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자를 위한 도시 인문학] 정동진독립영화제로 떠나자
도서출판 가지에서 출간하는 <여행자를 위한 도시 인문학> 시리즈는 우리가 사랑하는 도시들의 풍경과 맛과 멋, 사람과 공간에 깃들어 있는 서사를 밝혀주는 책입니다. 그 지역에서 자랐거나 일정 기간 살아본 사람들이 애정을 담아 기록한 ‘본격 지역문화 안내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글ㆍ사진 도서출판 가지
2019.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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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 밤 바닷가 마을에서 펼쳐지는 영화 축제, 정동진독립영화제가 열리는 장면.

 

 

8월에 만나는 한여름 밤의 꿈, 정동진독립영화제

 

삼면이 야산으로 둘러싸여 마치 작은 분지 같은 운동장 정면에 대형 스크린이 설치되고 그 앞으로 수백 개의 의자가 놓였다. 햇살이 약해지자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의자 옆 운동장에 설치된 모기장 텐트와 돗자리에도 사람들이 들어찼고, 운동장 가장자리의 스탠드석은 늦게 온 사람들이 차지했다. 운동장 앞쪽에 마른 쑥을 쌓아 모깃불을 놓았다. 매캐한 연기가 운동장을 날아다닌다. 하늘에는 별 하나가 유독 반짝인다. 빛나던 별이 그 수를 늘려갈 때 저 멀리 어둠 속으로 기차가 지나간다.

 

한여름 강릉 정동초등학교에서 열리는 정동진독립영화제 풍경이다. 정동진독립영화제는 강릉씨네마떼끄와 한국영상자료원 그리고 독립영화인들이 함께 만들어가는 축제다. 1999년 처음 개최된 이후 매년 열려 2019년에는 스물한 살이 된다. 8월 첫째 주 개최되는 이 영화제는 ‘별이 지는 하늘, 영화가 뜨는 바다’라는 슬로건으로 시작된다. 슬로건만으로도 해안 가까이 야외에서 열리는 영화제임을 알 수 있다.

 

정동진독립영화제의 시작은 필름 배급과 영화 상영의 독점을 주도하는 멀티플렉스의 등장과 관련이 있다. 멀티플렉스 영화관의 상영관 독과점으로 흥행 가능성이 낮은 영화들은 외면을 당했다. 소재와 주제, 나아가 형식의 다양성을 보여주는 작품들은 제작되어도 상영할 극장을 구할 수 없었다. 이런 답답한 현실에서 영화인들의 숨통을 틔워준 것이 독립영화관이다. 독립영화관에서는 상업성을 담보하지 못한 예술영화나 실험영화 그리고 다큐멘터리 영화들이 상영되었다.

 

강릉에는 독립영화 전용관인 ‘강릉독립예술극장 신영’이 있다. 2012년, 전국에서 두 번째로 생긴 민간 독립영화 전용관이다. 2016년 재정적인 문제로 한차례 휴관하기도 했으나 강릉시의 예산 지원에 힘입어 2017년 재개관했다. 강릉시는 신영극장에 운영비 5000만 원을 지원했는데 전국 기초자치단체가 독립영화관을 지원한 최초의 사례로 꼽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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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진 해변. 한양에서 정동쪽에 있어 ‘정동진’이라 이름 붙은 이곳으로 매년 첫 해돋이를 보러 오는 사람이 많다. ⓒsutterstock

 

 

1950년대에 생긴 신영극장은 강릉 사람들에게 영화관이라기보다 어떤 상징 같은 곳이었다. 유동인구가 많은 번화가에 위치해 “어디서 만날래?”라는 물음에 “신영극장”이란 대답이 툭 튀어나왔다. 신영극장 앞에서 만나 해오라기 쫄면집도 가고, 빙그레 김밥집도 가고, 가자니아 커피숍에도 갔다. 강릉에 가장 먼저 생긴 강릉극장이 1991년 폐관된 뒤 기존의 신영극장과 동명극장을 필두로 썬프라자극장, 문화극장, 씨네아트홀극장, 동부극장 등 소극장 형태의 극장들이 난립했지만 수명은 그리 길지 못했다. 소극장들이 하나둘 폐관할 즈음 멀티플렉스 영화관이 생기면서 극장가를 평정해버렸다. 신영극장만이 ‘강릉독립예술극장 신영’이란 이름으로 지금까지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독립영화를 상영하는 영화제와 영화관이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강릉은 매우 의미 있는 도시다.

 

정동진독립영화제는 시민들에 의해 개최되는 영화제다. 정기회원들의 회비와 자원봉사자들의 헌신, 그리고 영화 애호가들의 참여가 기본이 된다. 2004년부터 사용한 손글씨 로고는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마음을 모아 만든 영화를 선보인다는 점에서 영화제의 정서와 맞닿는다.

 

영화제는 야외에서 진행되기 때문에 날씨가 행사의 성패를 좌우한다. 비만 오지 않으면 반쯤은 성공한 것이다. 별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은 하늘에서 노란 원피스를 입은 붉은 볼의 소녀가 살만 남은 우산을 들고 내려온다. 정동진독립영화제의 수호천사인 ‘우산살 소녀’다. 자연스럽고 인간적인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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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간이역 중 바다와 가장 가까운 정동진역. ⓒsutterstock

 

 

대형 스크린에서는 러닝타임이 채 5분도 되지 않는 단편부터 한 시간을 훌쩍 넘기는 장편까지 다양한 길이와 장르의 영화가 상영된다. 영화제에 참가한 감독과 배우들이 관객과 대화의 시간을 갖기도 한다.

 

모기장 텐트 속에서 시원한 음료를 마시며 세상 편한 자세로 영화를 볼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다. 해변에서 물놀이하던 즐거움을 그대로 이어 영화 속을 유영할 수 있는 정동진독립영화제는 주제와 형식만큼 관람 방법도 자유롭다. 그래서인지 운동장을 채운 사람들은 영화 한 편이 끝날 때마다 우렁찬 박수를 보낸다. 독립영화가 지향하는 자유로움을 함께 나눌 관객이 얼마나 많은지 가늠할 수 있는 장면이다.

 

2018년 정동진독립영화제에서는 작품선정위원회가 추려낸 작품들을 상영해 관객들의 호평을 받았다. 녹록치 않은 환경 속에서도 독립영화의 저변 확대와 활성화에 기여하고 있는 정동진독립영화제를 어떻게 누리느냐는 개인의 몫이다.


이 글을 쓴 정호희는 강릉에서 나고 자랐습니다. 대학 졸업 후 오죽헌/시립박물관에서 26년간 유물을 다루며 상설전시와 기획전시를 담당했고, 지금은 강릉시청 문화예술과로 자리를 옮겨 문화재관리 업무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혼자 궁싯궁싯거리는 시간을 좋아하고 일 내 내내 매화, 수수꽃다리, 인동초, 산국 향기를 탐하러 쏘다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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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출판 가지

<세계를 읽다> 시리즈는 장소보다는 사람, 그리고 그들의 삶에 초점을 맞춘 본격적인 세계문화 안내서다. 그곳에서 직접 살아보며 문화적으로 적응하는 기쁨과 위험을 몸소 겪었던 저자들이 이방인의 눈에는 낯설게 느껴질 수밖에 없는 현지인의 생활문화, 관습과 예법들을 쉽고 친절하게 알려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