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에 가장 인상적으로 본 영상은 70대 중반의 나이에 38세 이상 여성 보디빌더 대회에서 2위를 차지한 임종소님의 인터뷰였다. 척추관협장증으로 걷기도 힘들어지고 전동 휠체어를 사야 하나 고민할 때 헬스장에서 재활이라는 단어를 보고 운동을 시작했고 일주일에 3회씩 PT를 받다가 대회까지 출전했다. “처음엔 제가 나이가 몇인데 보디빌딩을 하느냐고 그랬어요. 그런데 제가 도전을 좋아하거든요.”
낚시꾼 스윙으로 알려진 골프 선수 최호성 기사만 나오면 이미 아는 내용이지만 또 읽는다. 수산고 재학시절 참치 해체 작업을 하다가 오른쪽 엄지가 절단되는 사고를 당하고 골프장 영업사원을 하다가 30대에 프로 골퍼로 데뷔했다. 올해 마흔여섯인 최호성 선수는 일본과 미국에서 독특한 스윙폼으로 갤러리들의 뜨거운 환호를 받고 있다.
이런 스토리들을 볼 때 자연스럽게 떠올리는 단어가 late bloomer다. 늦게 꽃을 피운 사람, 인생의 후반에 전성기를 맞은 사람, 우리말로는 늦깎이로 번역하면 쉽게 이해가 되고 대기만성이라는 적절한 사자성어도 있다. 일본어에는 늦게 피는 꽃이라는 뜻의 '오소자키(遲笑き)'란 단어가 있고 이들을 응원하는 문화도 있다고 한다.
역사상 가장 건강한 노년이 많아진 시대다 보니 중년과 노년의 가능성과 행복을 조망하는 것이 트렌드이기도 하지만 나는 유난히 늦게 핀 꽃들의 이야기를 사랑하고 수집하는 편이다.
구글을 찾아보니 delayed heyday(미뤄진 전성기)라고도 설명하는데 한 때 나의 헤이데이는 영자 신문반에서 활약했던 고등학교 때 이미 끝난 건 아닐까 하는 한심한 생각으로 한숨 쉬던 사람이라서 그럴까. 30대에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지는 것 같은 시절을 보내고 있을 때 아버지가 술만 드시면 하던 “너는 대기만성형이다.”라는 말을 듣고 딸을 향한 기대를 못 버리는 부모님 때문에 더 심란해졌던 적이 있기 때문일까.
사십 대 중반에 진입하자마자 확연히 달라지기 시작한 내 감정과 행동을 들여다보면서 중년에 대한 글을 꾸준히 쓰고 있기도 하고 요즘 50대 언니들, 인생 선배들과 가까이 지내면서 계속해서 영감을 받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몇 달 전에 알게 된 요가 선생님은 피아노 선생님을 하다가 50대에 인도에 가서 요가 수련을 하고 강사를 시작하셨고 지금 환갑이신 이 분의 요가원엔 학생들이 점점 늘어간다. 지리산 종주를 세 번 하고 히말라야 등반을 했고 산티아고에도 꼭 가겠다고 하시는 그 분의 근육과 체력과 지혜를 보며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나의 50대와 60대를 그려보곤 한다.
아이 넷을 키워놓고 사이버 대학에 등록하려고 고민하려는 친구도 있고, 겨울에 아이들의 졸업식을 피해서 인도 여행을 계획하는 친구가 있다. 그 친구는 산행을 하건 자전거를 타건 항상 남보다 몇 배는 더 감동한다. “나 여기 처음 와 봤어. 이런 세계가 있을 줄 몰랐어. 살아 있는 게 고마워.”
레이트 블루머들은 그저 새 길을 개척해 성공을 이루어 감격하는 건 아니다. 어둡고 고통스러운 시간을 겪어낸 만큼 더 용감하고 더 단호하고 더 자유롭다. 두려움을 내려놓고 순간을 만끽한다.
본받고 싶은 외국의 늦깎이 여성들의 사례를 모아서 보고 싶다면 리사 콩던의 『우리는 매일 새로워진다』 를 읽으면 된다. 이 책에는 49세에 서핑을 시작하고, 쉰의 나이에 전업 작가가 되고 53세에 의대에 입학한 여성들의 이야기가 아름다운 일러스트와 함께 이어진다. 이 책의 저자인 리사 콩던도 마흔 살에 일러스트레이션을 시작해 44세에 첫 책을 내고 45세엔 일곱 권의 책 저자가 되었다. 그녀는 나이 드는 일은 “내 자신에게 이르도록 해주었다”고 말한다. 이 책의 역자 후기야말로 화룡점정이었다. 박찬원 번역가 또한 마흔셋, 대입 수험생 엄마였을 때 통번역 대학원에 진학해 나이가 더 어린 교수님들 밑에서 공부한 후 출판계 문을 두드렸고, 찾아보니 서른 권이 넘는 책을 작업하셨다. 이 책의 번역이 좋다고 느낀 이유가 실력도 실력이지만 번역가의 절절한 공감이 문장마다 배어 나와서는 아닐까 싶어졌다. “The flowers don’t know they’re late bloomers. They’re right in season.” “꽃들은 자신이 늦게 피운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그 꽃들은 바야흐로 한창때다.” 이 문장을 번역하면서 얼마나 신이 나셨을까.
얼마 전 여성 작가들의 송년회 모임에 갔는데 갈 때는 별생각 없었다가 참석자들과 이야기해보고 알았다. 자녀가 있는 분들도 있었지만 그중 우리 딸의 나이가 가장 많다는 것을. 다음날 작가님들 명단을 찬찬히 보면서 그제야 중얼거렸다. ‘내가 제일 나이가 많구나.’ 그래서일까? 그 자리에 오신 분들이 얼마나 설레고 떨렸는지 이야기했지만 실은 나는 전혀 긴장되거나 쑥스럽지 않았다. 그 파티에 왔다는 것만으로도 무조건 영광이었고 한 분이라도 더 이야기하고 싶은 마음에 와인 잔을 들고 열심히 돌아다녔다. 그래서 그런지 말을 너무 많이 하고 온 것 같아 진한 후회가 밀려들긴 하지만 말이다.
다음에도 초대되려면 말을 아끼고 동생들과 후배들 이야기를 많이 들어야지. 내게 또 다른 기회가 있을 것이라 믿고 내 주변 훌륭한 롤모델들을 보면서 만나고 싶은 언니가 되는 방법을 연구해야지.
“우리는 세월이 흐르면서 늙는 것이 아니라 매일 새로워진다.” 이 책에 소개된 에밀리 디킨슨의 문장을 보며 힘을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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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매일 새로워진다리사 콩던 저/박찬원 역 | 아트북스
나이가 들어서도 충만한 인생을 살고 있는 여성들이 소개되어 있다. 이것은 이제까지 회사에서, 대중매체에서, 또 책에서 비어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던 이야기이다. 지워져 있던 여성들, 사라져간 여성들의 목소리를 듣고 제자리를 찾아주는 것을 담고 있다.
노지양(번역가)
연세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KBS와 EBS에서 라디오 방송 작가로 일했다. 전문번역가로 활동하며 《나쁜 페미니스트》, 《위험한 공주들》, 《마음에게 말 걸기》, 《스틸 미싱》, 《베를린을 그리다》, 《나는 그럭저럭 살지 않기로 했다》 등 60여 권의 책을 번역했다.