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지의 세계를 찾아 떠나는 여행
“열매, 꽃, 잎사귀, 가지들이 여기 있소. 그리고 당신 때문에 뛰는 내 가슴이 여기에 있소. 오로지 당신만을 향해 꿈을 꾸는 이 마음을, 사랑스런 그대 손길로 따스하게 감싸주오” - 폴 베를렌느 ‘초록’ 中
간결한 단어들로 이루어진 짧은 한 편의 시. 몇 줄 안 되는 그 짧은 시를 쓰기 위해 시인들은 수 많은 시간 동안 단어를 찾고, 그 단어들을 다듬고, 그 단어들을 하나의 문장으로, 한 편의 시로 탄생시킨다. 시인의 고통스러우면서도 황홀한 창작의 결과물인 한 편의 시는, 이름 모를 누군가에게 전해지며 그 사람의 이야기가 덧대어진, 애달프고 간절한 새로운 이야기가 된다.
뮤지컬 <랭보> 는 그 누구보다 ‘시’에 대한 열정과 애정이 가득했던 두 사람, 랭보와 베를렌느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그들 사이에 있었던 이야기들을 과거와 현재의 시간을 뒤섞어 풀어나가는 작품이다. 프랑스 문학계의 이단아이자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였던 랭보와, ‘시인의 왕’이라 불릴 만큼 뛰어난 시인이었으나, 평생 동안 창작의 고통에 시달리며 괴로워했던 연약한 베를렌느. 동료 이상의 감정으로 서로에게 뮤즈 같은 존재로 이어졌던 두 사람의 관계는 그 당시 프랑스 문학계에서도 연일 호사가들의 입에 오르내릴 만큼 파격적이었다.
뮤지컬 <랭보> 는 실제 두 사람 사이에 있던 사건들과, 두 사람이 그토록 갈망하며 평생을 다 바쳐 이루고자 했던 하나의 꿈, ‘시’에 대한 이야기도 함께 담아낸다.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무언가를 위해 끝없이 고뇌하고 좌절하면서도, 그 길을 향해 끈임 없이 나아가는 두 사람의 모습을 통해 평생에 걸쳐 걸어가야 하는 ‘길’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다.
뮤지컬 <랭보> 는 지난 2018년 초연 된 작품으로 초연 당시에도 탄탄한 완성도를 자랑하며 관객들의 사랑을 받은 바 있다. 국내에서의 성공에 힘 입어 중국과 일본에서 공연 한 바 있으며, 초연의 부족했던 점을 수정, 보완하여 1년 만에 다시 관객들을 찾아왔다.
투시자가 되어 시를 완벽히 이해하는 사람이 되고자 했던 랭보가 실제 시를 쓴 기간은 5~6년밖에 되지 않았다. 시를 쓰는 일에만 몰두하고, 사회의 관습과 통념에 반항하던 랭보는 폴 과의 관계가 끝난 이후 몇 년 지나지 않아 절필을 선언한다. 이후 랭보는 유럽과 아프리카를 오고 가며 시를 쓰던 그 시절과 전혀 상반된 상업적인 활동을 한다. 때론 커피를 팔기도 하고, 때론 무기를 판매하기도 하며 사업가이자 방랑가의 삶을 살았다.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건 시집이 아닌, 방랑하며 사는 삶 속에서 마주한 고단한 일상의 기록들이었다. 그 기록들을 써 내려간 랭보의 일기를 발견하고 그 속에 담긴 랭보의 일상의 조각들을 마주한 베를렌느는 랭보가 진정한 시를 남겼다 말한다. 평범하고 소박한 하루가 가진 위대함과 찬란함을 깨달았을 때 일상의 기록은 시가 된다. 처음 본 순간부터 서로를 알아봤던 것처럼, 베를렌느는 랭보가 마침내 진정한 삶의 의미를 찾아 세상 모든 것으로 벗어나게 되었다는 걸 글 속에서 읽어낸다.
<랭보> 는 이 모든 과정과 이야기의 전개를 담백하고 잔잔하게 이어나간다. 작품 자체가 하나의 서정시처럼, 섬세하게 이야기가 이어진다. <랭보> 의 시적인 분위기를 더욱 돋보이게 하는 건 민찬홍 작곡가의 손에서 탄생한 넘버들이다. 감각적인 랭보와 베를렌느의 시에 아름다운 선율이 더해지며 시가 지니고 있던 본래의 감성을 더욱 짙고 풍부하게 만든다. 특히 공연 마지막 부분에서 랭보와 베를렌느, 들라에 세 사람이 함께 부르는 ‘초록’은 작품에 깔려 있던 감정선을 폭발시킨다. 랭보의 기억을 애써 지우고 외면하려 했던 베를렌느는 그제서야 비로소 랭보를 이해하게 되고, 두 사람이 함께 했던 지난 날의 의미를 깨닫게 된다.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 역시 작품의 몰입도를 높인다. 재연 공연에 처음 참여한 백형훈은 자유로우면서도 불안정한, 위태로운 천재 시인의 모습을 완벽히 표현했다. 초연에 이어 재연에도 베를렌느 역으로 함께한 에녹의 연기 역시 돋보였다. 랭보에 대한 애증이 뒤섞인 예민한 시인 그 자체로 작품의 완성도를 높였다.
공연 중반, 두 사람은 가족도, 사회적인 명예도, 다 내던지고 오로지 마음 속의 소리를 따라 자유와 시를 찾기 위해 함께 도망친다. 해변가에 도착한 랭보와 베를렌느는 바다를 보고 즉흑적으로 해변가에 시를 적어 내려가고, 시가 완성 된 모래 위에 키스를 한다. 타인의 시선, 타인의 판단, 타인의 기준에서 벗어나 오직 나, 오직 서로 안에서 존재하며 자유를 얻은 두 사람의 해맑은 미소는, 공연이 끝난 뒤에도 오래도록 깊은 여운을 남긴다.
임수빈
현실과 몽상 그 중간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