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져진 인생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기
병에 걸려서 좋은 게 있습니다. 상을 받아도 시샘 받지 않고, 말을 좀 잘못해도 아무도 책망하지 않아요. 싸울 힘이 없으니 좀 겸손해지기도 해요.
글ㆍ사진 하지현(정신과 전문의)
2019.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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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스플래쉬

 

 

‘수용’의 바람직한 롤모델

 

태어나 숨을 거두기까지 매일 수많은 일이 벌어진다. 안타깝지만 간절히 원하던 일이 일어나는 행운보다는 황당한 일들이 툭 하고 무심하게 던져져 주저 앉아 버리게 만드는 일이 훨씬 많다. 로또에 당첨되기보다는 날아가는 새가 싸지른 똥이 내 어깨위로 떨어질 가능성이 크듯이. 좋은 소식은 대부분 툭툭 털고 넘어갈 수 있다는 것이나, 모든 것을 그럴 수 없다는 것이 문제다. 그 무게가 아프고 무겁게 느껴질 때 사람들은 ‘트라우마’라고 말한다.

 

트라우마로 인해 내 인생이 확 바뀌어 버렸고, 그 후로 나는 행복하지 못하게 되었다고. 반면 같은 일을 어떤 사람은 ‘역경’이라고 해석한다. 힘들고 괴로웠지만, 덕분에 더 강해질 수 있었고, 정신 바짝 차리고 살게 돼서, 지금의 내 성취의 근본이 되었다고 말한다. 3자적 관점에서 두 가지 버전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트라우마와 역경은 동전의 앞뒷면과 같이 보인다. 해석에 따라 달라진다. 모든 걸 역경으로 보며 좋게만 해석하려고 하는 것도 (예: 사람은 군대를 갔다 와야 어른 된다), 트라우마로 보고 운명을 탓하고 자신을 피해자로만 위치시키려는 것, 이유를 만들어 해명하려고만 하는 것도 모두 썩 바람직하지 않다. 어떤 태도가 좋을까?

 

나는 액면대로 받아들이자고 제안하곤 한다. 일단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부터 하려는 노력을 해보자고. 수용(acceptance)은 그런 점에서 성숙의 중요한 척도라고 생각한다. 일단 중립적으로 받아들이고, ‘아주 나쁜 것은 아니니 다행’인 정도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그 정도가 인간적인 측면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이 아닐까? 말은 이렇게 하지만, 내게 막상 큰 일이 닥친다면 제대로 해낼 수 있을지는 확언할 수 없다. 닥쳐봐야 알 수 있을 테니까.

 

여기까지 이야기한 ‘수용’의 바람직한 롤모델을 만날 수 있었다. 일본의 배우 키키 키린이 남긴 120가지 말을 담은 <키키 키린>이다. 키키 키린은 우리에게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를 통해 친숙하다. 2018년 칸느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어느 가족’에서 인상적인 연기를 했고, 그전에도 같은 감독의 <태풍이 지나가고>, <걸어도 걸어도>, <바닷마을 다이어리> 등에서 출연한 바 있다. 우리에게는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로 친근하지만, 실은 수십년전부터 일본에서는 유명한 배우였고 다양한 사건사고의 중심에 있는 셀럽이었다. 그녀의 인생을 잠깐 살펴보자.

 

1943년 도쿄에서 태어나 유키 지호라는 예명으로 18세부터 배우를 시작해서 21세에 첫 결혼을 하고 25세에 이혼을 했다. 배우로 자리를 잡아가는 중에 30세에 락 뮤지션 우치다 유이와 만난지 50일만에 전격적으로 결혼했는데 2년만에 별거를 시작해서 따로 살면서도 33세에 딸을 낳았다. 38세에는 남편의 이혼소송을 일방적이라며 공소를 제기해 승소를 했다. 34세에 즉흥적으로 경매에 팔 것이 없다면서 예명을 판매하고, 키키 키린으로 개명했다. 다양한 상을 수상하면서 배우로 명성을 날리다 60세에는 시력이 저하돼서 거의 볼 수 없게 되었고, 몇 년 후에는 유방암으로 수술을 받았고, 70세에는 전이로 암이 전신에 퍼지게 되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연기를 하면서 마지막까지 일을 하다가 결국 2018년 75세로 사망을 했다.

 

이 책은 그가 70년대 중반부터 40여년간 다양한 매체와 한 인터뷰, 시사회 등 공개적 자리에서 한 문답, 스피치등에서 그녀의 모습을 잘 대변한다고 여겨진 말들을 따서 삶, 병, 늙음, 사람, 인연, 집, 직업, 죽음이라는 주제로 120개의 파편을 던져놓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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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상황과 마주쳐도 늘 웃는 얼굴을 하려고 해요

 

그녀가 남긴 말들을 몇 개 펼쳐 보도록 하자.

 

“행복이란 늘 존재하는게 아니라 스스로 발견하는 것!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이나 시시해 보이는 인생도,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면 거기서 행복을 발견할 수 있을 겁니다.”

 

“나는 만사에 꼭 이래야한다는 법은 없다고 봐요. 예를 들어 내 얼굴을 보세요. 이건 실수에 의한 작품이라고요.”

 

“조금만 더 더 하는 바람을 없애는 겁니다. 이럴 리가 없다, 이렇게 됐어야 했는데 같은 생각도 일절 하지 않고요. 지금 이렇게 있을 수 있는 건 정말 고마운 일이야. 정말 기적같은 일이야라고 생각하면 쓸데없는 욕망이 사라지고 금세 편안해져요.”

