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사자가 달린다
밤새 버펄로 한 마리가 초원으로 돌아갔다. 『푸른 사자 와니니』 에서 동물들은 죽음을 ‘초원으로 돌아간다’라고 말하곤 한다. 세렝게티 동물들에게 그것은 비유가 아닌 사실적인 표현이다.누군가 사자의 사냥감으로 최후를 맞는다. 그건 단지 사자의 목숨만 살리는 일이 아니다. 사자 무리가 식사를 끝내면 다른 동물들에게 차례가 돌아간다.
하이에나나 자칼 같은 사냥꾼들에게, 주름얼굴대머리수리 같은 청소부 새들에게, 끝으로 개미 떼가 다녀가고서야 초원의 식탁이 비워진다. 그들의 배설물은 또 쇠똥구리에게 귀한 자산이 된다. 그리고 땅을 스며들어 풀을 길러 내고, 그 풀을 먹고 자라난 초식 동물을 달리게 하고, 사냥이 계속되게 한다. 그러니 세렝게티의 죽음이란 곧, 초원으로 돌아가는 일이다. 초원에서 되살아나는 일이다.
길가에 우북하게 자라난 덤불에서 쉬고 있는 사자 무리는 간밤에 버펄로로 포식을 한 모양이었다. 버펄로도 거뜬히 사냥한 실력이니 겁날 게 없을 터, 사방이 탁 트인 자리에서도 유유자적 쉬고 있었다. 덤불 속 그늘에 몸을 누이기도 하고, 훤하게 밝아 온 하늘 아래 배를 있는 대로 드러내고 벌렁 누워 나비잠을 자기도 했다. 목을 세우고 앉아 있는 암사자 한 마리에게도 긴장감은 찾아볼 수 없었다. 반쯤 감긴 눈으로 꼬박꼬박 졸고 있었다.
하지만 같은 무리인데도 그때까지 식사를 끝내지 못한 암사자가 있었다. 새끼 사자 때문이었다. 한 살쯤 되었을까? 새끼 사자 한 마리가 어젯밤 먹다 남긴 버펄로 먹이를 앞에 두고 하염없이 늑장을 부리고 있었다. 한 입 먹고 딴청을 부리고, 또 한 입 먹고 딴청을 부리고…
초원의 식탁
새끼 사자에게서 조금 떨어져 앉은 암사자의 심정이 마치 내 마음 같았다. 이제는 20년 가까이 지난 그때, 아직 한글도 모르던 어린 딸과 식탁에 마주 앉아 날마다 반복하던 대화. 빨리 먹자. 먹고 있어… 빨리 먹어야지. 먹고 있다고. 빨리 먹으라니까. 먹고 있다니까…기다림에 지쳐 가는 건 단지 암사자만이 아니었다. 대머리독수리 한 마리가 바로 곁에서 그야말로 목이 빠져라, 사자의 식사가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위 하늘에서도 대머리독수리들이 줄지어 원을 그리며 날고 있었다. 마치 새끼 사자의 빠른 식사를 기원하는 군무를 추는 것 같았다. 그러거나 말았거나 새끼 사자는 또 한 입 먹고 딴청이고, 또 한 입 먹고 딴청이고…
그 장면을 담은 사진과 함께 새끼 사자 이야기를 들려주면 어린이들은 한목소리로 이렇게 외치곤 한다. 와니니다! 와니니… 무리에서 가장 느리고 약한 암사자. 그러나 아니, 그래서 와니니는 누구보다 의젓하게 자라나 무언가 조금 모자란 친구들과 함께 무리를 이루었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땅에서 자신들의 목소리로 포효하는 사자 무리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그래서 어린이 독자들이 와니니를 응원해 주는 게 아닐까. 느리고 약한, 모르는 것투성이인 데다 겁도 많은 어린 사자 와니니가 그래도 뚜벅뚜벅 제힘으로 초원을 걸어가니까, 결국 자기다운 목소리로 포효하는 암사자가 되니까. 그게 바로 어린이들이 세상에게, 어른들에게 바라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기다려 주는 것, 지켜봐 주는 것, 믿어 주는 것.
