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남기 위해 거리를 둔다
살아남기 위해 둔 거리, 둘 수밖에 없었던 거리. 나는 그것을 오해하고 싶지 않고 이해하고 싶고, 이해 당하고 싶다.
글ㆍ사진 엄지혜
2019.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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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일에 힘껏 화를 내는 일은 가능하지 않다. 그래 봤자 대부분 소용없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살아남기 위해 거리를 둔다. 그리고 다시 마음이 단단해지면, 그때 다시 할 수 있는 걸 한다.
(권김현영 저,  『다시는 그전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151쪽)

 

책을 읽지 못한 한 주를 보냈다. 일을 해야 하니 띄엄띄엄 읽은 책들은 있었으나, 온전히 몰입해 읽은 책이 없었다. ‘여성주의 연구활동가’ 권김현영의  『다시는 그전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는 책상에서 가장 눈에 띄는 곳에 올려 놓고는 선뜻 집어 들지 못했다. 한국사회에 또 한번 분노하게 될까 봐, 이 분노를 주체하지 못할까 봐, 조금 시간차를 두고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목차를 먼저 훑어봤다. 프롤로그를 읽고 목차를 보기 마련인데, 웬일인지 목차 제목이 더 궁금했다. 60쪽 제목 ‘이 정도로 까다롭게 예민하다고 하다니’에 형광펜 죽죽, 76쪽 ‘존엄한 취향’에 별 표시 두 개, 그리고 151쪽 ‘타인의 고통에 내가 더 상처받을 때’를 읽고는 잠시 멍해졌다. 권김현영 저자는 “가장 최근에는 내장이 타는 냄새를 그대로 맡기도 했다. 이번에는 여성의 신체에 주먹을 넣고 장기를 뜯어내 사망에 이르게 한 사건이 징역 4년형을 받았다는 국민청원을 읽고, 5일 동안 꼬박 그 사건을 몸으로 겪어내야 했다”고 말했다”(152쪽)고 썼다.

 

“내장이 타는 냄새”, 나도 그 냄새를 맡아본 일이 있다. “타인의 고통에 내가 더 상처받을 때”, 나에겐 일상적인 일이다. 어떻게 당사자보다 더 화가 날 수 있는지, 때때로 놀랍기도 하다. 과잉 공감 능력은 아니다. 내가 겪을 수도 있는 일을 타인의 경험으로부터 추체험할 때, 나는 공포를 느낀다. 동시에 힘껏 화내고 싶은 욕망을 어떻게 표출해야 할지 몰라 발을 동동 구른다.

 

거리 두기를 잘하는 사람을 보면, 부럽기도 하고 화나기도 한다. 스스로 내야 할 화의 농도를 이미 측정이라고 한 것마냥 훌훌 털어버리는 사람은 과연 고수일까? 권김현영 저자는 “똑똑한 여자, 인기 없어”(70쪽)라고 말했던 대학 선배의 말을 20년째 곱씹으면서 한심해하는 한편, “나혜석을 알려준 건 고마웠다”(70쪽)고 썼다. 요즘은 10년째, 20년째 못 잊는 말이 있다고 고백하는 저자의 이야기를 들으면 왜 이렇게 남일 같지 않은지, 진짜 위로는 ‘구체적인 이야기’에서만 피어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짐작해본다.

 

다시 곱씹고 싶은 말은 “살아남기 위해 거리를 둔다. 그리고 다시 마음이 단단해지면, 그때 다시 할 수 있는 걸 한다"이다. 거리를 두어야 하는 순간을 모른 체하지 말고, 거리를 둬야 마땅한 상황을 오해하지 말고, 마음이 단단해지는 때를 기다리기. 살아남기 위해 둔 거리, 둘 수밖에 없었던 거리. 나는 그것을 오해하고 싶지 않고, 이해하고 싶고 이해 당하고 싶다.

 

 

 

 

 


 

 

다시는 그전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권김현영 저 | 휴머니스트
지난 20여 년 동안 여성주의 연구활동가로서 글을 쓰고, 강연을 하고, 여성과 연대해온 권김현영의 첫 단독 저서. 낯설지만 통렬한 페미니스트의 시선으로 지금-여기를 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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