 

키키 키린은 후반기에는 매니저나 소속사, 스타일리스도 없이 혼자 모든 일정을 소화했다. 남편과 오랜 별거를 하면서 딸을 혼자 키우면서 배우로 커리어를 만들어갔다. 삶이 불안해서 부동산에 관심을 가졌다고 고백하며 집을 직접 지어 살았고, 암에 걸린 다음에도 연기를 멈추지 않았다. 평탄한 인생이라고 말하기보다 기구한 팔자라고 평하기 쉬운 인생이다. 하지만 그녀는 너무 큰 바람을 버리고, 받아들이고, 이렇게 있을 수 있는 것만도 고맙다고 여긴다. 행복은 찾아내는 것이라 믿으면서.

 

이때 필요한 마음가짐은 “나쁜 상황과 마주쳐도 늘 웃는 얼굴을 하려고 해요”라는 마음이다. 잘 일이 풀리지 않는다고 해도 “실패하면 실패한 데서부터 다시 시작하면 된다”는 마음으로 너무 어렵고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으려고 노력을 한다고 키키 키린은 말한다.

 

유방암에 걸린 다음의 반응도 예사롭지 않다.

 

“병에 걸려서 좋은 게 있습니다. 상을 받아도 시샘받지 않고, 말을 좀 잘못해도 아무도 책망하지 않아요. 싸울 힘이 없으니 좀 겸손해지기도 해요”


“암에 안걸렸다면 별 볼일 없이 살다가 별 볼 일 없이 죽었을 거예요. 그저 그런 인생으로 끝났겠죠”


젊을 때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고, 일을 많이 하다보니 암에 걸렸다고 이유를 찾고, 일종의 피해자로 포지셔닝하는 사람을 꽤 많이 본다. 키키 키린은 다르다. 좋은 점도 있고, 인생은 모두 필연이듯, 암도 필연일 것이고, 암덕분에 인생이 흥미진진해졌다고 여기는 것이다.


잘 나이들었다는 것, 성숙했다는 것의 신호는 이런 태도로부터 온다고 생각한다. 키키 키린은 나이든다는 것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나이를 먹는다는 건 꽤 흥미롭습니다. 젊을 때 당연하게 하던 일을 할 수 없게 되거든요. 그게 불행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오히려 이런 변화가 재미있습니다....살아온 모습대로 죽는거 아닐까 싶네요.”


“삶의 질이 나쁜데 오래 살기만 하는건 의미가 없지 않을까요”


“쉬지 않고 55년간 배우생활을 하면서 좋은 일도 그렇지 못한 일도 있었죠. 그런데 나쁜 일이 단지 나쁜 일은 아니더라고요. 결국 좋지 않은 일까지 모두 자양분이 되더군요”


오랜 배우생활 중 아쉬운 게 없는지 묻는 질문을 수도 없이 받았다고 한다. 이때 이렇게 대답한다.


“아쉬운 게 별로 없어요. 한 번 그런게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거든요. 그런 면에서 난 좀 태평스러운 암환자에요”


내게 던져진 수많은 일들, 좋았던 일도 있고 나쁜 일도 있었을 것이다. 어떤 것은 예측할 수 있었지만 막지 못한 것도 있고, 틀린 선택으로 후회할만한 결과를 얻은 일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성숙한 어른은 그것도 인생의 한 부분으로 수용한다. 원치 않은 일이 있었던 만큼, 감사한 일도 있고, 행운의 영역으로 볼 것도 분명히 있었을 것이니. 많은 이들이 감사와 행운의 사건을 당연히 일어날 일로, 불운과 후회스러운 일을 일어나서는 안될 일로 여기면서 인생을 평가한다. 그런 이들의 표정을 보면 어딘지 모르게 찌뿌둥하고, 짜증이 깊이 박힌 유리조각같아서 영원히 통증이 존재할 것 같은 얼굴이다. 그에 반해 키키 키린의 얼굴은 어떤가? 꼭 스크린에서의 연기로만 볼 것이 아니라해도, 뭐라 설명하기 어려운, 잘 나이든 노인의 좋은 표정이 깊이 스며져있다. 연기를 넘어서 인생의 깊이가 스크린을 채우기에 말년의 영화들이 국경을 넘어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건드렸으리라 믿는다.


‘어떤 가족’의 후반부에 함께 사는 가족들이 해수욕장으로 놀러가는 장면이 생각난다. 바닷가에서 뛰노는 핏방울 섞이지 않았지만 진짜 가족이 되어준 이들을 파라솔 밑에서 바라보던 할머니(키키 키린)는 들리지 않게 조그맣게 속삭인다.


“고마워요”라고.

 

정신분석가 Bion은 인간의 성숙, 혹은 치유의 핵심은 ‘고통을 애써 외면하거나 회피, 억압하지 않고, 환상으로 대체하지 않고, 생각으로 속이지 않고, 있는 그대로 겪어내는 경험을 할 수 있는 것’이라 한 바 있다. 키키 키린도 그런 삶을 살아온 것이 아닐까? 나이듦과 성숙, 병과 죽음을, 운명과 행운을, 관계와 자아를 맞닥뜨렸을 때 어떤 태도를 가져야할지 중요한 통찰의 한 조각을 얻은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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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현(정신과 전문의)

어릴 때부터 무엇이든 읽는 것을 좋아했다. 덕분에 지금은 독서가인지 애장가인지 정체성이 모호해져버린 정신과 의사. 건국대 의대에서 치료하고, 가르치고, 글을 쓰며 지내고 있다. 쓴 책으로는 '심야치유식당', '도시심리학', '소통과 공감'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