지만 그 보살핌과 가르침이 ‘아이의 납득’이라는 과정을 반드시 거치도록 보다 세심히 신경 써야 할 것이다. 존중하고 존중받을 때 우리는 삶을 밀고 갈 힘을 얻으니까. 동료란 그런 힘을 주고받는 관계니까.
네 살은 이런 나이구나. 씨앗이 흙 속을 뚫고 완연한 싹을 드러내며, 이제 줄기를 길게 뻗어 올릴 준비를 마친 것 같은.
아이가 자랐다.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간다. 육아도 이제 달라져야 한다.
김성광
다행히도, 책 읽는 게 점점 더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