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의 작은 바닷가 마을에서 펼쳐지는 사랑이야기’라는 수식어에 이미 엷은 미소가 지어지지 않을까. 지난 7월 개막한 창작뮤지컬 <너를 위한 글자> 는 소박하지만 따뜻한 이야기로 관객들의 마음을 보드랍게 어루만지고 있다. 19세기 초 이탈리아 발명가 펠리그리노 투리의 실제 이야기를 모티브로 엮은 <너를 위한 글자>는 작가 지망생 캐롤리나를 통해 처음으로 사랑의 감정을 느낀 투리가 그녀만을 위한 발명품을 만드는 내용이다. 잔잔한 이야기의 3인극인 만큼 극을 끌어가는 배우들의 역량이 더욱 중요한데, 투리 역에 ‘딱이다’ 싶은 배우 강필석 씨를 대학로의 한 카페에서 직접 만나 보았다.
뮤지컬 제목이 독특합니다.
투리라는 이탈리아 사람이 눈이 멀어가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타자기를 만들었다는 실화를 모티브로 만든 작품이에요. 동화처럼 느껴지는 아주 사랑스러운 작품이죠. 그동안 비극적인 사랑을 많이 했는데, 이번에는 무대에서 관객들의 긍정적인 에너지가 고스란히 느껴져서 좋아요. 다만 큰 사건이 없는 섬세한 이야기라 공연 전부터 더욱 진지하게 임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따뜻하고 가벼운 느낌의 작품은 배우들도 기분이 좋아서 자칫 붕 뜰 수 있거든요.
투리 역에 정동화, 정욱진, 윤소호 씨와 함께 캐스팅됐습니다. 맏형이네요.
제가 양심이 없죠(웃음)? 사실 몇 번을 고사했어요. 어렸을 때는 배우로서 연기력이나 어떤 표현을 많이 할 수 있는 역할에 매력을 느꼈다면 나이가 들수록 따뜻한 작품이 점점 좋아지기는 해요. 대본이 재밌고 캐릭터가 마음에 들어서 끌렸지만, 제가 할 수는 없을 것 같다고 몇 번을 ‘이러지 맙시다!’ 얘기했죠. 좀 더 젊은 에너지, 어린 친구들의 설렘이 필요하겠더라고요.
네 분에게서 느껴지는 비슷한 이미지가 있기는 합니다.
그런가요? 투리는 표현에 서툴 뿐이지 자신의 감성에 솔직한 사람이에요. 아이처럼 단순하게 사고하거든요. 누군가가 좋으면 그냥 더 챙겨주는 거예요. 쉬운 일 같지만 점점 어려워지잖아요. 나이가 들어서 어려워지는 면도 있고, 세상이 그렇게 돼 가는 면도 있고. 모든 게 너무 편리해진 나머지 사람에 대한 진정한 관심도 없는 것 같아요. 투리는 본질, 그거 하나만 집중하는 캐릭터라서 좋아요.
또래 배우 중에 이런 이미지를 소화할 수 있는 배우가 흔치 않습니다(웃음). 평소 가치관이나 삶의 방식이 투영되는 거 아닐까요?
사실 철이 안 들었는지 이런 감성이 있기는 해요. 현실적인 생각을 덜 하는 것 같고. 아직 결혼을 안 해서 좀 더 이상적인 생각을 많이 하는 면도 있겠죠. 그래도 연습 초반에는 좀 힘들더라고요. 어리게 연기하고 싶지는 않았거든요. 그렇다면 제가 할 이유가 없잖아요, 어린 배우들이 많은데. 그래서 이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이야기에 더 많이 집중한 것 같아요. 이런 작품은 이제 보는 걸로 만족해야겠다는 것도 깨달았고요(웃음).
영화나 드라마와 달리 국적부터 시대, 캐릭터도 워낙 다양하게 만나니까 현실과의 괴리가 더 클 것 같습니다.
그런 생각을 배우는 다 할 거예요. 어렸을 때는 센 캐릭터를 많이 맡기도 했고, 인물에서 나오는 데도 오래 걸렸어요. 진지한 인물을 연기할 때는 일상에서 친구들과 농담하는 것조차 어렵더라고요. 지금은 캐릭터와 강필석이 밸런스를 잘 맞추면서 공존하는 것 같아요. 진지한 역할을 해도 털어버리고 또 집중하고, 이런 시간이 예전에 비해 훨씬 짧아졌죠. 일과 생활로 구분된다는 게 아니라 지금 내가 느끼는 것, 관객들과 어떻게 만날까가 중요해요. 그래야 상대배역이 주는 것도 고스란히 받을 수 있고요.
대극장과 소극장, 라이선스와 창작 공연도 균형을 잘 맞춥니다.
따로 생각해서 한 건 없어요. 어떤 작품을 할까에 대한 고민은 많이 하지만, 지금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 이 작품에서 뭘 할 수 있을까가 중요하거든요. 요즘은 배역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하죠. 배우로서 또 한 번의 과도기라고 할까요. 어떤 걸 바라봐야 하나... 뮤지컬이라는 장르 자체가 느낌이 젊잖아요. 이제는 색깔을 짙게 칠해야 하는 나이가 된 것 같은데, 배우 강필석이 어떻게 색칠을 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죠.
지금까지 많은 작품에 참여했는데 여전히, 또는 언제든 하고 싶은 작품이 있나요?
<맨 오브 라만차>요. 저한테는 유일한 작품이에요. 사실 30대 초반에 할 뻔했는데, 주위에서 말리더라고요. 그때 안 하길 천만다행이죠. 되게 못했을 거예요. 지금 해도 자신 없는 인생의 깊이인데, 그 나이에는 표현하기 급급했겠죠. 이제 기다리고 있는데, 그 이후로는 제안을 안 주시네요(웃음). 사실 돈키호테가 투리와 비슷한 면이 있어요. 어리석고 바보 같아 보여서 사람들은 미쳤다고 하지만, 결국 본질에 대한 이야기거든요.
배경이 이탈리아 마나롤라라서 마지막 질문으로 준비했습니다. 한 달간의 시간이 주어진다면?
마나롤라로 떠나야죠(웃음). 떠날 때가 되긴 했어요. 요즘 대학로 걸어가다 노천카페만 봐도 계속 앉아 있고 싶다는 생각을 하거든요. 예전에는 한두 달 여행을 많이 했는데, 요즘은 짧게 휴양지만 가고. 무대에 있는 게 항상 즐겁고 재밌었는데, 작년에는 일이 너무 많으니까 지치더라고요. 이제 좀 오래 떠나려고요!
윤하정
"공연 보느라 영화 볼 시간이 없다.."는 공연 칼럼니스트, 문화전문기자. 저서로는 <지금 당신의 무대는 어디입니까?>, 공연 소개하는 여자 윤하정의 <공연을 보러 떠나는 유럽> , 공연 소개하는 여자 윤하정의 <축제를 즐기러 떠나는 유럽>, 공연 소개하는 여자 윤하정의 <예술이 좋아 떠나는 유럽> 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