와니니다! 느림보 새끼 사자를 응원하는 어린이의 목소리를 듣고서야 나는 암사자의 진짜 마음을 알게 되었다. 조급한 인간 엄마와는 격이 다른, 암사자는 과연 초원의 왕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엄마였다. 암사자는 새끼 사자를 지켜보고 있었다. 붙어 앉아서 보채지도, 입 속에 먹이를 넣어 주지도 않았다. 조금 떨어진 자리에서 묵묵히, 새끼 사자가 자신의 속도로 하루를 살아 내기를 지켜봐 주었다.
그런데 돌발 상황이 벌어졌다. 사자들을 단숨에 긴장시키는 발소리! 어디선가 나타난 하이에나 네 마리가 주위를 맴돌기 시작했다. 암사자가 벌떡 일어섰다. 풀숲의 바람이 단숨에 팽팽해졌다. 그것으로 경계의 신호가 날아간 모양이었다. 덤불 아래서 졸고 있던 암사자가 불룩한 흙더미 위로 뛰어올랐다. 그 모습만으로 충분했다. 하이에나들은 슬그머니 물러났고 바람은 다시 부드럽게 풀숲을 흔들었다.
초원에서 가장 다정한 당신
든든한 엄마를 뒤에 둔 새끼 사자는 계속 늑장을 부렸고, 암사자는 새끼의 뒤를 지켰으며, 덤불의 사자 무리도 다시 낮잠에 빠져들었다. 하이에나들도 어딘가 쉴 자리를 찾아갔을 것이다. 맹수들의 대치에 얼어붙었던 얼룩말들도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가벼운 걸음으로 제 갈 길을 갔다. 사자들의 덤불 가까이 있는 물웅덩이에서는 하마들이 온종일 꼼짝 않고 잠수 중이었고, 신기루가 너울대는 지평선을 등지고 코끼리 무리가 물가로 다가왔다. 그래도 새들은 아랑곳없이 물가에서 노닐고, 혹멧돼지 가족이 총총걸음으로 다가와 목을 축였다. 하늘 저편에서 빠악? 하고 무언가를 주장하는 듯한 새소리가 날아들었다.
모두, 제자리에 있었다. 사자는 사자답게, 새는 새답게, 혹멧돼지는 혹멧돼지답게. 초원에서 태어나 초원으로 돌아가는, 모두가 제자리에서 제 모습대로 살아가고 있었다. 그곳이 바로 세렝게티, 지구에서 가장 푸른 땅이었다.
그곳에 어울리지 않는 것은 오직 우리, 인간이었다. 초원의 것이 아닌 냄새를 풍기며 초원의 것이 아닌 속도로 달려드는, 초원은 이해할 수 없는 욕심으로 초원의 주인들을 지구의 가장 외딴 자리로 내몰아 버린 족속들. 그렇게 세렝게티를 떠나 응고롱고로 국립 공원으로 갔다. 『푸른 사자 와니니』에서 ‘언제나 비구름이 머무는 초원’이라고 표현했던 그곳은 과연 천국 같았다.
건기에도 마르지 않는다는 마카티 호수를 중심으로 거대한 분화구는 온통 푸르렀다. 응고롱고로에 사는 동물들의 모습도 생기 넘쳤다. 윤기가 흐르는 모습에, 태도에서도 여유가 느껴졌다. 세렝게티의 누들은 물 한 모금 마음 놓고 마시지 못했는데, 응고롱고로의 누들은 심지어 풀숲에 앉아서 쉬기도 했다. 물웅덩이에 몸을 반쯤 담그고 잠든 하이에나 무리는 리조트에서 휴가라도 즐기는 것 같았다.
응고롱고로의 사자들도 다큐멘터리의 주인공 같았다. 수사자들은 당당한 몸집에 갈기가 풍성했고, 암사자들은 탄력 있는 사냥꾼의 맵시를 자랑했다. 갈기가 자라기 시작한 청소년 수사자들도 있었다. 마침 우리 사파리 차가 자리 잡은 위치도 좋았다. 사자를 볼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이기도 했다. 창문을 열어 놓고 정신없이 사진을 찍어 댔다.
그런데 위치가 좋아도 너무 좋았다. 수사자 한 마리가 가까이, 마치 나를 향해 똑바로 다가오는 것만 같았다. 나에게 볼일이라도 있는 것처럼, 곧장! 나는 반사적으로 창가 자리에서 피하고 말았다. 그 순간 수사자는 바로 그 창문 아래 그늘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면서 수사자의 기다란 꼬리가 우아한 호를 그리며,
툭!
수사자 꼬리가 창문 틈으로 들어왔다. 내가 앉았던 바로 그 자리에 수사자 꼬리가 툭 떨어졌다. 내 심장도 툭 떨어진 것 같았다. 우리는 큰 소리도 내지 못하고 얼어붙었다. 단지 꼬리 끝일 뿐인데!
수사자가 꼬리를 흔들면
곧 후회가 밀려들었다. 아깝고 약이 올라 땅을 치고 울 지경이었다. 바로 저 자리! 그대로 앉아 있었다면 수사자 꼬리가 내 다리에 떨어지는 건데, 툭! 그랬다면 내 심장은 그저 비유가 아니라 정말로 툭 떨어졌을지 모르지만, 하여간! 그랬다면 사자의 기운을 받아 『푸른 사자 와니니 2』는 하늘 아래 둘도 없을 걸작이 될 텐데!
그러나 사자 무리는 하찮은 인간의 뒤늦은 후회 따위, 욕심 많은 망상 따위 아랑곳없었다. 한동안 그늘에서 휴식을 취하다, 지루해졌다는 듯 휙! 꼬리를 거두었다. 사자 무리는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나 황금빛이 스며드는 풀숲 저편으로 사라졌다. 사냥을 준비하려는 걸까? 오늘은 또 누가 초원으로 돌아가고 또다시 태어나는 걸까? 그것은 초원의 일, 인간은 더 이상 제 길을 벗어나 초원을 침범해선 안 된다.
고작 6박 8일, 그러나 다른 우주를 다녀온 듯 얼떨떨한 기분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홍대입구역에서 내리는 순간, 무언가 어색했다. 지금껏 늘 그랬던 홍대입구역인데, 그런 게 당연했던 홍대입구역인데. 그곳에는 인간밖에 없는 것처럼 보였다. 오로지 한 종이 독식한 땅, 그게 부자연스럽게 느껴졌다. 부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초원이 내게 알려 준 사실이었다.
지구가 가장 지구다운 모습으로 빛나는 곳, 초원은 그렇게 존재하는 것으로 내게 더 많은 사실을, 내가, 우리가 알아야 할 모든 진실을 들려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짧은 시간으로는 그 마음을 다 알기 어려웠다. 아마도 끝내 나는, 인간은 초원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나는 지구에서 가장 푸른 그 땅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초원을, 누구보다 아름답고 다정하며 용맹한 사자 이야기를, 암사자 와니니 이야기를 어린이들과 나누고 싶었다. 어린이 독자들은 그 속에서 좀 더 많은 이야기를 들어 주리라 믿었다. 이제 와니니의 다음 이야기가 어린이들을 만나러 간다. 지금은 8월, 초원이 가장 푸르게 빛나는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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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사자 와니니이현 글/오윤화 그림 | 창비
무리를 위해 냉정하게 판단하고 행동하는 마디바와 부족한 힘이나마 한데 모아서 어려움을 헤쳐 나가려는 와니니의 모습을 나란히 보여 주면서, ‘함께’라는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하게한다.
이현(작가)
1970년 부산 출생으로 숙명여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다. 어쨌거나 내일은 오늘보다 멋질 거라 믿으며, 동화 『짜장면 불어요!』, 『장수 만세!』, 『오늘의 날씨는』, 『로봇의 별』, 『마음대로봇』, 『나는 비단길로 간다』 등을 썼다. 제13회 전태일 문학상과 제10회 창비 좋은 어린이책 창작 부문 대상, 제2회 창원 아동 문학상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